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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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33화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전신이 마비를 일으킨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였을 때는 말을 듣더니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자각하자 극심한 통증이 옆구리와 어깨 쪽에서 흘러나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움직이려 노력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몸은 움직여지지 않고 대신 이마에 굵은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소저, 미안하지만 움직이기가 쉽지 않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들어주기 어려울 것 같군요.”
“소협의 상처는 살이 한 치나 벌어질 정도로 중상이에요. 대충 치료는 했지만 꿰매지는 못했어요.”
“…….”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소협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게 무슨……?”
“당가 사람이라고 말했잖아요. 당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의술을 배우게 되어 있는데 나는 아직 사람의 상처를 꿰매본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내 몸으로 시험을 해보겠다는 소리요?”
“그래요.”
그녀의 눈이 반짝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
원하는 것이 상처를 치료하는 거라면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얘기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거짓임이 분명했다.
천하의 당문 식솔이 목숨을 살려놓고 대가로 상처나 꿰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목숨 값을 바란다면 들어줘야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소저, 이 상처는 나를 쫓는 사람들에게 당한 겁니다. 사정은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그자들은 무서운 사람이오. 자칫 잘못하면 소저까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 지금은 그냥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지금의 은혜를 반드시 갚지요.”
“핑계를 대는군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지금 신세를 갚아요.”
“핑계가 아니라 위험하기 때문이오. 나는 은혜를 입은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소.”
“내가 그냥 가면 소협은 어쩌려고요.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무리하면 갈 수 있을 거요.”
“간신히 살렸는데 내가 그냥 내버려 둔 채 떠날 거라 생각했나요? 소협이 허락하지 않으면 나도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벌써 날이 저물고 있군요. 바깥에서 자려면 모닥불이라도 준비해야 되겠지요?”
단호한 표정과 말투.
연약하게 봤는데 외모와 다르게 보통 강단이 아니다. 그녀는 정말 금방이라도 마른나무를 찾기 위해 움직일 기세였다.
운호는 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소저!”
“그러니까 나 고생시키지 말고 웬만하면 그냥 가요.”
운호는 바짝 마른 입술로 누운 채 다가오는 도시를 바라봤다.
당운영이 준 약을 먹은 후 정신이 몽롱해져 도시의 불빛이 뿌옇게 보였다.
그녀는 제대로 서지 못하는 운호를 부축해 기어코 마을로 내려와 마차를 빌렸다. 둘은 서곡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유령단(幽靈團)을 마주쳤던 황성산에서 동쪽으로 이십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의빈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는 도시로, 중요한 것은 서곡이 당문의 영역에 있다는 점이었다.
서곡으로 들어와 거침없이 마차를 끌고 제법 큰 장원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사천리(一瀉千里).
마차를 이동시키는 사람, 운호를 부축하는 사람, 등을 들고 방으로 안내하는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였는데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
운호를 눕힌 당운영은 수술 도구를 들고 들어온 시비를 옆에 앉힌 후 즉시 운호의 옷을 벗겼다.
미리 마취산을 먹였기 때문에 운호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다 해도 여인의 몸으로 남정네의 옷을 벗기면서 단 한 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얼굴은 능숙한 손길과는 다르게 붉게 변해 있었다.
붕대를 천천히 풀어내자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가 속살을 내밀며 나타났다.
너무 큰 상처이기 때문인지 비전의 활인고를 듬뿍 발랐는데도 전혀 호전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독액으로 상처를 씻어낸 당운영은 지체 없이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수술을 해보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임이 분명했다. 수술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면 사람의 살을 이리 능숙하게 헤집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의 일 다경에 걸쳐 수술을 마친 당운영은 붕대를 다시 감은 후 물끄러미 운호를 쳐다봤다.
마취가 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텐데도 그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객잔에서는 사내들의 대화 내용을 다 듣지 못했기에 정체를 알지 못한 상태로 따라 나왔으나 유령단에게 공격당하는 걸 보고 운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점창 무인.
운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강호의 일은 섣불리 관여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 가문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리고 그 대상이 칠절문이라면 자칫 사천에 피바람을 몰고 올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 부담을 알면서도 그녀는 운호를 속가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입고 도주하는 두 시진 동안 운호는 수많은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분노, 절망, 고통, 그리고 눈물.
사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토록 아파 보인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그것은 상처로 인한 고통 때문이 아니라 끝없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뜬 운호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어제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 천천히 떠올렸다.
관제묘에서 있었던 일, 황성산에서 만난 유령단과의 싸움, 그리고 도주, 당운영의 아련한 눈길과 도움.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떠올라 운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정신은 강하다.
어릴 때도 강했고, 풍운대의 일원이 되어 혹독한 수련을 했을 때도 누구보다 강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무림에 나와 처음 벌어진 싸움에서 도주를 택했다는 분함과 부끄러움은 잠에서 깬 순간 한쪽 가슴에 깊숙이 묻어놓았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이 필요했다.
잠을 자는 동안 천룡무상심법이 가동되었으나 워낙 상처가 깊어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그는 아주 조금씩 몸을 비틀어 감각을 끌어 올렸다.
감각을 회복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느린 속도로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킨 그는 옆구리에서 터져 나오는 통증을 참아내고 힘들게 좌정을 했다.
심법의 운용.
천룡무상심법의 무한한 효능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탁월하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수없이 겪으며 알았다.
그랬기에 강력한 통증을 참아내며 억지로 일어나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단전에 묶여 있던 내공이 혈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 훨씬 부드러웠다.
쉽게 말하면 내공이 이동하는 경로인 주요 혈들이 이전보다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주, 진중, 하완혈은 그렇다 쳐도 고통의 진원지인 옥침혈과 풍부혈의 흐름이 넓은 관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편안했다.
심법 수련을 하면 무아지경에 빠진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심법 수련을 하면서 무아지경에 든 적이 한 번도 없다.
심법을 운용하면 끊임없이 생겨나는 고통을 제어하느라 심신을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주에서 시작한 내기가 옥침을 타고 풍부혈을 거쳐 뇌호혈에 도달했다가 유연하게 방향을 바꿔 역순으로 돌아왔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은 일주천이 끝나고 단전에 모인 내기가 다시 뇌호혈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다.
육체를 괴롭히던 강렬한 통증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주해야 했던 기억도, 처음 와본 곳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도 모두 사라지고 끝없이 펼쳐진 허공을 유영하는 자신만이 보였다.
황홀했다.
길도 없고 시야를 밝혀주는 등도 없었으나 어디든 볼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부모님이 계셨고, 무릎에 앉혀 놓은 채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부님이 계셨다.
청문 사숙과 사형들, 그리고 운여와 운상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봄꽃처럼 환한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도 보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언어가 눈을 통해 전달되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그들과 만나는 이 길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길은 곧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색찬란한 빛 무리의 향연.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빛 무리는 온갖 형태를 꾸며내며 유혹했는데, 그는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빛을 따라 끊임없이 날아갔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한순간 그는 조용히 눈을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눈은 심연처럼 가라앉았고 호흡은 어느 때보다 안정되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청문자는 부대를 이끌고 학경에서 벗어나 사천의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감락(甘洛)으로 향했다.
감락은 칠절문의 삼 개 지단 중 하나가 자리 잡은 곳이다. 칠절문 삼대고수 중 하나인 권절(拳切) 풍공이 단주였고, 그 휘하에 이백여 명의 무인이 상주하고 있었다.
사천의 서부를 담당하는 감락지단.
주변의 열두 개 지부까지 포함하면 소속 무인의 숫자가 오백이 넘는 대규모로, 칠절문의 주력 고수가 대거 배치되어 용담호혈로 변한 곳이다.
“얼마나 모였느냐?”
“정보로는 일곱 개 지부가 감락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일곱 개라……. 나머지는?”
“감락으로 합류한 지부는 우리 진출로에 있던 자들입니다. 나머지는 원래의 위치에 있습니다.”
청문자의 질문에 점창십삼검 중 하나인 운청이 말을 받았다.
그는 춘경장 싸움에서 청운자와 청면자가 당할 때 같이 있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칠절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는데, 싸움이 다가오자 눈빛이 번들거렸다.
“여기서 감락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이제 백 리만 더 가면 됩니다.”
“백 리라…….”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편한 길이 되지 않을 것 같구나.”
“각오하고 있습니다. 저희 안방인데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요.”
“제자들을 주의시켜라. 이동 경로에 기습이 있을 테니 철저히 경계를 서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숙.”
“왜 그러느냐?”
“풍현에서 운호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뭐라!”
그동안 침착하게 앉아 대화를 하던 청문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 것마저 잊을 만큼 놀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운청의 목소리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의빈으로 간다고 했답니다. 풍운대와 합류할 생각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났지만 운호는 의빈에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풍현의 밀지가 기습을 당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운상이는 어쩌고? 같이 있지 않았단 말이냐?”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합니다. 학경에 있던 놈들을 추적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다행스럽게 풍현의 신응들은 운상이 구했다고 합니다.”
“바보 같은 놈이로다. 그까짓 지부 병력 이동이 무슨 대수라고 운호를 혼자 둬!”
“관제묘가 노출됐다면 운호도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격한 놈들은?”
“유령단입니다.”
“으흐.”
청문자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운호가 그에게 보여준 마지막 검식은 완벽했고, 내력이 포함되자 신기로 나타났다.
하지만 유령단에 걸렸다면 위험하다.
운호의 내력 가지고는 어쩔 수가 없을 만큼 유령단은 강한 자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의빈으로 가고 싶었으나 일전을 앞에 둔 상황에서 그리할 수는 없었다.
“운청, 전서구를 날려라!”
“어디로 말입니까?”
“풍운대를 남하시켜 의빈에서 풍현까지 샅샅이 뒤진다.”
“기습 작전은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운호를 찾아내야 한다. 반드시 찾아내야 해!”
그토록 침착하던 청문자의 입에서 고함이 나왔다.
운호의 몸에서 천룡무상신공이 발현되는 것을 보며 얼마나 기뻤던가.
저절로 떨려오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대로 서 있지 못할 만큼의 감격에 젖었다.
점창의 미래.
만천자가 이루었던 천하제일의 꿈을 재현시키기 위해 칠절문과의 싸움이 끝나는 대로 점창의 모든 힘을 운호에게 쏟을 생각이었다.
현재의 점창은 분광과 회풍을 기적적으로 돌려받아 전력이 크게 상승했으나 지금껏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십대문파나 전통 세가들에 비하면 아직도 전력 면에서 부족한 실정이다.
예전처럼 무시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우위를 점하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운호의 존재는 각별했다.
운호가 익힌 천룡무상신공만이 태양을 베는 검 후예사일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예사일이 완성되면 천하의 그 누구도 점창을 눈 아래로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실종이라니.
사형들과 함께할 수 없겠냐는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또 한스러웠다.
눈물을 흘리며 떼를 썼더라면 훨씬 거절하기 쉬웠을 텐데 놈은 그저 아련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