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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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17화
216화. 신승, 산화하다
“호오? 제법 기세가 달라졌군. 죽음이라도 각오한 것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신승의 모습에 백효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기세라니. 달라진 것이 없지 않나? 내심 재미있는 싸움을 기대하고 온 것인데…….”
실망스러움이 묻어나는 백효의 말에 신승이 고요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큰 차이가 있었던가?
자신이 믿어 온 소림의 무공이 이토록 나약한 것이었던가?
“결국, 이 중원에 우리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무황뿐이었군.”
나른함을 머금은 백효의 잔인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천천히 들려 올라갔다.
죽음…….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불문에 몸담은 이후로 많은 은혜를 입어 신승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가졌다.
단지 지금 두려운 것은 침략자들의 수장에게 어떠한 상처도 입히지 못한 것이었다.
막으리라.
그를 막지 못해 수많은 생명이 안타깝게 죽지 않도록…….
‘허허, 내 아직도 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게지.’
불문의 귀의(歸依)하며 속명을 버렸고 어느 순간 죽음이라는 소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었지 않은가?
‘헛헛,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니 죽을 자리가 들판이면 어떠하고 똥통이면 어떠하랴. 아까울 것이 없도다.’
우우웅!
신승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순간 범종(梵鍾)의 울림처럼 은은한 떨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신승!”
멸절사태가 부릅뜬 눈으로 경악성을 토했다. 신승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
육신을 태워 내려는 것이다.
불꽃이 생의 마지막 순간 가장 빛나는 것처럼 신승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백효를 막을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걸었으니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마지막 가는 길에 온전한 육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신승은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고 있었다.
“아…….”
멸절사태가 장탄식을 흘렸다.
어째서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없단 말인가?
어찌해야 하는가?
그저 구함을 받고 돌아가야만 하는가?
멸절사태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백인회의 무인들과 북천맹의 무인들…….
지독스러운 상처를 입고 지친 숨을 내쉬는 그들…….
지켜야 했다.
그들을 데리고 물러나야만 했다.
어떻게든 그가 살린 목숨들을 데리고 돌아가야만 했다.
멸절사태가 다시금 힘을 내었다.
“모두 이곳에서 벗어나 절벽을 올라라! 이곳에서 물러난다!”
“사태…….”
무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신승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음이었다.
함께 싸워야지 어찌 물러난단 말인가?
“이놈들! 고귀한 희생을 더럽힐 참이냐!”
그녀의 외침에 무인들이 다급히 움직여 절벽 면을 향해 물러났다.
하지만 멸절사태는 모두가 도주하는 와중에도 절벽에 몸을 싣지 않았다.
지켜보는 것.
신승이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걸었듯이 그녀 또한 그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봐 주어야만 했다.
홀로 가는 길이 쓸쓸하고 외롭지 않도록…….
그것이 도리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효가 들어 올렸던 손을 멈추었다.
어느 순간 신승의 몸을 물들인 금빛이 거대한 후광처럼 번져 나갔다.
죽음을 각오한 신승이 일으킨 금강선공(金剛仙功).
그의 삶이 가졌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일어났다.
원정지기와 합해진 그의 남은 생명이 모조리 모여 금빛 서기로 변했다.
나른하기만 했던 백효의 얼굴에 긴장감이 생겼다. 그리고 긴장감은 곧장 희열로 바뀌었다.
적이 도주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흥미를 주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 보이는 것은 오직 신승뿐이었다.
“흐흐흐, 좋아.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훌쩍 뛰어 물러나 금빛 서기의 영역에서 벗어났던 백효의 몸에서 새하얀 강기가 피어올랐다.
쿠우우우…….
허연 서리와 함께 뿜어진 그의 힘에 지축이 뒤흔들리고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역천대공 구자겸이 가졌던 마라강기와 쌍벽을 이루는 마천의 또 하나의 절기.
옥령강기(玉靈罡氣)라 불리는 절학이 백효의 손을 통해 펼쳐지기 시작했다.
지면에 내디딘 발에서 시작된 새하얀 기운이 그의 전신을 휩싸고 회오리치며 솟구쳤다.
쩌저적!
그가 뿜어낸 한기에 지면이 동토의 그것처럼 새하얗게 얼어 가기 시작했다.
한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바람은 칼이 되어 사방을 헤쳐 놓았다.
쿠우우웅!
한기와 금빛 서기가 서로의 영역을 놓고 다투는 짐승처럼 부딪치며 거친 파공음을 만들어 내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백효는 옥령강기에 밀리지 않는 신승의 힘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전력을 다해 부딪쳐 오는 신승의 힘이 온몸을 짜릿하게 울려 왔다.
온몸의 털들이 곤두설 정도의 희열이 뇌리까지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부숴 주마, 신승!”
백효의 미소가 잔인함을 머금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백효의 양손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점점 투명하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일그러짐이 만들어졌다.
얼음 조각 같기도 하고 투명한 공간의 비틀림 같기도 한 그것은 삽시간에 분열을 일으켜 수천으로 늘어났다.
구자겸의 마라강기는 뚫리지 않는 거대한 방패와도 같은 힘이었다.
하지만 백효가 가진 옥령강기는 모든 것을 꿰뚫는 칼이자 북해의 한기를 가득히 머금은 예리한 바람이었다.
수천의 투명한 칼날이 하늘을 가득 채웠을 때.
“쏟아져라!”
백효의 양손이 내려졌다.
그와 동시에 수천 개의 칼날이 한여름 날의 폭우처럼 쏟아져 내려 신승이 만들어 낸 금빛 서기에 틀어박혔다.
콰과곽!
마천이 가진 최강의 공격술이라 불리는 옥령강기의 힘이었으나 금빛 서기를 뚫지는 못했다.
금이 가고 조각난 서기의 파편이 튀어 올랐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백효의 옥령강기가 만든 칼날이 수도 없이 박혀 들었음에도 점점 더 한기를 밀어내며 범위를 넓혀 오고 있었다.
으적, 으저적!
한기가 만들어 낸 지면의 얼음들이 부서져 나갔다.
전투가 만들어 낸 수많은 시신이 금빛 서기에 닿아 소멸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힘이 밀려남에도 백효는 더욱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합!”
백효의 몸에서 일어난 힘이 배가되었다. 휘몰아치는 한기는 눈보라로 변했다.
그리고 금빛 서기의 기운에 박혀 있던 옥령강기의 칼날이 쐐기처럼 파고들며 금빛 서기를 부수기 시작했다.
콰드득! 콰드드득!
찬란한 서기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파삭!
금빛 서기는 가루처럼 부서졌고 옥령강기의 칼날이 신승을 향해 쏟아졌다.
콰앙! 쾅! 콰아아앙!
쏟아진 칼날의 비는 엄청난 폭음을 만들어 내며 분지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을 때, 그 어느 곳에서도 신승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부서져 가루가 된 금빛 서기와 함께 흩날려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신승!”
멸절사태는 결국 백효의 힘을 막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 신승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정천의 기둥으로 존재해 왔던 그는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흔한 유품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으흐흑…….”
멸절사태는 두 팔을 땅에 대고 목 놓아 울었다.
목구멍 안쪽이 찢어져 피가 토해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힘을 거두어 버린 백효는 예의 나른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덤덤함이 느껴지는 차가움으로 금빛 서기의 조각들이 뿌려진 대지를 밟고 있었다.
“이노옴!”
분노가 차올랐다.
지금 그녀에게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참지 못한 분노에 이끌려 나아갈 뿐이었다.
멸절사태는 땅바닥에 떨어진 검을 잡아 들고 백효를 향해 달렸다.
그를 향해 온 힘을 다해 검격을 날렸다.
까아앙!
하지만 무모한 일격일 뿐이었다.
그녀의 검은 백효의 곁을 지키고 있던 백의 무인들에게 막혀 버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날아온 검이 그녀의 몸을 자르고 꿰뚫었다.
“크윽…….”
온몸에 힘이 빠져 꿇어앉은 그녀를 백효가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네깟 년 정도로는 나의 유흥거리가 되지 못한다.”
백효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버렸다.
그는 도망치고 있는 북천맹의 무인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에게 날파리 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저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들어왔던 입구를 통해 유유히 사라졌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시신들과 핏물이 가득 찬 분지 안으로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불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힘없이 꿇어앉은 멸절사태만이 남아 있었다.
* * *
“뭐?”
제갈휘문으로부터 날아온 전서구에 북해의 뒤를 쫓아 남하하고 있던 소청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소청이 부릅뜬 눈으로 은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신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소청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왔다.
신승의 죽음.
믿을 수가 없었다.
비록 전생의 마천 정벌 당시에 죽었던 인물이긴 했으나…….
어째서?
어째서 그가 죽었단 말인가?
소청은 거칠어진 호흡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설영궁과의 싸움 이후로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곧 그들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설영궁과의 싸움을 마치고 이동하던 그때 이러한 전갈이 날아온단 말인가?
신승은 북해의 좌측을 유인했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북천대공이 그곳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망할…….”
소청이 얼굴을 구기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의 몸 안에 여전히 대환단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저 인연이라 생각하게. 나는 자네에게서 정천의 미래를 보았고, 내가 가진 물건이 정천을 지킬 것이라고 믿네.
대환단을 내어 주며 자신을 향해 온화하게 웃어 주던 신승의 미소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던 그에게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는 것에 대한 기분을 깨닫게 해 주었던 그였다.
‘지킨다’라는 것에 대한 감정을 일깨워 준 그였다.
‘아…….’
소청의 얼굴에 탄식이 어렸다.
충격을 받은 것은 소청뿐이 아니었다.
별동대의 무인들도 쉽사리 신승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백인회는…… 백인회는 어찌 되었습니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승혜가 다급하게 물었다.
백인회에 소속된 자신의 스승 멸절사태에 대한 내용이 궁금했으리라.
신승이 죽었다면 백인회도 무사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은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그 내용까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아…….”
승혜가 허망함이 가득한 얼굴로 비틀거리자 방효곤과 함께 뒤늦게 합류했던 소강이 그녀를 부축했다.
“제길…….”
소청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쟁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죽음.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산다.
그것이 전쟁이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는 사실이었고 신승에게도 그러했던 것뿐이다.
그저 남보다 먼저 그리되었을 뿐이었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분노는 계획을 그르칠 수 있었다.
아직도 수많은 적이 중원을 노리고 그 중심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종과 마궁의 무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들을 막지 못하면 더 많은 죽음이 이어질 것이다.
‘북천대공…… 백효…….’
소청은 그 이름을 곱씹고 곱씹었다. 차갑게 분노하고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곧 검곡이다. 일단 현장을 확인한다.”
신승이 산화했다는 검곡은 하곡에서 남으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신이라도 수습해 주리라.
소청과 별동대는 검곡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