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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30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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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30화

운호는 그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피하지 않는 시선.

자신만을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눈을 마주치자 활짝 웃어주던 여인.

그리고는 다가와 대뜸 호의를 베푼다.

운호는 당운영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처음엔 당황했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고마움을 표했다.

한시가 급한 지금,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식사를 하고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그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당운영을 따라 자리로 가자 황보혜가 일어서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전 황보혜라고 해요. 반가워요.”

“이렇듯 사정을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얼른 식사하고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우린 괜찮으니까 천천히 하셔도 돼요.”

“그럼 신세를 지겠습니다.”

부드럽게 말을 받은 운호는 점소이를 불러 만두와 소면을 시킨 후 물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자리에는 앉았으나 막상 할 말이 없다.

대부분의 세월을 산에서 보냈으니 왜 두 여인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는지 알 수가 없어 연신 물만 마실 뿐이다.

두 여인은 무슨 재미난 일이 있는지 운호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황보혜가 생각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소협께서는 여기 사시나요?”

“아닙니다. 볼일이 있어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검을 가지고 다니는 걸 보니 무인이시군요. 사문이 어찌 되세요?”

“그건…….”

“아, 말하기 곤란하면 밝히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괜한 질문을 한 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양해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그건 그렇고, 제 이름을 밝혔으니 소협 이름도 가르쳐 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임호(林湖)라고 합니다.”

사문을 말하지 않았으니 도호를 댈 수가 없어 운호는 자신의 본명을 말해 버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부른 이름이고 가슴속에 품어놓은 그리운 이름이다.

“이름이 참 멋있네요. 뭐해, 너도 가르쳐 줘야지?”

황보혜가 눈짓으로 독촉하자 당운영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웃음은 정말 봄꽃처럼 화사했다.

“전 당운영이에요. 아시죠, 당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세가인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호호,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운호가 놀랍다는 얼굴로 대답하자 당운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나 같은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천에서의 당문은 가히 독보적인 위치를 지녔다.

“그런데 사천에는 왜 가세요?”

“저희 사형들을 만나러 갑니다.”

“어디 계신데요?”

“의빈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계신지 찾아봐야 될 것 같군요.”

“어쨌든 그럼 의빈까지는 가시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같이 가시는 건 어떨까요? 저도 본가의 긴급 호출 때문에 돌아가는 길이거든요.”

당운영이 운호를 빤히 바라보며 당찬 제안을 해왔다.

도대체 뭘 믿고 다 큰 처녀가 처음 만난 남자와 동행하자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운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만 바라봤다.

아무리 강호 초출이라 해도 당운영의 제안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호가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당문오미 중의 하나로 그저 성격이 좋고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녀를 진정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외모가 아닌 무력이었다.

후기지수 중 사천에서 발군의 기세를 떨치는 신진들을 합해 무림인들은 사천십수라 불렀다.

그중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자를 꼽으라면 유성도 엽상이나 추혼검 상대운을 떠올리지만 상대하기 어려운 자를 말하라면 누구나 유성호접을 꼽는다.

그 유성호접이 바로 눈앞에 있는 당운영이다.

당문은 어릴 때부터 암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 그녀를 전폭적인 지원으로 키워냈는데, 전력으로 펼치는 비접은 그 누구도 격살할 만큼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문이 키워낸 비밀병기.

그 비밀병기 중 하나가 바로 유성호접 당운영이었다.

유성호접으로 활동할 때는 반드시 나비 모양의 가면을 썼기 때문에 당운영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웃는 얼굴로 운호와의 동행을 제안한 배경에는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도 한몫했다.

무림세가에서 태어나 사내들과 함께 무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왔으니 남녀 간의 격식을 차리는 세속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자유로운 삶.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사정이고, 운호는 달랐다.

처음 보는 여인과의 동행이 편할 리 없었다. 또한 사형들을 찾기 위해 전력으로 이동해야 하는 형편이라 요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저, 말씀은 고마우나 같이 가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저에게는 함께 여행하기 힘든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요?”

“미안합니다.”

“미안하긴요. 사정이 있다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운호의 얼굴 가득 떠오른 미안함을 보면서 당운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의외다.

대부분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당운영은 여인으로서의 서운함과 부끄러움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미소만 짓고 있다.

 

“저자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대주님.”

운호가 앉은 탁자에서 우측으로 세 칸 떨어진 탁자에 두 명의 사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탁자에는 소면이 놓여 있었는데 오래되어 면발이 퉁퉁 불어 있었다. 전혀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는 뜻이다.

턱수염 사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수긍하자 뱀눈 사내가 눈을 더욱 가늘게 만들었다.

“아직 새파란 애송이구만. 어찌 된 거냐?”

“아침 나절에 저자가 점창의 밀지인 관제묘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세작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저자가 떠날 때 유현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사숙이라 불렀습니다.”

“정말이냐?”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관제묘는?”

“유령 일대가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는 것만 확인하고 저는 저자를 쫓아 여기로 왔습니다.”

“갓 스물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사숙이라 부르다니 이해가 안 되는군. 옆에 있는 여인들은?”

“갑작스럽게 합석해서 아직 정체를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모르는 사인데 합석했단 말이냐?”

“지켜본 바로는 여인들이 자리를 양보해 준 것 같습니다.”

턱수염 사내의 설명에 대주라 불린 뱀눈 사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계집들이란 잘생긴 놈만 보면 암내를 풍기는 법이지. 유령 이대의 위치는?”

“정학입니다.”

“전서를 띄워서 이쪽으로 오라고 해. 정학이면 일각밖에 걸리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그리 조치하지요.”

“너는 여기 있다가 저자를 유령 이대에게 넘기고 따라와라. 나는 관제묘로 가겠다.”

뱀눈 사내가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정체는 칠절문의 비각 삼대주 정풍.

주요 임무는 풍현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점창의 정보망 신응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운호가 식사를 마친 후 인사를 하고 떠나자 당운영이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따라가려고?”

“어차피 가는 길이잖아. 잘생긴 사내 구경하면서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지 않겠어? 그리고 직감에 왠지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잘못하면 놓치겠다. 혜아야, 나중에 봐.”

“조심해서 가. 그리고 가능하면 꼭 잡아. 그 남자 정말 괜찮더라. 순진한 게 묘한 매력이 있어.”

“그렇지? 걱정 마!”

황보혜가 손을 흔들자 탁자 사이로 움직이던 당운영이 반쯤 돌아서서 웃음을 날렸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듯 경쾌했는데 복잡한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유운신법을 최대로 펼쳤으나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다 보니 그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최소한의 내공이 운용되면서 호흡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균형 잡힌 호흡 속에서 달리다 보니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던 당운영의 얼굴이 스르륵 떠올랐다.

여자라고는 접해본 적 없지만 그녀가 보여준 호의가 슬그머니 가슴으로 들어와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들었다.

이젠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유운검법이나 사일검법의 초식들처럼 그녀의 웃음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말 불가사의하다.

어찌 웃음 하나만으로 온 세상을 환히 비출 것 같은 광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찌 목소리는 이리 생생하게 남아 귀를 간질일 수 있을까. 고개를 아무리 흔들어봐도 한 번 떠오른 그녀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운호는 방향을 틀어 계곡 쪽으로 들어갔다. 땀을 식히고 그녀의 생각도 지우기 위해서였다. 사문은 지금 이 시간에도 피를 흘리며 적과 싸우고 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오직 명예만을 생각하며 검을 꺼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행태는 얼마나 가소로운가. 한낱 여인을 떠올린다는 것은 사문과 사형제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짓이다.

계곡물은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

두 손으로 떠 한꺼번에 얼굴을 적시자 뼛속마저 식힐 것 같은 차가움이 다가왔다. 그 차가움으로 미망이 사라지고 현실이 돌아왔다. 풍현에서 한 시진이나 달렸으니 여기는 황성산 인근으로 유추됐다.

두 시진 정도만 더 가면 유문이 나온다. 거기서 방향을 틀어 다섯 시진을 더 가야 의빈이 나오니 서두른다 해도 저녁 늦게야 도착할 수 있다.

적색 무복의 사내들이 나타난 것은, 그가 세면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해 걸어 나왔을 때다.

사내의 숫자는 열둘.

모두 검을 들고 있었는데 운호가 평지로 나서자 즉시 포위망을 구축해 왔다.

그 움직임이 표홀하고 빨랐는데 막상 포위를 당하자 전신을 압박하는 무형의 기운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만큼 강한 자들이란 뜻이다.

위기.

내력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정도로 강한 자들과의 교전은 죽음을 염두에 두게 만든다. 그럼에도 운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따라왔소?”

“당연히.”

대답한 자는 정면에 선 짝귀의 사내였다. 그의 적색 무복 오른쪽에는 흰색 해골이 새겨져 있었는데 얼마나 정교한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이는 삼십 후반 정도. 진의 중앙을 점유한 것을 봤을 때 그가 수뇌임이 분명했다.

“칠절문이오?”

“머리가 좋은 모양이구나.”

“어디서부터 따라온 거요?”

“풍현.”

“관제묘에서 봤소?”

“그랬으니 왔지. 자, 그럼 이제 나도 한 가지 묻자.”

“그러시오.”

“정체가 뭐냐?”

“알고 따라온 거 아니었나? 칠절문은 정체도 모르고 사람을 따라다니는 모양이지?”

운호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묻자 짝귀 사내가 빙긋 웃었다.

“뭐, 어떡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런데 막상 따라와 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건 왜?”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너 같은 애송이를 잡으려고 여기까지 왔으니 낯부끄러워서 그런다.”

칠절문의 특수부대 유령단의 대주는 다른 단의 대주보다 한 단계 위의 무력을 갖춘 고수다.

춘경장에서 청운자 일행을 공격했던 은마수보다 조금 더 강하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의 정체는 유령단 제이대주 마수 정철이었고, 사천에서 운남을 잇는 직선로를 따라 점창의 세작들을 해치우며 남하하는 중이었다.

고수는 먼저 적의 무력부터 측정한다.

그랬기에 따라오면서 유심히 관찰했는데 운호의 몸에는 내공이 전혀 흐르고 있지 않았다.

신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유운신법은 빠르게 뛰는 수준에 불과했다.

정철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인 후 검을 툭툭 두들겼다.

내공도 없는 자를 죽이기 위해 이렇듯 많은 인원을 동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검을 꺼내 들었다.

얼른 끝내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하려는 태도였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음에도 운호는 감정을 숨긴 채 궁금한 것을 마저 물었다.

“관제묘에 있던 사람들은 어찌했소?”

“죽었겠지.”

“모른다는 뜻이오?”

“걔들은 다른 부대가 맡았거든. 아마 죽었을 거다. 신응 정도로 유령단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당신들도 유령단이오?”

“그렇다.”

“칠절문주가 직접 키웠다는 유령단을 이런 산골짜기에서 만나다니 재수가 좋은 모양이오.”

“미친놈.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그리 보여? 큭큭, 어쨌든 어차피 이리 된 거, 한꺼번에 오시오. 시간 끌지 말고.”

“그 새끼, 귀찮게 할 모양이네. 그냥 모가지 내려놓으면 피차 편할 텐데. 점창 놈들은 스스로 독종이라고 한다던데 너도 그러냐?”

“나는 점창에서 십오 년이나 굴렀소. 그 십오 년 세월 동안 정말 지랄같이 살았지. 그런 나를 보고 내 사숙들과 사형들은 독종이란 말 대신 다른 걸 붙여주더군.”

“그게 뭐냐?”

“왕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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