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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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39화
천뢰삼십이수를 쓰러뜨린 풍운대는 전력으로 용화를 벗어나려 했지만 곧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도대체 당문은 그들을 잡기 위해 얼마만큼의 전력을 투입했단 말인가.
능선을 넘어서자 백여 명의 흑객이 진로를 차단한 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전면에는 세 명의 사내가 쌍단창을 들고 서 있었다.
흑객들의 복장은 당문의 주력 중 하나라는 흑철단(黑鐵團)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면에 선 세 사내는 흑철단을 이끄는 흑철삼극(黑鐵三極)이 분명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풍운대가 처한 상황이 꼭 그 짝이었다.
흑철삼극은 당호와는 또 다른 수준의 절정고수였다.
운곡은 검을 재차 부여잡으며 좌우에 선 사제들을 확인했다.
사제들의 눈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지만 몸은 상처로 인해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지옥으로 들어가는 길이 가까워진다.
그랬기에 운곡은 잇새로 끊듯이 말을 꺼냈다.
“운검, 길게 끌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나머지도 잘 들어라. 끝장을 보려는 싸움이 아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돌파한다. 운검, 운천은 나와 함께 흑철삼극을 막고 나머지는 곧장 놈들의 일자진 좌측을 뚫는다. 가자!”
“예, 사형.”
혈로(血路).
피로 점철된 길.
수많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며 풍운대는 다섯 개의 둔덕과 한 개의 개천을 지나 용화의 끝자락, 상운평에 도착했다.
“헉헉!”
누구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입에서 흘러나온 거친 숨소리였다.
잠시도 쉬지 못한 채 두 시진을 버텼다.
이전에 입은 상처보다 더 많은 상처가 전신에 새겨졌고, 그중 몇 개는 움직임을 힘들게 만들 정도로 컸다.
온몸에 피 칠을 한 풍운대는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하지만 추적은 끝나지 않았고, 상운평의 중간에는 칠십여 명의 적객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왼팔에 국화가 새겨진 적색 무복은 당문의 본가를 지킨다는 귀수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운곡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당문 본가를 지키기 위해 조직했다는 귀수대는 당문의 진력 중 최고의 무력을 자랑하는 부대로 알려져 있다.
“사형, 뚫습니까?”
운몽이 백여 장 뒤쪽에서 따라오는 흑철단을 힐끔 쳐다본 후 운곡의 생각을 물었다.
좌측 멀리서 보이는 적색의 신풍단도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것이다.
추적자까지 가세하면 더욱 위험해지기 때문에 즉각적인 결정이 필요했다.
“좌측으로 빠진다. 귀수대는 쌍통수전(雙筒袖箭)을 가지고 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위험해.”
쌍통수전은 당문의 십대암기 중 하나로, 손목에 착용해서 화살을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게 고안된 특수 병기였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도 막기가 힘든데, 귀수대 전체가 한꺼번에 발사한다면 이십 장을 공격 범위에 둘 수도 있었다.
운곡은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곧장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좌측으로 가면 그들이 가려 하던 초현과는 멀어지게 되지만 귀수대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풍운대가 방향을 틀자 귀수대가 기다렸다는 듯 사선으로 쫓기 시작했다.
확실히 신풍대나 흑철단과는 다른 신법의 경지를 지녔다.
귀수대는 사선으로 다가와 평행으로 달리며 풍운대가 다른 쪽으로 빠지지 못하게 압박해 왔다.
한참 달리다가 힐끔 뒤를 확인한 운몽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뭔가 이상했다.
“사형, 놈들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마치 토끼몰이를 하는 것처럼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지?”
“잘 모릅니다.”
“혹시 막다른 길?”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놈들이 주력을 이쪽에 배치시켰든가요. 하여튼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운몽의 대답에 운곡의 표정이 변했다.
확실히 귀수대의 행동은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기분 나쁜 예감.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는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좋다, 방향을 튼다.”
“어디로요?”
“다시 용화로 돌아가자.”
“예?”
“만약 놈들의 주력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용화는 비어 있을 것이다. 용화에서 망산으로 빠진다.”
“칠절문 그 새끼들은요?”
“우리가 용화를 벗어나는 걸 그놈들도 봤다. 망산에서 철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형, 아니면 빼도 박도 못합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더 버티기 힘들다.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면 우린 거기서 죽는다.”
운곡의 말에 풍운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안다.
지금까지 포위망을 뚫으면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들을 쫓는 당문의 전력은 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곡은 끝까지 당문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여지를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용화에서 죽는다는 운곡의 말은 이제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다.
당문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다면 풍운대는 옥쇄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다.
물론 전멸을 면치 못하겠지만 그리 되면 당문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풍운대는 그 정도의 무력을 지닌 절정고수들이었다.
운곡이 먼저 급하게 방향을 틀며 왔던 길로 다시 신형을 날리자 풍운대 역시 기다렸다는 듯 방향을 틀었다.
그때부터 귀수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사정거리 밖에서 쌍통수전(雙筒袖箭)을 날리는 무모함까지 보였다.
불안하던 예측이 맞았다는 걸 귀수대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청문자는 부대를 이끌고 전력을 다해 용화로 이동해 왔다.
산이 있고 강이 가로막은 지형이었으나 불과 세 시진 만에 용화에 도착했으니 얼마나 서둘렀는지 알 만했다.
용화의 드넓은 벌판은 붉은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기운, 바로 살기였다.
‘아직 살아 있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포위망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이 오랜 기간 동안 가르쳐 온 풍운대라는 사실을.
판단과 행동은 하나였다.
청문자의 신형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는데, 얼마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멈춰라!”
고함과 함께 터뜨린 일격.
산악을 베어버릴 것만 같은 청운자의 일검에 풍운대를 가로막았던 포위망이 순식간에 찢겨져 나갔다.
당문의 무인들은 청문자가 터뜨린 일 수에 포위망이 찢기자 공격을 멈추고 즉시 뒤로 물러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한 행동이었다.
지그시 당문의 무인들을 노려보던 청문자의 시선이 풍운대를 향했다.
혈인으로 변한 얼굴들이 거기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기에 저리 되었을까.
사랑하는 제자들의 온몸이 찢어져 있는 걸 본 청문자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묻어나왔다.
분노, 슬픔, 걱정.
그러나 그는 곧 감정을 지우고 냉막한 얼굴로 돌아가 풍운대의 전면에 섰다.
“어떠냐?”
“견딜 만합니다.”
운곡의 대답에 청문자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풍운대의 눈에 담긴 기쁨과 반가움을 뒤로하고 청문자는 당문 무인들을 바라봤다.
“누가 책임잔지 앞으로 나서라.”
“나요.”
사람의 벽이 갈라지며 외원당주 당추가 걸어 나왔다.
그 뒤에는 비슷한 연배의 세 노인이 따르고 있었는데, 바로 당문의 삼공이라 불리는 파혼삼절(破魂三絶)이었다.
파혼삼절은 현 가주인 당청의 사촌 동생들로서, 쇄금비(碎金匕)의 주인이기도 했다.
청문자는 여유 있게 걸어 나오는 당추와 삼공을 일별하고는 주변에 포진한 병력들을 훑었다.
대충 합해도 거의 이백에 달하는 인원이다.
핏빛처럼 붉은 무복은 귀수대의 상징이고, 뒤쪽에 흑립을 깊게 눌러쓴 자들은 당문의 특수척살대 십이마령이 분명했다.
그리고 좌측 후미에 선 자들.
얼굴에 가면을 쓴 일곱 명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십이마령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당문의 전력에 대해서는 손바닥처럼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 나타나자 청문자의 검미가 슬쩍 올라갔다.
“당추,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내셨소? 얼굴을 보니 잘 지낸 것 같기도 하고.”
“이십오 년 전에 봤으니 오랜 세월이 지났군. 그때는 혈기왕성했는데 자네도 늙었네그려.”
“옛날 얘기는 해서 뭐 할라고. 쓸데없는 소린 그만둡시다.”
청문자와 당추의 나이 차는 아홉 살이나 난다.
예전 청문자가 강호에 나왔을 때 본 당추는 무척이나 공손하게 그를 대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청문자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좋아, 묻자. 당추, 어디까지 할 생각인가?”
“점창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소.”
“쉽게 말해.”
“뭐 하러 왔소. 일 복잡하게. 그냥 내어주고 말았으면 훨씬 일이 편해졌을 텐데.”
“누굴 말인가? 저 아이들?”
“저놈들만 잡으면 우리는 물러날 생각이었소.”
“그래서?”
“결정하시오. 다 죽든지 아니면 쟤들만 놓고 물러서든지.”
“마치 우리 목숨이 너의 수중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점창이 그리 우습게 보인단 말이냐?”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거품을 무는구려. 그동안 점창이 해온 작태를 보면 충분하고도 남소. 힘이 없어 구대문파에서 밀려났고, 칠절문에게까지 수모를 당한 점창이 우습지 않다면 누가 우습겠소.”
“푸하하하!”
당추의 독설에 청문자의 입에서 심금을 울리는 깊은 검소(劍笑)가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은 너무나 날카로워 금방이라도 당추의 목을 벨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웃음을 멈춘 청문자의 입이 열린 것은 운곡을 비롯한 풍운대의 검이 부르르 떨릴 때였다.
“운곡!”
“예, 사숙.”
“여기까지 오면서 몇이나 죽였느냐?”
“세지 못했습니다.”
“왜 못 세었느냐?”
“가급적 죽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 죽은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다시 묻겠다. 마음먹었다면 얼마나 죽일 수 있었느냐?”
“목숨을 걸었다면 저들 중 반은 지옥으로 보냈을 겁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대답한 운곡이 검극을 끌어 올려 자신을 노려보는 흑철삼극을 가리켰다.
부르르 떨리는 검.
검이 울며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화려한 검기의 발현에 이은 분산이 흑철삼극을 한꺼번에 조준하며 일어선다.
운곡의 몸 전신에서 뿜어지는 살기는 검에서 발현된 검기와 함께 흑철삼극을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강한 압박이었는지 흑철삼극의 신형이 저절로 밀려나고 있다.
청문자의 왼손이 올라간 것은 흑철삼극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들의 단창을 끌어 올릴 때였다.
운곡의 검기가 풀리기를 기다린 청문자는 묵직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봐, 당추. 어떤가? 내 제자의 말이 거짓으로 들리는가?”
“아닌 것 같구려.”
어느샌가 침중한 얼굴로 변한 당추의 목소리가 굳어져 나왔다.
운곡이 보여준 검기의 파장은 보고도 믿지 못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당추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풍운대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는 한 올의 두려움도 나타나지 않았다.
강한 건 인정하지만 모두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
그랬기에 청문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칠절문을 치기 위해 나왔네. 하지만 천수의 계략에 말려 지금은 당문과 검을 겨눠야 하는 처지에 몰렸지.”
“본론을 말하시오.”
“당문이 움직인 것은 명예 때문이었으니 우리가 그 명예를 세워주겠다. 더불어 실리도 주지. 어떠냐?”
“어떻게?”
“우리는 칠절문의 영역을 갖지 않고 고스란히 당문에게 주겠다.”
“어떤 조건도 없이 말이오?”
“그렇다.”
“잠시만 참아 달라? 재미있는 말이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어차피 그냥 있어도 당문의 수중에 떨어질 거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젠 당문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서 그만두지 않는다면 점창이 당문과 끝장을 볼 테니까.”
“크크큭!”
“웃긴 모양이로군. 보여주마. 우리가 왜 산에서 내려왔는지. 너희가 생각한 것과 점창의 힘이 얼마나 다른지 눈으로 직접 보거라!”
청문자는천천히 당문의 포위망을 벗어나 검을 끌어 올렸다.
하늘로 올라간 검을 진격세로 만든 청문자의 몸이 그대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람도 사라졌고 검도 사라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시리도록 아름다운 검기의 물결뿐.
검기는 회전하고 또 회전했는데 작은 원이 큰 원 속을 노닐었고, 원과 원이 화합하고 나뉘며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빛을 뿌려댔다.
눈을 떼지 못할 아름다움이었으나 그 결과는 경악 그 자체였다.
경천동지(驚天動地).
청문자가 움직인 십여 장의 범위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본래의 형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누가 이 검을 받을 수 있을까?
절대고수의 위엄.
청문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는 수많은 당문 무인의 숨결을 완벽하게 틀어막아 숨 쉬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