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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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20화
운호는 오 년이 지난 지금, 처녀들의 방심을 설레게 할 만큼 훤칠한 미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의 나이 스물넷.
떡 벌어진 어깨 위로 탄탄하게 흘러내린 몸통은 바위를 연상시켰고, 그 아래로 뻗어 내린 다리는 거목처럼 굳건했다.
좌정한 그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 방금 목욕을 마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는데 구릿빛 피부의 단단함과 어울리지 않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룡무상심법을 운용하면서 벌어진 현상.
심법을 운용할 때마다 그는 참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벌써 팔 년째 찾아온 고통이고, 그 고통은 세월이 지날수록 심해져 이제는 일주천을 하고 나면 목욕을 한 것처럼 전신이 젖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시가 되면 어김없이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천룡무상심법을 연마했다.
천룡무상심법이 주천화부에서 멈추고 더 이상 진전되지 않을 거라던 청문 사숙의 말씀은 틀렸다.
운호는 돌아가신 사부님을 믿었기에 죽음을 담보하면서까지 만져주신 혈들로 진기를 끌어 올리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천화부 단계에서 움직이지 않던 진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운문으로 들어선 지 일 년이 지난 후부터였다.
그때부터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도 같이 생겨났다.
심법을 운용하면 전신을 먹먹하게 만드는 통증으로 인해 온몸이 흔들렸고, 일주천이 끝나고 나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탈진 상태에 빠져 버렸다.
더욱 괴로운 것은 무공을 익힐 때였다.
심법 수련 때뿐만 아니라 유운검법을 익히면서 자신도 모르게 진기가 운용될 때 역시 극심한 고통이 따랐다.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기에 검법을 수련하면서 진기의 움직임을 최대한 제어해야 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고통이 검의 진로를 방해해 초식의 정교함과 유연함마저 흔들리게 만들었다. 운호는 진기를 제어하느라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오래전 유운검법을 수련하면서 청문 사숙과의 비무를 통한 난타로 전신에 상처가 가득했을 때도 몸에서 생긴 고통보다 오히려 내력의 움직임에 더욱 큰 고통을 받았다.
그 사실을 청문자가 몰랐던 것은 그만큼 운호가 내색하지 않았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비무를 통해 전신에 수많은 타격이 작렬했기 때문이다.
사형제들이 분광을 넘어 회풍의 경지에 진입한 지금, 자신이 그들과 떨어져 있는 이유 또한 고통으로 인해 내공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분광과 회풍은 내공이 바탕이 되어야 발현되기 때문에 청문자는 아예 그를 배제한 채 풍운대에 온 정성을 쏟고 있었다.
청문 사숙이나 사형들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자신을 본다는 걸 알면서도 운호는 그들이 걱정할까 봐 자신에게 내공이 있음을 알리지 못했다.
사실 없는 것과 같은 내공이기에 더욱 말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풍운대를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같이 수련했고, 같이 먹고 마셨다.
날이 갈수록 사형제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가 오색찬란하게 변하는 걸 확인하면서 가슴 깊은 절망감을 맛봤다. 하지만 청문자가 분광과 회풍을 강론할 때 반드시 참석해 경청했고 사형들의 수련을 참관하며 검초의 변화를 배우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내공을 쓰지 못하는 자신의 검은 오직 바람 소리뿐 한 가닥 빛줄기조차 보이지 못했으나 운호는 청문자가 사형들을 질책할 때마다 반드시 같이 꾸중을 들으며 잘못된 검로의 원인과 교정, 검리의 이해에 대해서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종합해 홀로 떨어져 밤새도록 사일검을 수련했다.
지독하던 어린 시절의 운호는 커서도 변하지 않았고, 그의 노력은 무서울 만큼 끈질겼다.
그리던 어느 날,
한 번도 운호를 찾지 않던 청문자는 우연히 운호의 수련을 확인한 후 억눌린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운호의 검이 꼭 그 짝이었다.
사문의 절대비기 분광과 회풍이 운호가 마련한 작은 공간에서 흥겹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천룡무상심법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청문자이다.
역대 얼마나 많은 점창의 무인이 파천검을 꿈꾸며 천룡무상심법에 목숨을 걸었던가.
그중 주천화부를 벗어난 무인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만큼 극히 난해하고 익히기 어려운 심법이 바로 천룡무상심법이었다.
양광이현(陽光二現)에 도달해 쌓은 내공이 현천진기에도 못 미쳐 천룡무상심법을 익힌 선조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후회했다.
무림의 역사에서 점창의 명예를 찬연하게 빛낸 만천자의 무공이 천룡무상심법이었고, 그것으로 태양을 베는 파천검을 세상에 선보여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으니 천하제일신공이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점창 무인들이 접근하지 못한 것은 그 심법의 무리가 너무 심오했기 때문이다. 만천자가 해설서도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숨을 거둔 것도 컸다.
만약 만천자가 살아서 심법을 후예들에게 전수했다면 점창의 주력 심법은 현천진기가 아니라 천룡무상심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려움 속에서 피어난 꽃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고통과 절망은 화려한 비상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청문자는 운호의 비상을 기다렸다.
심법을 전수한 청곡자의 천재적인 두뇌와 운호의 하고자 하는 불같은 의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봐온 운호의 의지와 처절한 집념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사일검의 태산과 창천을 익히는 과정은 점창 역사상 당연 발군이었다.
완벽하게 운호의 몸에 장착된 유운검법의 검리가 태산과 창천을 경이적인 속도로 검에 쓸어 담는 걸 보면서 얼마나 감탄했던가.
그랬기에 더욱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유운검법을 익힐 때도, 사일에 들어와 태산과 창천을 익힐 때도 운호의 검에는 한 올의 내공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결국 나타나지 않는 운호의 내공을 보며 분함과 분노로 온 밤을 하얗게 새웠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다.
운호의 검을 보고 있노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 벌써 일 년 넘게 그의 수련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다.
분광과 회풍을 펼치는 운호의 검은 하늘에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놓고 있었다.
내공이 실리지 않았을 뿐, 운호의 사일검은 풍운대 누구의 것보다 정교하고 깨달음이 깊었으며 강력했다.
차라리 눈을 가리고 보지 말 것을.
뒤돌아서 걸어가는 그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새삼 천룡무상심법을 운호에게 심어주고 떠난 청곡자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현천진기(玄天眞氣)를 가르쳤더라면 운호는 자신의 대를 이어 점창을 책임질 무인이 되었을 것이다.
천주혈에서 돌아오던 진기가 풍부혈까지 올라간 것은 불과 일 년 전의 일이다.
점차 거세지던 진기가 어느 날 갑자기 폭주하더니 천주혈을 뚫고 옥침혈을 침범했다.
거의 세 치가량 몸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은 후 이전과는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진기가 움직이는 혈들을 중심으로 아팠는데, 옥침혈을 뚫고 진기가 올라간 후부터는 전신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의 고통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너무 큰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심법 운용을 멈추려 했으나 의지와는 다르게 진기가 폭포처럼 전신 혈도를 누벼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말로만 듣던 주화입마.
사부님도 무리한 운기를 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져들었다고 했던가.
점창에 들어와 무예를 배웠고, 수많은 서책을 접하면서 주화입마가 무엇인지 알았다.
무인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흉물.
주화입마에 빠진 무인은 남은 인생을 불행 속에 살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고통 속에서도 진기의 흐름을 멈추면 정말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운호는 죽을힘을 다해 일주천을 끝내고 진기를 단전으로 몰아넣었다.
어릴 때부터 갖가지 고통을 당해봤지만 전신을 지옥 불속에 빠뜨린 것과 같은 고통은 진정 처음이었다.
인내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이라며 참고 또 참아온 세월이었으나 이번 고통은 그 도를 넘어 결국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세 시진이 지난 후였다.
황계에 들어와 처음으로 청문자의 검론 강의에 빠졌고, 수련조차 쉴 수밖에 없었다.
고통의 여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운호는 수도 없이 기절하면서 천룡무상심법을 익혀 나갔다.
고통만 있을 뿐 몸을 움직이는 데는 이상이 없고 갈수록 진기가 거세졌기 때문에 하루라도 운기를 하지 않으면 통증이 심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숨이 멈춰져 있던 운호의 손에서 미세한 진동이 발생하더니 그 진폭이 점점 커지졌다.
단전에서 시작된 진기들이 천주, 진중, 하완혈을 거쳐 신당혈, 옥침혈로 돌다가 갑자기 거세지더니 풍부혈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 번 충돌할 때마다 운호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댔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고,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동안 풍부혈에서 되돌아오던 진기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풍부혈을 자극했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이가 저절로 악물려질 정도였다.
이런 상황은 옥침혈을 깰 때 경험했기에 운호는 운기를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진기를 움직여 풍부혈로 밀어 올렸다.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중요 혈들이 깨질 때마다 내공이 급속도로 증진된다는 걸 알기에 운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옥침혈이 깨진 지 일 년이 지났다.
꾸준한 내공 수련으로 인해 진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으나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변화가 필요했다.
신체를 괴롭히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마음껏 내공을 운용해서 분광과 회풍을 펼치는 꿈을 매일같이 꾸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천룡의 꿈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풍부와 뇌호, 강간혈뿐이다.
물론 생사현관이라 불리는 백회혈이 있으나 그것은 꿈의 경지로 치부되고 있으니 당장은 가능한 것부터 이뤄내야 했다.
풍부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오 일 전부터였다.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이제는 끝장을 보겠다는 듯 진기가 풍부를 때리고 있었다.
중요 혈의 파쇄는 기회가 자주 오지 않는다. 내공이 강해지고 신체의 상태가 진기의 흐름과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을 때 불현듯 다가오는데,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랬기에 운호는 전력을 다해 내공을 운용하며 풍부혈을 자극하며 버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꽝!
마치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이 울리며 풍부혈을 깨뜨린 진기가 뇌호혈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풍부가 강이라면 뇌호는 끝없이 펼쳐진 대해였다.
도도한 흐름.
품는 것이 다르고 담아내는 양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뇌호를 휘돌며 훨씬 강력해진 진기가 광활한 대지를 휩쓸고 소용돌이치다 미친 파도처럼 거침없이 그의 혈을 타고 전신을 누볐다.
하늘에서 솟아난 듯 도도하고 오만하게 전신을 휩쓸던 진기는 끔찍한 고통을 동반했는데 온몸의 힘줄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무의식 속에서도 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풍부를 깨뜨리면 고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바람은 또다시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점입가경이라더니 운호가 꼭 그 짝이었다.
내공이 증진될수록 고통은 종류를 달리하며 그의 신체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갈수록 깊고 지독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