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45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45화
간양은 당문의 본가가 있는 곳이다.
청문자의 간양행은 당문주인 당청을 만나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당추가 함께 이동한다는 것은 그 역시 청문자의 당문 방문을 인정했다는 걸 알려준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가 뭘까?
당문은 용화 싸움만 놓고 봤을 때 거의 일방적으로 점창에 얻어터진 상태이다.
죽은 자만 해도 서른에 육박했고 다친 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그중 반은 자신의 지시를 받은 구룡단이 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점창이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당문에서는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문자가 간양으로 갔다는 건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비각주, 애들은 붙였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근접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따라만 갈 뿐이지요.”
“그렇겠지. 그 정도만 해도 돼. 소요 기간은?”
“아마 내일 정도면 간양에 도착할 겁니다. 당문주를 만나는 걸 감안하면 빨라도 삼 일 후에야 청문자는 용화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청명자와 청무자는?”
“그자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는 내일 그자들을 친다.”
“내일 말입니까?”
“당문을 끌어들이는 작전은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다. 그렇다면 청문자가 없을 때 놈들을 잡는 게 맞지 않겠어?”
“당연한 말씀입니다.”
“지금 내가 문주님을 만나서 승낙을 받겠다. 전투부대의 수장들에게 미리 전서를 띄워놓도록. 작전은 실패했을지 모르나 기회를 만들었다. 이 기회에 각개격파로 놈들을 잡는다.”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나가봐.”
천수가 손짓을 보내며 자신 역시 겉옷을 걸쳤다.
매우 서두르는 행동이었기에 비각주는 주춤거리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총사님,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또 있어?”
“어제 의빈에서 황룡단이 당했습니다.”
“당해? 누구한테?”
“점창의 운호라는 자에게 반수 가까이 피해를 입었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한 놈한테 그 많은 숫자가 당했다고? 그게 말이 돼? 엽문은 뭐하고!”
“엽문은 놈을 추적 중이랍니다.”
“기습이었나?”
“아닙니다. 오히려 포위 공격을 하다가…….”
“어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았던 천수가 탁자를 두들기며 소리를 높였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에 감정이 복받쳐 오른 모양이다.
황룡단은 선룡단과 함께 청무자를 압박할 주공이었다.
물론 본단 소속 고수들이 지원을 나가겠지만 주공은 황룡단과 선룡단이 맡아야 했다.
그런데 그 두 축 중에 하나가 박살 났다는 보고를 받자 화를 참지 못했다.
“각주, 운호가 누군가?”
“풍현에서 북상해 온 잡니다. 삼대주의 보고에 따르면 전투부대 수뇌부의 암살을 목적으로 침투했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삼대주의 판단이 잘못된 듯합니다.”
“그 얘기 말고, 그자의 정체가 뭐냔 말이야. 점창에 그런 놈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저희 정보에도 없는 자입니다. 점창에서 비밀리에 키운 것으로 유추됩니다.”
“조현에 왔던 놈들처럼?”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자들보다 훨씬 강합니다.”
“미치겠군. 혼자 힘으로 황룡단을 상대할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각주, 지금 그자는 어디에 있나?”
“의빈 쪽으로 간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 이후는 연락이 끊겨 어디 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구룡단은?”
“망산에서 철수해서 현재 자공(自貢)에 있습니다. 의빈까지는 한 시진이면 도착이 가능합니다.”
“전면전에서 당했다면 엽문 혼자서는 어렵다. 구룡단을 투입하도록. 그리고 선룡단도 의빈으로 오라고 해.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놈부터 잡는다.”
운호는 비객들을 처리하고도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분명 감지한 기운은 넷이었는데 처리한 것은 셋이 전부다.
하나가 빈다.
눈을 감고 기운을 감지해 나갔으나 나머지 하나는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기세를 감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을 찾는다는 건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다름없는 일.
더군다나 황룡단의 추격 병력이 여기 이 들판 쪽으로 달려오고 있어 언제까지 놈만 찾고 있을 수는 없었다.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 게 이내 찜찜했으나 운호는 마지막으로 들판을 휘둘러보고는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다시 의빈으로 간다.
사형들의 마지막 행선지가 의빈이었으니 풍운대를 찾을 때까지 의빈에서 버틸 생각이다.
비록 칠절문의 추격이 껄끄러웠으나 막으며 버티면 결국 풍운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무식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이 방법이다.
비객들을 처리했으니 이전과 다르게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운호는 도시를 향해 날아갔다.
먼저 객잔에 들러 몸을 씻고 배도 채워야 한다.
저녁 시간이니 잘하면 풍운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적들의 추격은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 의빈에 있는 칠절문의 병력은 황룡단이 전부였으니 다시 포위된다 해도 충분히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신법을 멈추고 속보로 도심지로 들어간 운호는 중심가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저녁때가 되면 객잔은 이렇듯 사람들로 넘쳐난다.
운호는 중심에 서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객잔을 둘러보던 운호가 눈을 부릅뜬 것은 구석에 앉아 머리를 박은 채 소면을 먹고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난 후였다.
너무나 반가운 얼굴, 운상이 거기에 있었다.
꼬박 하루를 건너 간양에 도착한 청문자는 자신을 안내하는 당추를 따라 당문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웅장한 전각들의 행진.
마치 용맹한 병사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처럼 당문의 거대한 전각들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무려 백여 채가 넘는 전각을 통과하고 난 후에야 당추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기다리시죠. 미리 기별은 되어 있으나 제가 들어가 도착했음을 알리겠습니다.”
“그러시게.”
당추의 언사는 용화에서와는 다르게 무척 공손해져 있었다.
그렇다 해서 비굴하거나 비겁한 것은 아니었다.
당당함 속에 나타난 공경. 무인으로서의 존경이 자신도 모르게 우러나왔을 뿐이다.
당추가 안으로 들어간 사이 청문자는 뒤로 돌아 걸어온 전각들을 바라봤다.
그 전각들에는 명문으로 지내온 당가의 유구한 전통과 역사가 담겨 있었다.
건물들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정갈했고, 매끈함과 유려함 대신 고고한 모습을 지녔다.
마치 당가의 기풍처럼.
청문자는 전각들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산에 세워진 점창의 도관들이 하나씩 선명하게 나타나 그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잘 있느냐며. 나는 잘 있다고.
눈을 감고 대답했다. 나도 잘 있다고.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갈 테니 염려하지 말라며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조용했지만 수많은 말이 그와 점창의 전각과 하늘, 그리고 나무와 바위를 통해 수없이 오고 갔다.
보고 싶은 점창.
어머니의 품과 같은 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강해지자 그는 즉시 눈을 떴다. 그리고 안채 쪽으로 시선을 주어 상념에서 벗어났다.
당추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일 다경이 더 지난 후였다.
“들어가시지요. 가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서원(尙瑞院)이라 쓰인 전각은 다른 건물보다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서려 있고 건물 전체에서 은은한 기세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들이 숨어 있다. 그것도 대단한 무력을 지닌 자들이.
청문자는 오감을 자극하는 기세를 느끼면서 모른 체 당추를 따라 문으로 들어섰다.
당문의 가주가 기거하는 상서원에,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점창의 장로가 들어서고 있으니 경계가 강화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정경이 나타났다.
마당은 흑오석으로 길을 내었고, 우측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처마 밑에는 홍등이 총총히 매달려 하늘하늘 나부꼈다.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는 수화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나무가 양쪽에 서서 손님을 맞아들였다.
당문주 당청은 청문자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오.”
“강녕하셨는지요.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구려.”
당청의 인사에 청문자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마주 인사한 후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당추는 청문자를 안내만 하고 자리를 떴기에 집무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손님이 왔으니 예를 보이긴 했으나 당청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런데 이 먼 길을 무슨 일로 오셨소?”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다.
당추를 통해 미리 저간의 사정을 모두 들었음에도 이리 말을 꺼낸 것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상대는 청문자.
강호의 녹을 먹은 것으로 따진다면 그 역시 뒤지지 않는다.
“들어오면서 보니 당가타가 예전에 비해 훨씬 커졌더이다. 당문의 번영을 보니 참으로 부러운 마음이 드오.”
“별말씀을.”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당문과 점창이 수렁에서 함께 빠져나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오.”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당문인데 어찌 점창이 수렁에 빠졌다 하시오?”
“우리는 칠절문이 목표요. 그런데 당문과 싸움이 벌어졌으니 수렁에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것 아니겠소.”
“지금 점창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말을 하시는 게요?”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정이오. 검을 든 자에게 검을 겨누었으니 어찌 사단이 나지 않겠소.”
“변명을 하는구려.”
“점창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아마 문주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오. 하나 부득이한 상황으로 사상자가 생긴 것 또한 사실이니 그에 대한 책임은 지겠소.”
“어떻게 말이오?”
“점창은 가진 게 별로 없는 문파요. 하지만 칠절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능력이 있소. 외원당주에게도 말했지만 싸움이 끝나면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운남으로 돌아가겠소. 그것이 우리가 당문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렇소.”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렇다면 왜 나온 거요?”
“그들이 우릴 건드렸기 때문이오.”
“정말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단 말이오?”
“점창은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소. 하나, 어떤 자들이건 점창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순간 끝장을 보오.”
청문자는 깊은 눈을 하고 끊어지듯 대답했다.
그런 청문자를 당청은 지그시 쳐다봤다.
동생인 외원당주 당추로부터 청문자가 펼쳤다는 신검합일에 대해 보고받은 것이 어젯밤이다.
믿겨지지 않은 사실이나 당추가 거짓을 보고할 리 없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밤새도록 점창과의 일을 고민하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점창에 신검합일이 나타났다면 이번 싸움은 세가의 전력을 기울여야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선뜻 결정하기 힘든 일.
아무리 명분과 명예를 중시한다 하더라도 세가의 앞마당에 피를 뿌릴지도 모르는 모험을 한다는 것은 가주의 입장에서 무조건 피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분하고 억울했다.
수십 년 동안 패면 패는 대로 똥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가거나 아예 산에 처박혀 움직이지 못하던 점창에게 당문이 당했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흐를 지경이다.
분명 점창의 제안은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대로 넘길 수는 없다.
“그러면 땅에 떨어진 당문의 명예는?”
“뭘 원하시오?”
“당문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풍운대에게 기습을 당했소. 정당한 싸움이 아니었단 말이오. 점창에 풍운대가 있다면 당문에는 칠비가 있소.”
“용화에 있던 복면인들을 말하는 모양이오.”
“그 아이들이 당문의 암천이오. 나는 당문주로서 사천을 넘겨주겠다는 점창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소. 하나 명예를 떨어뜨린 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일. 칠절문과의 싸움이 끝나는 대로 풍운대와 칠비가 자웅을 겨루어 진정한 승부를 봤으면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