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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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18화
217화. 격돌, 전쟁의 시작
피 냄새로 가득 찬 검곡.
이미 북해의 진격은 산서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전투가 일어난 지 하루라는 시간이 지난 그곳에는 시체 떼를 파먹고 있는 까마귀들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스승님!”
승혜가 눈을 부릅뜨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멸절사태를 향해 다가갔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멸절사태의 상태를 확인한 승혜가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아 오열했다.
“흐흑, 어흐흑…….”
그녀의 울음이 별동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멸절사태의 몸에는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았다.
말라 버린 피.
감지 못한 채 부릅뜬 눈.
원통했으리라.
신승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눈조차 감지 못했으리라.
그녀의 앞에서 오열하는 승혜를 대신해 소강이 멸절사태의 시신을 바로 눕히고 눈을 감겨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신승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별동대의 무인들이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발견할 수가 없었다.
육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산화해 버린 것을 알지 못했던 그들의 마음은 참담하기만 했다.
“그만해.”
소청이 어수선하기만 한 별동대의 분위기를 다잡았다.
“하지만 신승 어른의 시신이…….”
악이군의 말에 소청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죽은 것이 비단 신승 어른뿐이겠나. 백인회도 있고 북천맹의 무인들도 있다.”
“…….”
“잊지 마. 모두의 죽음은 동일한 거야. 친분에 따라 슬픔의 차이가 있을 뿐 신승 어른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가 더 큰 것이 아니야. 죽어 간 이들 모두가 중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
죽음에는 존귀라는 것이 없다, 는 소청의 말이 모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모두가 누군가의 아비이자 자식이며, 누군가의 형제인 거다.”
수습하자면 모두의 시신을 수습해야만 했다. 수습하지 못하면 이곳에 그들의 묘지라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소강!”
“예.”
“지금 당장 별동대와 함께 단강구의 본대로 복귀해 제갈휘문을 도와라.”
“예?”
“이미 저들이 산서성의 중앙을 지나고 있으니 더 이상의 기습은 의미가 없다. 신승께서 죽었으니 저들도 더는 끌려 나오지 않을 거야.”
옳은 말이었다.
기습으로 자신들을 끌어내 섬멸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 방어는 튼튼해져 있을 것이고 공격한다 해도 추격해 오지 않을 것이다.
“형님께선?”
“…….”
소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형님!”
“걱정 마. 난 이대로 곧장 휘와 합류한다. 지금은 기습보다 본대의 진격을 막아 내는 단강구 쪽이 훨씬 중요하다.”
잔잔했지만 그 안에 깔린 분노가 진득하게 느껴졌다.
“모두 출발해.”
그것이 끝이었다.
소청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곡의 분지만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죽음이 같다 했으나 차마 스승을 두고 갈 수 없었던 승혜는 멸절사태의 시신을 업었다.
그리고 소강은 악이군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몇 번이고 소청을 돌아보았다.
불안했다.
혁련휘와 합류하겠다 하는 그의 말이 못내 의심스러웠다. 언제나 그랬듯 혹시나 그가 홀로 적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아닐까?
소청의 강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강이었다. 그는 언제나 전투에 먼저 뛰어들고 가장 마지막에 빠져나왔다.
지키는 것이다.
언제나 말은 그리하지 않았지만 모든 싸움에서 사람들이 가장 적게 죽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다.
아무리 강한 소청이라도 혼자서는 무리였다.
아니, 만인지적이라 불리는 무황이 온다 해도 혼자서는 무리였다.
하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따라가면 짐이 되리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별동대의 무인들을 지키기 위해 마음껏 날뛰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따라가겠다 할 수가 없었다.
으드득…….
소강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더 강해져야만 했다.
그것이 형에게 더는 짐이 되지 않는 방법이었다.
자신을 보호하려고만 하는 것은 소청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였다.
아직 약하기 때문에…….
소청은 소강과 별동대원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검곡의 분지만을 바라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신승…… 북해의 놈들을 죽인 다음에 술을 가져오겠습니다. 불자이시기는 하지만 중원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술을 넉넉히 가져오지요. 함께 죽어 간 이들을 위로하기 충분하도록…….’
소청은 마음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 * *
“보고입니다!”
전령이 뛰어들자 언덕 위에 천막을 치고 적을 기다리고 있던 태존을 비롯한 정사 연맹의 수장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적의 선두가 삼문협을 돌파했습니다!”
“아니 벌써?”
산서성의 마지막 관문이 삼문협이었다.
하곡을 지난 지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어찌…….
“공격해 온 적의 수는 삼천! 삼문협을 지키던 제일 진이 무너져 천여 명이 죽었고 이백 명이 다쳤습니다. 적의 선두는 계속해서 남하하고 있습니다.”
‘망할…….’
놈들이 속도를 올렸다.
좌우를 기습당하면서도 본진을 더욱 빠르게 남하시키고 있었다.
“적은? 적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정확하게 추산하기는 어려우나 일천 이하의 피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령의 보고에 장내에 침통함이 어렸다.
단강구에도 많은 함정과 진법을 설치해 두고 있었지만, 삼문협에도 그 못지않은 함정을 설치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일천도 되지 못하는 수를 죽였다니…….
적어도 이삼천은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행히 소청과 별동대에 의한 기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진소청과 별동대, 북천맹의 무인이 가담해 적의 한 축인 설화궁을 섬멸했다.
또한 적의 우측 선단인 한음곡(寒陰谷)을 공격한 혁련휘는 계속해서 적의 수를 줄이며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하곡에서 적의 우측 천빙궁을 공격했던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적 일천을 죽였으나 그 과정에서 신승가 죽고 멸절사태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피해가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중원 무림의 거두인 신승의 죽음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적의 속도가 줄지 않았다.
기습 전략의 목적은 적의 수를 줄임과 동시에 진격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했다.
충격을 삭여 내고 서둘러 적에 대해 방비를 해야만 했다.
“소란 떨 것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피해는 예상했던 일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곧 닥쳐올 적에 대비해 방어를 단단히 하는 것입니다.”
좌중을 안정시킨 제갈휘문이 중앙의 지도를 향해 눈을 돌렸다.
“적이 근접해 온 이상 머뭇거릴 틈이 없습니다. 모두 계획된 곳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알겠네.”
단강구(丹江口).
북해의 진격을 기다리는 동안 제갈휘문은 그곳에 서른여섯 곳에 함정을 만들고 다섯 개의 절진을 설치했다.
제갈세가의 모든 학사들이 발 벗고 나섰고 중원 무림과 연을 맺고 있는 일만여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절대로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적이 함정에 빠질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합니다. 첫 번째 공격은 모자겸 대족장께서 맡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전선에 북천대공이 끼어들면 정면 승부를 벌이지 말고 곧바로 강을 내어 주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북천대공의 강함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곡의 검단에서 물러난 백인회의 생존자들이 이미 증언한 사실이었다.
신승이 죽음을 결심하고 싸워야 했을 만큼 강력한 무인…….
“뒤의 싸움은 장강 연맹이 맡게 될 것입니다. 강을 건너는 사이 적들의 수를 최대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제갈휘문이 단강구의 중심을 짚었다.
세 갈래 물길이 만나 거대한 호수를 이룬 단강구.
적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무한의 정사 무림 연맹이었다.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를 관통했으니 반드시 적은 강을 건너야만 했다.
중원 무림에서 사도련 예하의 장강 연합만큼 수공에 능한 자는 없었다.
이미 장강 연합의 고수들이 단강구의 물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적이 도하하는 순간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강을 넘어온 적을 막기 위해 태존이 무인들을 이끌고 대기할 것이다.
그곳이 중원의 명운을 건 대규모 전투의 시작이 될 곳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진소청과 혁련휘가 끼어든다면…….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군사님!”
천막의 밖을 지키고 있던 무인이 급히 뛰어들어 왔다.
“진가의 이 공자와 별동대의 무인들이 도착했습니다.”
“오!”
좌중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어서 나가 보세!”
태존을 따라 수뇌들이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갔다.
“태존 어른과 군사, 원로들을 뵙습니다.”
소강이 별동대를 대표해 인사를 전했다.
“어서 오게. 먼 길에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하지만 승전을 한 자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제갈휘문은 금세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승혜가 내려놓는 여승의 시신.
“며, 멸절…….”
“신승 어른의 시신은 찾지 못했습니다.”
“음…….”
모두의 얼굴에 참담함이 어렸다.
“진 공자는 어디에 있는가?”
“형님께서는 따로 떨어졌습니다. 적의 좌측을 공격하는 혁련 소련주에게 합류한다 했습니다.”
제갈휘문의 말에 소강이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제갈휘문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혁련휘와 합류한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본진이 코앞까지 다가온 시점에서 혁련휘와의 합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그리되면 좀 더 많은 적을 죽일 수야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본대와 합류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다.
‘설마……?’
제갈휘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진소청은 필시 북천대공을 찾아갈 것이다. 홀로 적진의 후미를 공격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소강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고수가 부족한 시점에서 소강과 별동대의 힘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걸 알기에 진소청도 그들을 본대로 보낸 것이리라.
“알겠네. 자네들의 승전을 축하하고 싶지만, 상황이 시급하여 그러지 못함을 용서해 주게.”
“아닙니다.”
소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와 별동대는 태존 어른과 합류해 주게. 저들이 강을 건너면 대열에 넓게 퍼져서 전투를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제갈휘문의 말에 수뇌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미리 배정된 자신의 위치로 출발했다.
* * *
“크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발을 디딘 선발대는 거친 폭음과 함께 산화했다.
그들의 진격로상에 묻혀 있던 폭약이 터져 수백 명의 무인들이 갈가리 찢어졌다.
비단 폭약뿐만이 아니었다.
무턱대고 뛰어들어 진법에 갇혀 버린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얕은 협곡에서도 돌 더미가 쏟아졌다.
“궁주님! 전방에 함정입니다. 적이 폭약을 묻어 놓고 거대한 구덩이를 파 두었습니다.”
“진법에 갇힌 무인들은 적의 습격을 받아 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화공입니다. 적들이 숲에 기름을 부어 놓았습니다.”
사방에서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가 쏟아져 들어오자 미여령의 얼굴이 계속해서 일그러졌다.
“재미있는 짓을 해 놓았군. 아주 재미있어.”
백효의 말에 미여령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는 어째서 본진의 선두가 적의 손에 놀아나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