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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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32화
두 개의 능선을 가로지르며 미친 듯이 달렸다.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으나 유운신법에 사용되는 내공을 거두지 않았다.
어깨와 옆구리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적객들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철의 검에는 대적하지 못할 강력한 내공이 담겨 있어, 비틀어냈음에도 검이 밀리며 제법 커다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내력 검에 당한 상처는 살이 크게 벌어지며 지혈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파괴력이 일반 검에 비해 크기 때문인데 정철의 환두검은 날마저 두꺼워 상처의 벌어짐이 훨씬 심했다.
“헉헉!”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반 시진가량 달리자 호흡이 거칠어졌다.
온 신경은 뒤쪽에 가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적들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아니다. 적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은 것은 탈출에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럼에도 그는 신법을 멈추지 않았다.
누구라도 빗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신법이라면 여유를 가졌겠지만 내공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신법으로는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분하다.
하산한 지 불과 삼 일 만에 쫓기는 신세가 되다니.
새삼 청문자의 붉어진 눈이 떠올랐다.
무력이 부족해 분노를 목구멍 속으로 삼키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는 사숙의 말이, 지금 이 순간 운호의 머리와 가슴을 온통 아픔 속에 잠기게 만들었다.
점창에 오른 것이 아홉 살 때였으니 십오 년을 미친 듯이 수련에 매진했다.
사부님께 했던 약속.
점창의 별이 되어달라는 사부님의 부탁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강자가 되어 사문의 명예를 드높여 달라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 사형제들로부터 독종 중의 독종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미친놈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이나 치고 있다니…….
냉철한 이성으로 위기를 벗어났으나 무인으로서의 명예는 황성산에 그의 피와 함께 흘려놓았다.
명예보다 목숨을 택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가슴이 너무나 아파왔다.
무인으로서 적을 눈앞에 두고 뒷모습을 보인 채 도망쳤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적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눈에서 슬그머니 솟아난 눈물이 사물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혈관이 부풀어 오르며 전신에 송곳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으나 운호는 미친 듯 바위를 뛰어넘고 계곡을 건넜다.
이대로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운호가 떠난 그날 오시.
학경에 있는 칠절문의 지부들을 찾아 무주로 갔던 운상은 그들이 후퇴했다는 확증만 잡은 채 곧장 풍현의 관제묘로 돌아왔다.
칠절문 지부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무주로 가는 것이 맞았지만 운상은 그것보다 운호의 안전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쉬익!
운상의 신법은 운호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내공이 완벽하게 뒷받침된 그의 유운신법은 깃털처럼 가볍고 한 마리 독수리처럼 빨랐다.
채앵, 챙!
바위를 차고 날아오른 운상은 관제묘 쪽에서 들려온 병기 소리에 더욱 빠르게 신법을 펼쳤다.
문제가 생겼다.
풍현의 관제묘는 도시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 아니다.
더군다나 점창에서 밀지로 사용하면서 사람의 출입을 통제했기에 하루 종일 사람 구경하기가 힘든 곳이다.
그런 관제묘의 공터에서 이십여 명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먼저 확인했고,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열다섯의 적객이 점창의 신응들을 둘러싼 채 공격하고 있었는데 벌써 세 명의 신응이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남은 다섯의 신응도 온몸이 피로 물들었는데 신형이 연신 흔들리는 중이었다.
“멈춰라!”
포위망의 중앙에 떨어져 내린 운상의 검에서 빛살 같은 검기가 뻗어 나와 세 명의 적객을 일거에 쓸어냈다.
검기에 당한 자들은 일 장이나 튕겨 나가 쓰러진 후 움직이지 못했다.
검을 앞으로 내민 운상의 기세는 산악과 같아 적객들의 움직임을 한꺼번에 제어했는데,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호랑이를 연상시켰다.
“너희는 누구냐?”
낮게 깔린 운상의 목소리가 정면에 선 외눈박이 사내를 향해 흘러나왔다.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사내는 예리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운상의 눈을 마주 노려봤다.
세 명의 수하가 쓰러졌지만 그는 한 올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를 유령단이라고 부르지. 너는?”
“운상!”
“오호, 운 자 항렬을 가졌다 이거지? 어쩐지 꽤 한다 했어. 점창도 밀지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군그래.”
“신응들을 척살하고 다닌다는 놈들이 너희냐?”
“맞아. 여기까지 오면서 죽인 놈이 열다섯은 될 거야.”
“크큭! 언젠가 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찍 만나다니 다행이로구나.”
유령일대주 황문의 짧은 대답을 들은 운상의 입에서 그릉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황문과 대화를 하면서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안색이 무섭게 굳어져 갔다.
“유현 사질!”
“예, 사숙.”
갑작스러운 부름에 유현이 급히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는 최대한의 공경이 담겨 있었는데, 운상이 나타나며 보여준 강력한 일격이 충격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세 명의 적객을 죽인 운상의 무력은 진정 경이로운 것이었다.
“운호가 안 보이오. 그는 어디 있소?”
“운호 사숙께서는 의빈으로 떠나셨습니다.”
“의빈으로 떠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오늘 점심 무렵 떠나셨습니다. 말렸으나 듣지 않으셨습니다.”
“으흐, 내 그리 부탁했건만. 어찌 막지 못하셨소?”
화를 내는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무섭게 소리치는 것보다 더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의 눈은 유현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유현을 향해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심장, 그리고 오장육부로 번져 가는 불안감에 그는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운호가 갔다는 의빈은 칠절문의 안마당이라 볼 수 있는 곳이다.
칠절문의 최정예 황룡단이 웅크리고 있는 무현과 불과 삼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용담호혈이라고 봐야 했다.
의빈으로 향했다면 풍운대를 찾아간 거다.
운곡 사형이 이끄는 풍운대는 공공연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칠절문은 물론, 점창에서도 그들이 의빈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 위험했다.
내공을 쓰지 못하는 운호가 적과 조우하게 되면 엄청난 불행이 생길 수도 있었다. 운상의 마음은 이미 의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봐, 애꾸눈. 내가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
“그럴 수는 없지. 클클클, 우리는 시간이 많거든.”
운상이 검을 겨누자 황문이 왼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 맞춰 적객들이 팔방을 점유하며 운상을 포위했다. 그들이 방위를 차지하자 묘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유령단이 자랑하는 유령미혼진.
신응들과의 싸움에서는 워낙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유령미혼진을 펼치지 않았으나 운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운상의 일격은 자신과 비교해도 절대 하수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단독으로 승부를 볼 생각은 없었다. 황문은 지체 없이 유령미혼진을 펼치고 자신이 직접 진의 중문을 지킨 채 운상을 압박했다.
그러나 운상은 그들이 유령미혼진을 완벽하게 가동시킬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고 곧장 허공으로 솟구치며 검기를 뿜어냈다.
검기의 물결. 바로 사일검의 월파다.
“이 새끼야, 내가 시간 없다고 했잖아!”
반 시진을 더 달린 운호는 전신을 갉아먹는 고통에 어쩔 수 없이 신법을 멈추고 바닥에 쓰러졌다.
또다시 시작된 고통.
삼성을 넘으면 찾아오던 고통은 신체가 한계를 벗어나자 급격하게 증폭되더니 온몸을 지배하고 말았다.
몸은 땀이 솟구쳐 바닥을 적실 정도로 불덩이 같았고, 운호를 무의식 상태로 몰아넣었다.
웬만한 고통이었다면 몸이라도 뒤틀었을 텐데 이 고통은 신체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음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이봐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으…….”
당운영은 운호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약한 신음만 흘리자 즉시 몸을 뒤집어 얼굴이 보이도록 했다. 그 후 전신 경혈을 위에서 아래 순으로 짚어나갔다.
당문의 기재로 자랐으니 독에 능통하고 의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독이란 천하에 자생하는 동식물의 부산물이 인간의 건강과 상극되는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독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당문이 의술에도 능통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의술 또한 인간의 신체 구조를 연구하고 분석해 최상의 치료를 하는 행동이니 독을 다루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경혈을 모두 짚어본 당운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땀을 흘리며 신음한다는 것은 신체가 고통스럽다는 걸 의미하는데, 운호의 몸은 아무리 살펴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어깨와 옆구리에 난 상처가 적지 않았으나 의식까지 잃어버릴 만큼 고통을 겪는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 사실이다.
그녀는 이내 장기 쪽을 살폈다.
만약 내상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라면 외상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는 꼼꼼히 운호의 경혈을 훑었다.
하지만 운호의 경혈은 어디 하나 막힌 곳이 없었다.
의술이 뛰어나도 고통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치료가 불가능했다.
당운영은 일단 운호의 혼혈을 짚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까지 전달되는 그의 고통을 없애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입에서 흘러나오던 신음이 가라앉고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는 걸 확인한 당운영은 그때서야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 운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상처는 예상보다 컸다.
흘린 피의 양도 만만치 않았는지 선혈 대신 진득한 피가 상처를 감싸고 있었다.
가전의 비약인 활인고를 꼼꼼히 바르고 붕대로 싸맨 당운영은 물끄러미 운호를 바라봤다.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외모만 가지고 사내를 따라온 것은 아니다.
처음엔 장난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를 합석시킨다는 건 무가의 자식으로 자라온 그녀에게도 커다란 모험이었다.
황보혜가 장단을 맞추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녀가 운호를 따라오기까지 한 것은 잘생긴 외모보다 식사를 하면서 보여준 순수함 때문이었다.
착해도 너무 착했고 가끔 보여주는 웃음은 정신을 흔들어놓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운호의 위험을 방치할 수 없던 이유였다.
절정고수.
고수의 이목은 세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데 당운영은 그 수준을 뛰어넘는 절정고수였다.
그녀는 객잔에서 비각 무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내공을 끌어 올려 그들의 속삭임을 들었다. 그렇기에 운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곧장 그를 미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구했다.
유령단의 우두머리가 당문을 들먹인 것이 조금 찜찜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머니 없이 자란 삶.
오로지 자신의 무공 성취만 확인하며 기뻐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기 위해 죽도록 무공 수련에 전념했다.
절정에 달한 무공은 얻었으나 그녀는 원하지 않는 다른 하나도 얻게 되었다.
바로 사무칠 만큼 강한 외로움이었다.
만약 운명이 있어 인연을 허락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 인연을 받아들여 자신을 괴롭히는 외로움을 씻어내고 싶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운호가 눈을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곧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붕대로 싸매진 상처.
윗옷은 벗겨져 있고 상처는 치료되어 꼼꼼하게 붕대로 감겨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걸 알아챈 운호의 눈이 급히 주변을 돌아보다가 한곳에 고정되었다.
당운영이 나무에 기댄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소저께서 어떻게……?”
“집에 돌아간다고 말했잖아요. 의빈을 가려면 여기가 제일 지름길이거든요.”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군요.”
“그건 제가 할 말인 것 같은데요. 여기 도착했을 때 소협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어요. 말해봐요. 왜 쓰러져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 상처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건 말하기가……. 상처는 소저께서?”
“여기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요?”
“신세를 졌군요.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갚을 건가요?”
“그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갚지 말고 지금 갚아요.”
당운영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운호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봄꽃 같은 화사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