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65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65화
벌판에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벌판에 부는 바람은 일정한 방향으로만 불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기 때문에 회오리로 변해 흙먼지를 끌어당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회오리의 숫자는 하나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지금의 장안평처럼.
장안평을 휩쓰는 회오리 사이로 당문의 무인들이 걸어 들어온 것은 미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약속한 인원보다 많다. 점창의 인원은 스물둘에 불과한데 당문은 무려 오십이 넘는 무인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오 장을 격하고 선 당문의 무인들은 일부러 기세를 뿜어내지 않았으나 대단한 고수란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컸다.
중앙에 선 것은 용화에서 본 외원당주 당추와 칠비였고, 백색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열다섯의 노인은 중앙 좌측을 차지했다.
백색 무복을 입은 중년의 도객들이 중앙 우측에 섰는데 그 숫자는 열여덟이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후미 쪽에는 흑립을 깊게 눌러쓴 열세 명의 사내가 자리한 채 노려보고 있다.
입맛이 쓰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뜻이 있다는 말인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좋은 상황이 아니란 건 알 수 있기에 점창무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맨 앞에 선 청문자의 입이 열린 것은 당추가 그를 향해 다가와 일 장 앞에 섰을 때다.
“많이 왔군.”
“미안하오.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소. 호법전에 계신 원로 분들이 구경하고 싶다며 따라나서니 어찌 막을 수 있겠소.”
“그랬나?”
“저기 십팔혈룡은 여기서 이 리 정도 떨어진 파안에서 만난 거요. 저들도 구경이나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소. 이해해 주시겠지요?”
“구경하겠다는 걸 말릴 수는 없지.”
뻔뻔한 당추의 말에도 청문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십팔혈룡이라면 당문이 보유하고 있는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의 무인이다.
더군다나 열다섯이나 되는 호법이 나섰으니 호법전이 모두 움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뒤쪽의 흑립객들은 보나마나 뇌광십삼포가 분명했다. 작정한 모양이다.
당문은 오대무력단체 외에 세 개의 진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여기 와 있는 호법전과 십팔혈룡, 그리고 뇌광십삼포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당문삼력이라 부르곤 했다.
용화에서 풍운대가 상대했던 천뢰삼십이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들.
천뢰삼십이수가 당문의 신성들로 구성되었다면 십팔혈룡과 뇌광십삼포는 당문의 최정예 주력 무인 중에서 가려 뽑아 오랜 시간 고련을 통해 완성된 병기다. 이 정도라면 당문 전력의 삼 할에 가깝다.
양측이 팽팽하게 대치된 가운데 어색한 웃음을 떠올린 당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로 반가운 사이도 아니니 얼른 볼일이나 봅시다.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으시오?”
“우린 없네. 당문에서 원하는 대로 응해줄 테니 말해보게.”
“대단한 자신이오.”
“자신이 없었다면 오지도 않았다.”
“푸하하!”
웃음소리는 거침없이 나왔으나 얼굴에 웃음은 들어 있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우리 당문은 점창과의 원한을 잊은 지 오래요. 따라서 서로 피를 보는 것은 원하지 않소.”
“그런데 나는 당문이 피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왜 그리 생각하시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리 잔뜩 끌고 왔겠느냐.”
“어찌 생각하든 그대의 마음이니 왈가왈부하지 않겠소. 하지만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내 말은 사실이오.”
“본론을 말해!”
“당문과 점창이 이리 된 것은 용화의 오해 때문이오. 치욕을 당했으니 갚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니 우리가 치욕을 갚을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래서 이 자리를 만든 것 아닌가. 원하는 바를 말하라.”
“칠비와 풍운대 전체가 붙으면 아무래도 피를 볼 것 같구려. 그것은 당문도 점창도 원하는 바가 아닐지니 나는 용화에서 당호를 꺾은 자와 칠비 중 흑호가 일대일로 승부를 봤으면 하오.”
당추의 말에 청문자의 시선이 서늘하게 변했다. 결국 이거였나.
왜 이리 많은 자들을 끌로 왔나 했더니 거부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한 압박용이었던 모양이다. 가소로운 자들이다.
당문은 점창마검을 이기지 못할 거란 생각에 편법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래서 강호의 명문들은 생각하는 게 편협해지기 쉽다. 안 된다는 판단이 들면 깨끗하게 포기해야 하는데 이런 편법을 써서라도 명예를 회복하려 한다. 기호지세란 말도 어울리지 않으니 억지를 쓰는 당문이 불쌍해 보였다. 저들은 점창에 마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용화에서 당호를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운곡이다. 풍운대의 대사형 운곡.
청문자는 물끄러미 당추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당문에서 어떠한 제안을 해도 선봉은 운곡이었다.
연승식이든 복승식이든 합격진이든 모든 비무의 선봉은 운곡이란 뜻이다.
그만큼 운곡은 청문자가 인정하는 강한 무인이다.
지난 이 년 동안 운곡은 회풍을 구성까지 끌어올려 절정의 끝을 향해 다가섰다.
향후 몇 년만 더 지나면 운곡은 청문자도 장담하지 못할 검객이 되어 천하를 질주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운곡을 지목했으니 청문자는 속으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운호가 나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흑호의 무력이 어떠한지 몰라도 운곡이라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당추, 그대는 후회하지 않겠는가?”
“당연하오.”
“그렇다면 그리 하지. 준비시키게. 우리도 준비할 테니.”
당문혁은 검은 호면을 쓴 채 다가오는 운곡을 기다렸다.
황수전투는 그의 무인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황수전투는 그에게 경이였고 분노였으며 고통이었다.
당문으로 돌아간 그는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새우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좌절감이 가슴에 빽빽이 들어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점창마검의 무력과 투지.
눈을 감으면 폭풍처럼 전진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으며 기억을 지워 버리지 못하는 머리 역시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인의 심장은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피가 흐른다.
칩거한 채 움직이지 않던 그가 방문을 박차고 나온 것은 칠 일이 지난 후였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좌절감 대신 상승에 대한 불타는 의지였다.
무암동(無岩洞).
당문의 비지인 무암동에 그가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간 것은 이 년 전이었다.
이루지 못하면 나가지 않는다.
그런 신념으로 연환십이참(連環十二斬)을 참오하며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던 구연참을 성공시킨 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다.
독왕이라 불리는 당문주 당청은 십연참으로 무림 무력 서열 오십구 위에 올랐으니 그의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점창과의 비무에서 그는 운호와의 승부를 바랐다.
점창마검.
황수전투의 영웅이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성.
그와 당당히 맞서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가문의 어른들은 자신의 소망을 단박에 꺾어버렸다.
가문의 명예.
어른들은 자신의 소망보다 가문의 명예를 택하고 말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받아들여야만 했다.
당문에서 자랐으니 당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또한 자신의 소망에 비해 적지 않은 일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검을 왼손에 든 운곡은 무표정한 얼굴로 당문혁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을 기다리는 호면의 사내.
고요함 속에 들어 있는 기세가 마치 폭풍전야처럼 느껴지는 사내다.
“만나서 반갑소. 나는 운곡이라 하오.”
“흑호요.”
“당문의 외원당주께서 피를 보지 않길 원하시더이다. 당신의 뜻도 그렇소?”
“숙부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요. 내 폭우이화정은 눈이 없는지라 쉽지 않을 것 같구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내 검에는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해본 말이었으니 이해하시오. 대신 승부가 결정되면 즉시 검을 거두리다.”
“고마운 말이오. 그대와 나,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후회 없이 싸워봅시다.”
당문혁의 말도 당연했고 운곡의 말도 당연하다.
흑호의 독문 병기는 폭우이화정이란 천고의 암기다.
어떤 이는 내공으로 암기를 조절해서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소리도 하지만 그것은 진정 꿈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입신의 경지에 든 무인이 이기어검술을 펼쳤다는 전설은 들어봤어도 수많은 암기를 내공으로 조절했다는 건 전설에도 없다.
암기술의 정화는 속도와 변화, 그리고 정교함이다.
시전자의 손에서 떠난 암기에는 내공이 담겨 적의 숨통을 단박에 끊는 사혈을 노린다.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적의 방어를 뚫고 치명타를 가하는 무공이 바로 연환십이참이란 암기술이었다. 끝장을 보겠다면 피를 보지 않고 승부를 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랬기에 당문혁은 단호하게 운곡의 제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곡은 달랐다.
만병지왕인 검은 주인의 손에 들리는 순간 한 몸이 되어 주인의 의지를 따른다.
승부를 낸 후에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피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으니 검에 눈이 달렸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운곡의 제안은 간단한 것이었다.
목숨을 걸겠냐는 뜻이었고, 상대는 그러마고 대답했다.
승부가 나면 검을 내려놓겠다고 말했으나 그리 되지 않을 것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승부는 피를 흘려야 끝이 난다.
운곡은 견적세를 취한 후 적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검을 들어 상대의 눈을 겨냥한 견적세는 어떠한 공격에도 즉시 방어할 수 있는 기본 자세다.
당문의 독문 무공 연환십이참은 용화에서 당호를 꺾으며 견식한 바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리가 한꺼번에 들어 있는 무공이다.
강, 유, 접, 호, 쾌, 둔.
어떠한 것도 배제되지 않은 절대의 암기술.
다행스럽게도 당호의 성취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막아낼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세 군데에 상처를 입어야 했다.
호흡을 고르고 적을 바라보는 운곡의 눈이 깊게 침잠되어 갔다.
확실히 다르다.
당호의 기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함이 당문혁의 몸에서 슬금슬금 새어 나오고 있다.
당문혁이 움직인 것은 운곡의 검극이 내력에 의해 미세하게 떨리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할 때였다.
폭우이화정(暴雨梨花釘).
천고의 암기 폭우이화정이 공간을 압축시키며 날아올랐다.
당문혁이 시전한 폭우이화정은 당호의 것과 다르게 벌 떼의 울음소리처럼 기괴한 음향을 토해내며 날아왔다.
주입된 내력의 강도 차이다.
그만큼 당문혁은 당호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인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