패월진천 222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22화
221화. 뭐 해? 이제 네 차례야
뒷덜미가 쭈뼛하게 설 정도로 짜릿한 한기.
“……!”
세 명의 무인을 그들이 가진 무기와 함께 통째로 베어 버린 소청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공을 발판 삼아 날아오는 듯한 사내의 모습.
백색의 한기를 뿌리며 다가오는 그 모습은 마치 안개 같기도 했고 눈보라 같기도 했다.
‘백효!’
소청의 콧잔등에 잔주름이 만들어지고 들려 올라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길어진 듯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합!”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짧은 기합성과 함께 백효의 일장이 확 하고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휘돌려진 소청의 창대가 장력의 끝부분을 때렸다.
쩌엉!
일격과 함께 부서진 한기의 조각들이 사방에 뿌려졌다.
지이잉-!
“…….”
분명 자신을 시험해 보고자 한 일격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몸이 밀릴 정도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장력을 때려 낸 창대의 미세한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쩌적, 쩍.
그 와중에 부딪친 창날 아랫부분에 허연 살얼음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손바닥으로 차가운 느낌이 파고들어 왔다.
빙마곡의 무인들이 가졌던 극음지기에 필적할 정도로 강한 한기였다.
짜앙!
소청이 단전을 채운 화기를 밀어 넣자 짧은 공명음과 함께 떨림이 멈추고 살얼음이 부서져 나갔다.
“진소청…….”
전장을 낮게 울리는 목소리.
백의에 하늘빛 장삼을 걸치고 나른한 표정을 가진 그는 소청을 응시했다.
북해의 무인들은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백의를 입은 검수들이 포위하듯이 둘러쌌다.
“…….”
길게 늘어뜨린 창극이 바닥에 닿으며 작은 울림을 만들었다.
소청은 백의 검수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백효의 얼굴에 집중했다.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구자겸, 혈승.
그리고 무황과 혁련휘.
이전에 만난 수많은 강자의 느낌과 비교해도 비슷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공통점이라면 딱 한 가지.
강하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추측이 되지 않았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뱀처럼 차가웠고 기세는 당장이라도 살을 엘 듯이 날카로웠다.
“대, 대공!”
북해의 무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스러워하자 백효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뭣들 하는 거지?”
“…….”
“적은 강 너머에 있다.”
나지막이 내뱉은 말에 멈추어 있던 북해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소청은 안중에 두지도 않은 것처럼 강을 향해 달렸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 소청과 백효만이 정지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효를 만난 이상 다른 곳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니 여유가 없었다.
북해의 무인들은 남은 이들에게 맡겨 두면 될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소청이 해야 할 일은 단강구까지 달려오며 사용한 내공을 빠르게 회복하고 백효를 쓰러뜨리는 것뿐이었다.
“너무 노려보지 말게.”
“…….”
“자네가 진소청이겠지?”
백효는 마치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친구를 만난 듯이 말을 꺼냈다.
“구 사형을 그리 만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네. 혈승을 죽였을 때도 그렇고 말이야. 무황 외에는 인물이 없을 줄 알았거든.”
“…….”
나른함을 지우고 싱글거리는 백효의 모습에 소청이 눈을 찡그렸다.
승부에 앞서 긴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여유로웠다.
지나칠 정도로…….
“만나고 싶었다.”
“잠시 후면 날 만나게 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소청은 창대를 살짝 당겨 올리며 옆구리에 끼었다.
“이런, 이런…… 급하군. 대화나 좀 나누자고.”
“대화?”
“급할 것 없지 않나? 나는 자네가 아주 궁금하거든.”
“…….”
백효의 웃음에 소청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전쟁 중이었다.
지금도 강 안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이의 시신이 강을 메우듯이 채워 놓고 있었고 강물 색이 붉게 변한 지 오래였다.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수하들이 죽든 말든 개의치 않는 것이다.
“개새끼로군.”
“뭐?”
“하긴 네놈들에겐 수하들의 죽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거겠지?”
소청의 말에 백효가 슬쩍 고개를 돌려 강 안의 싸움을 바라보고는 빙긋이 웃었다.
“너희는 언제나 그랬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들까지 죽음으로 내모는 자들…….”
“흠, 마치 오래전부터 우리를 알아 온 것처럼 말하는군.”
“그래, 알고 있지. 너희가 사람이기를 포기한 짐승 새끼들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
소청의 이죽거림에 반응을 보인 것은 백효가 아닌 백의 검수 중 하나였다.
“닥쳐라!”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하는 그의 모습에 소청의 얼굴이 휙 하고 돌아갔다.
파앙!
“……!”
순간 그의 몸이 사타구니에서 정수리까지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수직으로 그어 올린 창대.
보이지도 않았다.
단 일격으로 소청은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낸 백의 검수 하나를 반으로 잘라 버렸다.
“닥쳐야 할 건 너희들이야. 주인과 말하고 있는데 어디서 개새끼가 짖고 지랄이야?”
그 모습에 백효가 눈을 찡그리며 소청을 노려보았다.
“쯧, 성급하군. 화를 다스릴 줄 모르는 건가?”
“아, 이번엔 반응을 보이는군. 왜? 같은 개새끼인가 보지?”
“…….”
비꼼이 가득한 소청의 어투에 백효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전 소청의 움직임.
일순간 사라진 기운이 수하의 전면에서 거대화되었다. 신과 축의 묘리가 분명했다.
벽을 넘어선 자들만 구사할 수 있는 변형점의 무공이었다.
“좋아, 아주 즐거워. 무황을 만나기 전까지 유희거리로는 딱 적당한 수준이야.”
백효가 나지막이 웃었다.
“너 따위가 무황 어른을? 하아, 언제까지 되지도 않는 개소리를 들어 줘야 하지?”
소청의 말에 백효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제법 도발도 할 줄 아는군. 방금 전은 꽤나 언짢았다.”
“그럼 입만 나불대지 말고 직접 나서서 싸워 보든가.”
소청이 창대를 움켜쥐었다.
구자겸과의 싸움에서 최선을 다했었다.
그때와 달리 조금 더 성장한 소청이었지만 쉽사리 먼저 공격할 수는 없었다.
백의 검수들은 모두 스물, 아니 하나를 죽여서 열아홉.
그들과의 싸움으로 기력을 빼면 백효와의 싸움이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게 되었군. 이쪽도 입장이 있어서 말이야. 좀 전에 네가 죽인 녀석들은 말이지, 모두가 형제 같은 녀석들이거든. 그중에 하나가 죽었으니 복수할 기회라도 줘야 하지 않겠나?”
“결국은 내 힘을 빼 보겠다는 말이군.”
“후후,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백효가 음산하게 웃으며 마치 무대의 중앙 자리를 내어 주는 것처럼 발을 뒤로 물렸다.
“칫!”
고작 그 한 발로 인해 주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이 경계였던 것처럼 백효가 뿜어내던 기세가 사라지고 백의 검수들의 칼날 같은 예기가 소청을 압박해 왔다.
“…….”
그들이 내뿜는 기세는 생각보다 강했다.
‘제길, 검진(劍陣)이었나?’
소청의 날카로운 눈이 주위를 훑었다.
백효의 한 발.
그것이 신호가 된 것이다.
백의 검수들은 애초에 소청의 주위에 검진을 이루고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효가 물러나는 순간 발동되었다.
‘분명 하나가 죽어서 불완전할 텐데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접해 보지 못한 검진이었다.
전생에 제갈세가를 털며 중원에 존재하는 모든 진법을 섭렵했다고 생각을 했었다.
더욱이 마천 비고에 구축되어 있던 만상귀혼진(萬象鬼魂陣)을 뚫은 적도 있었다.
백의 검수들의 검진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해서 당황하지는 않았다.
단지 검진을 깨고 나면 백효와 싸워야 했기에 힘을 아껴야 하는 싸움이라는 것을 한 번 더 상기했을 따름이었다.
휘류류류류…….
그들이 걸음을 옮기자 검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진은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힘을 감추고 있다가 소청이 움직이는 순간 공격해 올 것이 분명했다.
‘진을 깨는 방법…….’
진법에 대해서 알고 생문과 사문을 이용하는 것이 첫 번째였고, 진이 가진 힘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부수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진 속에서 진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으로 가장 어려운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관조…….’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보이는 흐름의 결.
소청은 천천히 관조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백의 검수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그의 감은 두 눈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의 흐름, 발의 움직임.
무인들의 기세…….
그리고 각 개인을 연결한 수많은 점이 이어진 결이 눈에 보이듯이 세세하게 그려졌다.
소청의 입가에 비웃음이 생겨나고 발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면을 스치듯이 서서히 진의 흐름에 동화되어 가자 검진의 압박감이 옅어졌다.
‘……!’
백의 검수들은 어느 순간 소청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데 그의 기세가 흩어졌다.
그들이 펼치고 있는 진은 차륜진의 일종으로 강한 적의 힘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진법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힘이 무(無)로 돌아가 버리면 진의 힘 자체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일각…… 이각…….
시간이 흐를수록 백의 검수의 수장이자 진의 축을 맡은 적림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검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도가 요구되었다.
특히나 소청과 같은 강자를 상대할 때에는 그 집중을 이어 가기 위해 더욱 많은 진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청이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들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이 싸움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 틀림없었다.
‘당황스럽겠지.’
그 순간 소청이 슬쩍 기운을 흘렸다.
그리고.
파학!
검 하나가 소청을 향해 쏘아졌다.
‘젠장! 안 돼! 미끼다!’
적림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과도한 집중으로 평정심을 잃어버린 수하가 너무 성급하게 반응한 것이다.
“멍청한 새끼들…….”
소청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잔인하게 변했다.
검이 빠져나오는 순간 생겨난 흐름의 틈.
소청은 곧장 그곳을 향해 창극을 밀어 넣었다.
따앙!
기운이 실리지 않았으니 막대한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백의 검수가 소청의 창극을 막는 순간 흐름의 아귀가 틀어졌고 찰나에 불과했지만, 검진이 흐트러졌다.
팍!
백의 검수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소청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다! 위쪽이다!”
적림의 외침에 백의 검수들이 검진을 파하고 일제히 검을 위로 뻗었다.
스물, 아니 하나가 줄어 열아홉 개의 검기가 소청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다 죽어라!”
음산할 정도로 싸늘한 비웃음과 함께 곧게 세운 소청의 창에 거대한 푸른 구체가 모였다.
건월식 만월.
콰아아…….
쏟아진 달이 백의 검수들의 검기를 집어삼키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의 검수들은 허물어지는 검기와 함께 눈앞으로 다가오는 푸른 달의 모습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콰아아아앙!
거칠게 지면에 작렬하는 푸른 불꽃.
열아홉의 검수 중 살아남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몸은 시신조차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흉하게 쓰러졌고 만월의 기운이 만들어 낸 상처에 그들이 진을 이루었던 자리에는 거대한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
백효는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자신이 만들어 낸 잔인한 흔적 앞에 서 있는 소청을 바라보았다.
지이익.
소청이 천천히 양발을 벌리자 흙더미에 긴 족적이 만들어졌다.
꾸우…….
힘주어 잡은 창대의 끝을 백효를 향해 뻗은 소청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 해? 이제 네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