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1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1화
처음으로 검을 들었으니 아무리 간단한 동작이라 해도 쉽게 되지 않았다. 운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똑같은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러나 그의 검에는 청문 사숙이 보여준 절도와 여유, 그리고 힘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휴우…….”
단 한 가지 동작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 운호는 한숨을 깊이 내뱉고 바위를 향해 다가가 벌러덩 누워 버렸다.
달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달리는 것은 체력적으로 힘이 들 뿐, 죽기를 각오하고 뛰면 거리가 줄어들었고 끝내는 목적지에 당도했다. 하지만 청문 사숙이 보여준 일곱 가지 동작은 수없이 휘둘렀음에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만큼 어려웠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난해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자신의 동작에서 잘못된 뭔가를 알 수만 있다면 이 고민은 금방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문에는 또다시 자신만 덩그러니 남겨졌을 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호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강한 끈기를 지녔다는 것이다.
불가능에 도전해서 당당히 성공한 그의 의지는 이미 점창에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 운호가 단 반나절의 실패로 낙담하거나 좌절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독종 운호.
목검이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그는 석양이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까지 손에 든 목검을 미친놈처럼 휘두르며 운문의 바위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청문자의 말처럼 저녁에 슬그머니 나타난 운학은 아직 저녁상을 치우지 못한 운호를 확인하고 반가운 웃음을 먼저 터뜨렸다.
“어이, 꼬마 사제. 저녁이 늦었구나.”
“사형,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네 소식은 들었다. 아주 점창을 들었다 놨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점창에 미친놈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넌 못 들었느냐?”
“저는 못 들었습니다.”
“그 미친놈은 삼 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혈류동에서 용호각까지 뛰었다고 하더라. 어떠냐. 정말 미친놈 아니겠느냐?”
“사형!”
“우리 꼬마 사제가 이제 소리까지 지르는구먼. 껄껄껄!”
이제야 장난이란 걸 눈치챈 운호가 얼굴을 붉히자 운학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진정으로 즐거움이 잔득 담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쉬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운호를 바라보는 시선.
웃음 속에서도 그 시선에는 대견함과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운호야!”
“말씀하세요.”
“정말 그동안 잘해주었다. 나는 네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사형이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체력 훈련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너는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그렇지 않아요. 사형의 한마디, 한마디가 저에게 큰 힘이 된 걸요.”
“껄껄껄,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니 내 어깨가 으쓱해지는구나.”
과장된 행동.
운학은 오랜만에 만난 운호로 인해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다. 몸짓조차 즐거움과 겹쳐져 과장되게 나왔다.
그런 그가 슬그머니 웃음을 멈춘 것은 운호가 천자문을 꺼내 들며 자신을 쳐다봤을 때다.
“아직 글을 못 읽는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기회가 없었겠지. 너도 들었겠지만 청문 사숙께서는 나에게 석 달 동안 너를 가르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학문을 익히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읽고 쓰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될 게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형.”
“왜 그러느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뭐냐?”
탁자를 끌어당겨 책을 펴던 운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책을 옆으로 치워 버리자 운학이 놀란 얼굴을 만들었다.
운호의 성정은 맑고 평온해 이렇게 불현듯 의외의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학의 반문에 운호는 청문 사숙의 지시로 유운검법을 수련한 일을 말하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척검과 격검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얼마나 급했는지 목검을 들고 시범까지 보일 태세였다.
운학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듣다가 운호가 목검을 들자 그의 행동을 막았다.
“운호야, 검을 내려놓고 이리 와 앉아라.”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다. 나는 너에게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구나.”
“왜죠?”
“너는 점창제일의 고수 질풍검의 검을 얻어야 되기 때문이다. 질풍검의 가르침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이제 겨우 창천을 뗀 나의 검을 받으려 하느냐. 서두르지 말거라. 사숙께서는 다음에 오실 때 너에게 커다란 배움을 남겨주실 것이다.”
운학 사형의 말이 무슨 의민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청문 사숙의 가르침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뜻임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운호는 답답함을 억누르고 글자 공부에 전념했다.
글을 익힌다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었다.
신천지를 본 것과 같은 새로움.
낮에는 검의 길을 찾느라 새카맣게 잊어버렸지만 저녁이 되면 운학이 가르쳐 주는 글자를 따라 읽으며 정신을 몰두했다.
글 속에 담겨 있는 뜻과 의미를 머리에 새길 때마다 화려한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신기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운호는 눈을 빛내며 운학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더욱 즐거워하는 사람은 운학이었다.
운호처럼 무섭게 집중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두뇌가 기가 막히도록 비상해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 셋을 그냥 익혀 버려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가르치는 즐거움이 컸다.
묻고 또 묻는다.
운호는 가르칠수록 질문이 점점 많아졌는데, 그 질문의 수준이 갈수록 높아져 운학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운학의 얼굴에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사문의 서열로 봤을 때 사형의 위치에 있지만 학문을 가르치며 그 이상의 감정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운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글을 배우면서 시간이 예전보다 배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낮에도 미쳤고 밤에도 미쳤으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목검을 세우고 앙악의 자세에서 오른쪽부터 사선으로 힘 있게 내리그으며 정악의 자세로 돌아갔다.
한 발이 앞으로 나갔고, 곧이어 전면을 향해 검을 찌르며 왼쪽으로 비켜서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쳤다.
쉬익!
처음과 비교해 보면 월등한 속도와 절제가 담긴 일 수였음에도 운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목검을 내려다봤다.
생각하던 것보다 멈춰 선 위치가 낮다.
목검을 조절하는 속도와 힘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걸 의미한다.
“휴우!”
점심을 먹고 수련을 재개한 지 세 시진째 달했으니 흘러내린 땀으로 온몸이 범벅된 상태였다.
목검을 내리자 한숨이 따라서 흘러나왔다.
처음보다 발전된 것은 맞다.
하지만 청문 사숙이 보여준 검과는 아직도 확연한 차이가 난다.
청문 사숙은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강력한 힘이 올올히 느껴질 정도로 완벽하게 검을 통제했는데 자신은 그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함에 겨워 목검을 내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청문 사숙의 움직임은 칠 일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따라 하지 못하니 답답함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움직임을 멈추자 흘러내리던 땀이 점점 많아져 물줄기처럼 온몸을 적셨다.
젖은 옷이 신체를 자극해서 답답함을 더했다.
목검을 땅에 세우고 손을 움직여 윗옷을 벗자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불과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운호의 상체는 작은 근육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여기저기 난 상처와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로 인해 더욱 강해 보였다.
운호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고민하며 주저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는 검을 붙잡고 다시 공터로 나섰다.
목검을 치켜든 운호가 청문 사숙이 보여준 일곱 가지 동작을 연속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연환으로 움직이자 목검에서 파공성이 흘러나왔고, 그동안 나름대로 만들어낸 보법과 어울리며 목검이 공간을 장악했다.
그런 동작을 운호는 무려 반 시진 동안 쉬지 않고 계속해서 시전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검은 점점 빨라져 눈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멈춰라!”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
몰두된 정신으로 허공을 향해 목검을 날리던 운호가 미처 신형을 정지시키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어느새 나타난 청문자의 표정은 너무나 차가워 마주 바라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멍청한 놈! 그것이 무엇이냐?”
“사숙께서 보여주신 자세를 따라서…….”
“내가 언제 그리했단 말이냐?”
“…….”
“쯧쯧, 기지도 못하는 놈이 날기부터 하려고 하다니 진정 가소롭구나.”
청문자가 바위에서 내려와 운호가 수련하던 공간으로 다가왔다.
그는 질책 어린 시선을 던지며 다가왔는데, 매우 강렬해서 운호는 고개를 수그린 채 들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런 말 없이 운호를 노려보던 청문자가 목검을 건네받은 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팔과 다리의 동작 하나하나가 따로 봐도 될 정도였다.
“검에는 일곱 가지 원칙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요! 잡아 찢는다는 것이다.”
청문자의 목검이 묘한 궤적을 그리다 정악의 자세에서 횡격을 시전한 후 반대로 돌아왔다.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의 완벽한 균형.
검이 좌에서 우로 왕복했는데 마치 하나의 선에서 움직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청문자의 움직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도 계속되었다.
검의 일곱 가지 근본 자세에 대한 강론, 이른바 파검칠식.
요, 자, 소, 대, 벽, 추, 절.
잡아 찢고, 찌르고, 버티고, 후려치고, 뽑고, 벤다.
청문자는 파검칠식을 보여준 후 모든 동작을 멈추고 차가운 표정으로 운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절도와 힘의 균형, 그리고 조화가 완벽하다고 느꼈습니다.”
“왜 그리 느꼈느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네가 멍청하다는 것이다. 다시 묻겠다. 완벽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되느냐?”
“몸이 조화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 그렇다면 너는 그리했느냐?”
“…….”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바람에 흩날리는 허수아비와 다를 바가 없다. 그처럼 멍청한 짓이 없다는 뜻이다.”
“죄송합니다.”
청문자의 질책에 운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유운검법을 시범 보여주면서 공간을 찢어내던 청문자의 마지막 검은 진정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운호는 자신도 그리 되고 싶은 마음에 되지도 않는 과욕을 부렸다.
사숙의 말씀처럼 기지도 못하는 놈이 뛰기부터 하려 했으니 진정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청문자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목검을 운호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어느새 그의 음성은 처음과 다르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말의 속도도 느리게 변해 있었다.
“검의 근본은 너에게 보여준 것처럼 일곱 가지 자세뿐이다. 그 일곱 가지의 자세가 변화되고 조화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검법이다. 천년거목의 뿌리처럼 튼튼하고 완벽한 자세를 지니지 못한 자는 절대 고수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그러면 어찌해야 됩니까?”
“검의 움직임이 너무 느려 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움직여라. 다리의 균형과 몸의 조화가 하나가 되도록 했을 때 완벽한 자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칠 일 후에 다시 볼 테니 수련에 매진토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