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21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21화
220화. 기대했던 만남
까드득, 까드드득…….
쇠붙이가 지면의 돌들에 부딪히며 기분 나쁜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등 어림에 멘 검은 피풍의가 그리 빠른 속도도 아닌데 바람을 맞고 펄럭거렸다.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앞머리가 눈을 가렸지만 구애받지 않는 듯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걷는 길은 혈로였다.
수많은 시신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의 신발은 흐르는 핏물에 닿아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크으으…….”
북해의 후방을 지키고 있던 무인 묘곽은 나무에 기댄 채 걷고 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사내.
걷는 걸음마다 짙은 살기가 뿜어지는 그가 찾아온 것은 불과 한 시진 전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창을 장창으로 바꾸는 쇳소리가 들리는 순간 백여 명의 무인들은 순식간에 고깃덩이처럼 썰려 버렸다.
“네, 네놈…….”
“…….”
고개를 든 사내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묘곽을 향했다.
그리고.
콰득!
창이 묘곽의 목에 틀어박혔다.
“끄억…… 끄…….”
차가운 고통에 눈을 부릅뜨고 몸을 꿈틀거리던 묘곽은 힘없이 고개를 꺾었다.
파삭!
사내는 묘곽의 목을 지나 나무까지 꿰뚫었던 창을 뽑아내었다.
“…….”
그는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낼 생각도 하지 않고 시선을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곡에서 소강 일행과 헤어진 소청이었다.
검곡을 떠나 적의 뒤를 쫓으며 단강구를 향해 곧장 내려왔다.
북해의 주 전력이 남하했지만, 그 경로상도 적은 남아 있었다.
긴 꼬리를 만들며 이어진 적을 섬멸하며 달려온 소청은 드디어 단강구에 도착했다.
병장기가 부딪히며 만들어 낸 파열음과 고통에 찬 비명이 눈앞에 치열한 전쟁이 펼쳐지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숲이 끝나는 곳에 빼곡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는 북해 무인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소청은 창대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멀리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는 한기.
보이지 않아도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전장에서 이만한 존재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백효…….”
소청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고 단중의 화기가 단전으로 내려와 어우러졌다.
소청의 걸음이 심장이 뛰는 속도만큼이나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의 후미와 만나는 순간 달리던 속도를 멈추자 발이 땅바닥을 파헤쳐 긴 족적을 만들었다.
“후웁!”
가슴을 부풀리며 양손에 힘을 가득히 주는 순간 뒤로 뻗었던 창대가 당겨졌다.
마치 대지에 박힌 나무를 단번에 뽑아내듯이 끌어당기자 창대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질 듯이 휘어졌다.
후웅!
소청의 손을 따라 반대편까지 횡으로 그어진 창대는 눈앞의 공간을 양분해 놓은 긴 호선에 푸른 불꽃을 더했다.
콰콰콰콰!
창극에서 이어진 불꽃이 반월형의 강기로 변해 대기를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아름드리나무가 거센 소리를 만들며 쓰러졌고 북해의 무인들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사방에 피가 뿌려지고 육신의 조각들이 허공에 솟구쳐 오르자 삽시간에 혼란이 일어났다.
“적이다!”
거대한 일격을 맞아 당황했던 북해의 무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한 소청을 향해 몸을 돌려 왔다.
“북해……. 단강구에 모조리 묻어 주마!”
턱 언저리에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이를 다문 소청이 북해의 무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강의 중심.
오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가득히 메우며 날아오는 화살을 바라보는 백효의 얼굴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고작 이 정도인가?”
그가 예측한 대로 제갈휘문은 꽤나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폭약, 진법, 함정.
그리고 장강 연합 무인들의 수공.
그리고 이어진 화살의 공격.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준비를 했다.
그 모든 것들을 만들자면 만 명에 가까운 인부들이 동원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마지막일 것이다.
북해의 무인들을 맞이해 그들이 준비한 발악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을 흥분시키지 못했다.
자신이 나서게끔 강렬함을 느끼게 하는 무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호오?”
그 순간 쏟아지는 화살 비를 뚫고 강을 넘은 북해 무인들의 선두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콰아앙!
마치 폭탄이 터트려진 것처럼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고 북해의 무인들이 튕겨 나왔다.
멀리서 지켜보는 백효 앞의 수면이 떨려 올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수많은 창의 궤적을 만들어 내며 북해의 선두를 부수고 있는 사내.
‘진소청?’
만나 보지 못했으나 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 뛰어난 무위였다.
만나 보고 싶었던 상대였으나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힘을 아끼는 것인가?’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기에 백효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구자겸과 혈승을 죽였다는 그는 무황 다음으로 마천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인물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멀리 강 너머에 나타난 그는 자신의 흥미를 돋울 정도의 힘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강하긴 하지만 모자람이 많았다.
눈에 보이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북해빙궁주인 미여령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흠, 좀 더 강렬한 것을 원했는데……. 뭐 직접 붙어 보면 다르겠지.”
백효가 붉은 혀로 아랫입술을 쓸며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뒤쪽에서 엄청난 존재감이 그의 기감을 파고들었다.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섬뜩한 힘에 백효의 고개가 빠르게 돌려졌다.
“……?”
백효의 표정에는 이전의 나른함이 아닌 긴장감이 가득했다.
쩌어어어!
푸른 불꽃을 머금은 반월형의 강기가 강을 건너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설화궁의 무인들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 근원이 된 위치에 서 있는 한 사내의 모습. 검은 창을 들고 자신의 방향을 노려보고 있는 사내.
치렁치렁한 앞머리를 뚫고 푸른빛 안광이 쏟아지듯이 흘러나왔다.
“하, 이것 봐라?”
꽤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거친 눈동자에 서린 살기에 전율이 돋아 올랐다.
푸른 불꽃을 머금은 창이 휘둘러 져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설화궁의 무인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백효는 사내의 정체를 확신했다.
진소청, 저놈이 진짜 진소청이구나.
“크크크……. 그래, 이거지. 이래야지! 아주 좋아. 기대한 것 이상이군!”
흥분이 끓어오르자 그의 몸에서 새하얀 한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직!
그의 일보가 무겁게 얼음을 짓눌렀다.
파앙!
백효의 신형이 깊은 족적을 남기며 소청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 *
쉬익! 콰앙!
휘둘러진 검이 폭발을 만들어 내자 한음곡의 무인들이 만들어 낸 방어선 일부가 찢겨 나갔다.
치열한 전장.
벌써 사흘을 이어 온 싸움이었다.
무수한 피해를 입혔지만 한음곡의 방어선을 완전히 뚫을 수가 없었다.
“소련주님! 놈들의 후방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백강의 말에 혁련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별동대와 철혈군의 공격에 방어 세만을 취하고 있던 한음곡 후방의 움직임이 묘하게 변했다.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도주가 아니라 새로운 공격을 위해 정비한 대열이 통째로 움직이고 있다.
혁련휘가 이끌고 온 무인들의 무위는 경천동지할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그들이라 해도 사천여에 달하는 한음곡의 수적 우세를 뒤집기는 힘들었다.
또한, 추격전에서는 쫓기는 자보다 뒤쫓는 자의 체력 소모가 훨씬 큰 법이었다.
계속된 싸움으로 내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고 육체에 쌓인 피로로 인해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투를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혁련휘와 별동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와류의 천왕삼권을 능수능란하게 펼치는 황보인과 축의 묘리로 펼치는 매화검은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온몸에 가득한 상처들, 그들 역시 지치긴 매한가지였다. 점점 더 많은 공격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러나야 할 때를 놓쳐 버렸다.
잠시 공격을 멈추고 내력을 회복해야 할 시기를 놓친 상태에서 적들이 움직이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주님 곧 단강구입니다.”
백강의 말에 혁련휘의 미간이 좁아져 주름을 만들었다.
본대가 기다리고 있는 단강구를 앞두고 적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필시 북해의 본대가 정사 연합의 방어선과 부딪친 것이다.
“망할, 놈들은 우리를 방어할 병력만을 남기고 본진을 삼면으로 포위할 생각이군.”
혁련휘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세 명의 적을 베어 내며 물러났다.
적이 우회하고 있다.
제갈휘문은 단강구를 최후의 격전지로 삼았다. 적에 대비해 수많은 준비를 해 놓았을 터였다.
수적인 열세를 뒤집기 위한 함정과 진법.
제갈휘문이 직접 나섰으니 적의 피해는 적지 않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적이 우회를 택했다면 필시 좌측을 맡은 적도 움직임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신승이 죽었으니 좌측의 병력을 막아 줄 여력이 없었다.
아무리 제갈휘문이라 해도 삼면에서 공격을 당한다면 전략에 큰 구멍이 뚫리게 된다.
최소한 자신이 맡은 한음곡의 전력을 줄여 본대의 부담을 낮춰야만 했다.
‘젠장, 백효와의 싸움을 위해 기력을 남겨 놓고 있었는데…….’
혁련휘의 눈이 찡그려졌다.
‘소청, 아직도 후방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후방을 공격한 소청에게서 아직 연락이 당도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쪽의 상황도 여의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리를 하더라도…….
“백강!”
“예.”
“일단 물러난다.”
“예?”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다. 적은 교대로 방어선을 지키고 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해. 이대로 가다가는 쓸데없는 피해만 늘어날 뿐이다.”
맞는 말이었지만 전선의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다.
“맡기겠다.”
혁련휘의 말에 백강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옥명, 황보인, 서문중걸.”
“예. 소련주!”
“우리는 이동하는 적들의 전방으로 접근해 적의 진격을 차단합니다.”
“예?”
자신들에게는 물러나라 하고 스스로는 적 앞으로 이동하겠다는 혁련휘의 말에 백강이 눈을 부릅떴다.
“소련주님! 안 됩니다. 아무리 소련주님이라고 해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지치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던가?
하지만 옥명자 등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좋습니다. 그리하시죠. 적이 본진에 가까워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
옥명자뿐만이 아니었다.
황보인, 서문중걸까지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니 백강으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소련주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너희들은 물러나라.”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철혈군은 혁련휘의 호위였다.
그들은 자신의 주군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소련주님!”
“백강.”
혁련휘가 백강을 응시했다.
이미 결심이 선 그의 눈동자를 본 백강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은 우리가 막고 있겠다. 기력을 회복하면 뒤는 철혈군이 맡아 주어야 한다.”
결연한 한마디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 그럼 가 보실까요?”
혁련휘가 백강을 놓고 별동대의 세 사람에게 말하자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전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역시 권왕쯤 되려면 정면에서 싸워 줘야지!”
“옳은 말이오! 권왕이라 불려야 할 황보 공자께서 뒤에서 습격이나 해서는 안 되지요.”
황보인의 말에 서문중걸이 맞장구를 쳤고 옥명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겁니다.”
“소련주께서는 걱정 놓으십시오. 거 죽는 게 두렵겠습니까?”
황보인이 제 주먹을 움켜쥐어 보이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내 서둘러 이놈들을 죽이고 북천대공이라는 놈의 면상에 주먹을 박아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피식 웃었다.
서천맹에서 구자겸을 만나 꽁지 빠지게 도망쳤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 갑시다! 전설을 만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