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38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38화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친 운호는 또다시 천룡무상심법에 빠져들었다.
오후의 심법 운용으로 상처의 살이 붙을 걸 확인했고 통증의 강도가 훨씬 완화된 것을 느꼈기에 밤이 되자 작정하고 심법을 돌렸다.
또다시 망아의 세계로 들어선 것은 이주천이 끝나고 돌아온 진기를 전신으로 휘돌렸을 때다.
세상이 자신이었고, 자신이 세상이었다.
혈도 하나에 인간의 삶이 있었고, 내력이 흘러가는 길을 따라 세상만사가 변하며 움직였다.
시간의 흐름을 잊었고, 자신의 존재를 잊었다.
인간의 오욕마저 느끼지 못한 채 완벽한 방관자가 되어 인간과 세상을 관조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시간과 공간이 압축되고 물질이 소멸되며, 의지와 감성이 하나가 되어 의미를 상실했다. 이것이 인간의 세계인지 신의 세계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운호의 몸에서 은은한 금광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은, 단전의 내공이 대해의 도도한 흐름처럼 흘러 강간에 도달했을 때다.
무아의 경지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운호는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몸에 흐르는 내력은 가히 노도와 같이 강간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오룡봉성(五龍奉聖).
천룡무상심법을 극성으로 익히게 되면 다섯 마리의 금룡이 온몸을 감싼다고 하는데 천하제일고수 만천자는 그것을 오룡봉성이라 칭했다.
운호의 몸에서 발생한 금빛은 희미해 용의 형상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까지 없던 형상의 변화는 내력이 또 다른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운영이 들어온 것은 운호가 심법 운용을 마치고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한동안 방 안을 확인할 뿐 입을 열지 않았는데 뭔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왜 그러시오?”
“방 안에서 금빛이 흘러나온다고 해서 급히 왔는데 아무 일도 없네요?”
“금빛이라니요?”
“아영이가 차를 드리러 왔다가 놀라서 저한테 왔어요. 불이 난 것처럼 방이 환하다고.”
아영은 운호를 시중들어 주는 시녀의 이름이다.
그녀는 운호의 몸에서 흘러나온 정체 모를 빛에 놀라 당운영을 찾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몸의 변화를 모르는 운호는 장난이라 치부하고 맑게 웃었다.
“그렇다면 불에 타 죽을 뻔했다는 건데, 그것참. 내가 운이 좋은 모양이오. 위기 때마다 누군가가 구해주니 말이오. 그런데 혹시 누가 불을 껐는지 알 수 있겠소?”
“그걸 농담이라고 하세요? 아우, 추워!”
“재미없었던 모양이네.”
“당연하죠.”
“흠, 미안하오.”
고리눈을 뜨는 당운영을 향해 운호가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재치를 발휘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자 애꿎은 오른팔을 휘휘 돌리며 무안함을 감췄다.
삼 일을 꼬박 괴롭히던 상처는 오른팔을 그렇게 돌려도 약간의 뻑뻑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운호는 곧이어 왼팔도 씩씩하게 움직였다.
그걸 본 당운영이 급히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프지 않는 걸 보니 다 나은 모양이오.”
“어디 봐요.”
당운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는 운호의 허벅지를 딱 소리 나게 때린 후 즉시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상처를 확인한 그녀의 입이 떡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왜 그러오?”
“상처가 거의 아물었어요.”
“고맙소 . 다 소저 덕분이오.”
“내가 의원은 아니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수도 없이 봤어요. 소협이 입은 상처는 무조건 삼 개월은 요양해야 될 만큼 컸단 말이에요. 그런데 삼 일 만에 완쾌되었으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당문의 비전이라는 활인고의 효능과 소저의 정성 어린 간호가 합해져서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완쾌된 거 아니겠소.”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했잖아요!”
“왜 소리는 지르시오.”
“이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이리 와봐요. 자세히 봐야겠어요.”
“소저, 내가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남자의 속살을 자꾸 보려고 하니 참으로 난감하오. 다 나은 상처를 자꾸 보려는 이유가 뭐요? 혹시 날 좋아하는 거요?”
“뭐라고요?”
“어떻소. 이번 농담은 괜찮았소?”
“참나, 기가 막혀서.”
상처를 확인하려던 당운영의 손이 슬그머니 내려왔다.
슬쩍 붉어진 얼굴.
운호를 째려보는 의미 있는 눈길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가 일어났다.
농담이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자 운호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참 이상하다.
잘만 받아주던 농담인데 갑자기 신경질을 내니 어쩔 줄 몰라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먼저 입을 열어준 것은 당운영이었다.
“앞으로 공부 좀 해야겠어요. 내가 착해서 참는 거지, 다른 여자 같았으면 크게 화냈을 거라고요.”
“그 정도로 잘못한 일이오? 그렇다면 또 미안하오. 앞으로 그런 농담은 절대 안 하리다.”
“훗, 그렇게 해요.”
운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자 당운영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언제 봐도 그녀의 웃음은 봄꽃처럼 환해서 자신도 모르게 같은 웃음을 짓도록 만든다.
아마 그녀는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모양이다.
운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그녀의 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져 갈 때였다.
“소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길을 떠나려 하오.”
“내일 아침에요?”
“너무 늦어서 마음이 급하군요. 내일 일찍 떠날 테니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시오. 내 소저에게 받은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도록 하겠소.”
“사형들을 찾으러 가는 건가요?”
“그렇소.”
운호의 대답에 당운영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져 갔다.
언젠가 떠날 사람이었지만 이리 급하게 떠난다 하니 아쉬움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랬기에 괜한 심술이 일어났다.
“상처가 다 나았으니 말릴 수도 없겠네요. 내겐 그럴 자격도 없으니 소협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
“소저, 무슨 그런 말씀을…….”
“맞는 말이잖아요. 우린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그냥 상처를 치료해 준 여자에 불과한 거 아닌가요?”
“소저, 어디에 가든 소저가 나에게 보여준 정성을 잊지 못할 것이오. 진정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니 그렇게 냉정한 말은 하지 마시오.”
“그저 고마운 여자란 말이죠?”
“아니… 그것이…….”
“그럼 뭐 다른 거라도 있나요?”
“있소.”
“그게 뭐죠?”
뜻밖의 대답에 당운영의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운호가 단호하게 말을 받자 순식간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그러나 운호의 대답은 그런 기대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건 가르쳐 드릴 수 없소.”
아침 일찍 떠나는 운호의 뒷모습을 당운영은 기둥 뒤에 숨어서 지켜봤다.
어젯밤.
상처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운호에게 찾아갔던 그녀는 방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금빛을 확인하고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력의 유형화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가르친 당화걸 사조는 절대고수의 반열에 든 무인은 내공을 운용할 때 유형화한 기운이 외부로 유출된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내력의 운용이 절정에 달할 때 외부의 방해를 받으면 시전자나 방해자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들었다.
그랬기에 당운영은 원인도 모른 채 일단 운호의 안위를 위해 방문을 가로막고 꼼짝하지 않았다.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도대체 어떻게 운호가 유형기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기껏 칠절문의 유령단에 당해 죽을 뻔한 운호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봤지만 운호의 내력은 일천한 수준에 불과했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시진 동안 방문을 지키며 온갖 상상과 추측을 했으나 끝끝내 답을 얻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문을 운호에게 묻지 않고 돌아섰다.
묻고 싶지 않았다.
운호가 점창 사람이란 걸 안다는 사실조차 숨겼고, 자신의 감정이 생각보다 훨씬 깊다는 것도 숨겼다.
아무리 무가에서 자란 무인이라 해도 그녀는 남자 한 번 사귀어보지 않은 처녀이다.
남자의 속살은 본 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려 삼 일간이나 운호의 몸을 수시로 보고 만졌다.
감정의 파고는 생각보다 깊어 운호의 방을 나설 때마다 다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그 마음을 달래느라 걸음을 서두르곤 했다.
처음의 호기심은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들끓게 만들었다.
언제 다시 돌아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약속을 지키라는 강요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못되어 가는 인연을 생각하며 그녀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슬며시 닦아냈다.
어젯밤 운호의 방에 가기 직전 본가에서 긴급 소집령이 내려왔다.
칠비(七秘)의 소환령.
점창에 풍운대가 있다면 당문에는 칠비가 있다.
칠비를 육성한 이래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던 지급 명령이 송환자를 통해 직접 내려왔다.
송환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실은 진정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 주체는 바로 점창의 풍운대.
바로 운호가 찾아가야 한다는 사람들이다.
용화로 향하고 있다는 풍운대의 위치를 당운영은 운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칠비를 소집했다는 것은 점창의 풍운대를 상대키 위함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운호가 다치는 것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의빈으로 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풍운대의 위치를 말해주지 않았다.
의빈과 풍운대가 있는 용화는 거의 이백 리의 차이가 있으니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은 절대 용화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작은 행동으로 인해 사천무림을 뒤흔들어 놓은 벽력이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무림사의 한 획을 그어놓은 사천 횡단은 의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뭐라? 천뢰삼십이수가 당해?”
“생각보다 훨씬 강한 자들입니다. 점창에서 공을 들여 키운 자들인 것 같습니다.”
“으… 당호는?”
“초현으로 후송시켰습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산 것이냐. 살아도 산 게 아니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찻잔을 쥔 당청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당황의 다음 말이었다.
“가주님, 청문자가 이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청문자가?”
“풍운대라는 놈들을 구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이놈들이 정말 미친 게로구나!”
“일단 칠비를 용화로 불렀고, 환영각과 귀수대를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청문자는 점창제일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무정현의 싸움으로 봤을 때 점창은 예전과 확실하게 달라졌습니다.”
“십이마령을 보내. 그리고 삼공도 투입시키고. 외원당주가 직접 지휘한다.”
“외원당주가 간다면 잘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막내에게 전하라. 청문자가 끝까지 버티면 모두 죽여도 좋다고.”
“문주님!”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사천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단 말이다.”
“…그리하겠습니다.”
할 수 없다는 듯 당황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당가주 당청이 그의 눈을 한참이나 지켜보다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런 후 번뜩이는 안광을 슬며시 숨기며 입을 열었다.
“둘째야.”
“예, 형님.”
“우리 아버님께서는 당문이 사천조차 어쩌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청성이란 존재를 어쩌지 못한 걸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셨지. 그런데 이제는 칠절문에 이어 점창까지 당문을 우습게본다. 내 마음이 어떨 것 같으냐?”
“형님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당문의 명예가 지키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