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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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60화
쓰러진 청무자를 향해 사람들이 급히 다가와 그의 몸을 확인했다.
가슴과 허리, 어깨 등 도상은 모두 아홉 군데였는데, 특히 허리에 난 상처는 너무 커서 한 치가 넘게 살이 벌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청무자는 사람들이 다가오자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청무자는 급하게 나선 청문자로 인해 다시 땅바닥에 눕혀지고 말았다.
“사형, 그냥 계세요.”
“사제 왔는가.”
“많이 다치셨습니다.”
“그런 것 같아. 꼼짝도 못하겠는 걸 보니 말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늦게 오는 바람에…….”
“별 소릴 다하는군. 그 덕에 내가 전왕을 잡았잖아. 다신 그런 소리 하지 마.”
“허허, 사형께서 공을 노리셨던 모양이오.”
“원래 내가 공명심이 커. 그건 그렇고, 우리 피해는 얼마나 되는가?”
“일단 치료부터 하시지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네 표정을 보니 피해가 큰 모양일세.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그러나?”
“지금 파악 중이지만 꽤 되오.”
“청허 사형께서 날 죽이려고 하겠구나.”
청문자가 정확한 대답을 피하고 금창약과 붕대를 꺼내 들자 청무자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전왕을 가로막느라 전장을 관장하지 못했다.
다행히 싸움은 이겼으나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없으니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자신 역시 극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제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안 보일까 걱정하는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떠돌며 흔들리고 있다.
거대한 전쟁을 치렀으니 어찌 아군의 피해가 없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걸레가 되어버린 자신의 상처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부지런히 제자들의 면면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청무자를 바라보며 청문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형의 늙은 육신은 성한 데가 하나 없을 정도로 엉망이라 치료를 하면서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도 전왕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수고로움을 사형이 맡으면서 이토록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청무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함께 자랑스러움이 들어 있었다.
수많은 군웅 앞에서 당당하게 전왕을 꺾은 청무자.
앞으로 청무자란 이름은 천하무림을 쩌렁하게 울리며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점창제자들이 전장터를 전전하며 사형제의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살아남은 칠절문 무인들 역시 죽어간 동료들의 시신을 한곳으로 모았다.
점창의 무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칼을 들었다.
전쟁에서 죽은 시신은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한꺼번에 묻는 것이 강호의 전통이기 때문에 시신을 모두 모은 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워낙 많아 한곳에 묻을 수 없어 인원을 나누어 구덩이를 팠는데 그 수가 서른에 달했다.
땅을 파는 그들의 눈에서는 굵고 진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같이 가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살아생전 함께했던 추억이 그들의 가슴을 괴롭히고 있음이 분명했다.
모든 시신이 거둬졌음에도 오직 전왕만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적장의 시신에 대한 처리는 승자의 권리이기 때문에 칠절문의 무인들은 점창무인의 눈치를 보며 애써 전왕의 시신을 외면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은 달랐다.
청수했으나 왜소한 외모의 중년인. 다름 아닌 천수였다.
천수는 지천강을 바라보며 칼을 의지한 채 죽어 있는 전왕에게 다가와 천천히 바닥에 뉘였다.
부릅떠져 있는 전왕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홍수처럼 흐르기 시작한 것은 전왕의 몸에 한쪽 팔이 없음을 확인한 후부터였다.
“주군, 아쉬움이 남아서 눈을 감지 못한 건 아닐 테지요. 그래도 이리 엉망이 되어 있으니 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오. 잠시만 기다리시면 팔을 찾아오리다.”
시신을 가지런히 정리한 천수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사방을 찾아 전왕의 왼팔을 가져왔다.
그런 후 자신의 윗옷을 벗어 잘린 왼팔을 시신에 고정시켰다. 심력이 고갈되어선지 손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아 한참이 걸렸다.
“설마 내가 같이 안 가서 서운해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허허, 그래도 잠시만 기다리세요. 가더라도 칠절의 이름을 세상에서 멋있게 지우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군께서는 언제나 귀찮은 건 다 저한테 맡기셨으니 이번에도 제가 알아서 하리다.”
그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전왕의 애도인 파천도를 손에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힘겹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내력이 없는 그의 손길은 둔하기 그지없어 한참이 지나도 구덩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사람이 다가온 것은 그가 구덩이를 판 지 이각이 지났을 때다.
“그대가 천수요?”
“그렇소. 그대는?”
“운풍.”
“점창의 장문제자시구려.”
“나를 아는 모양이오.”
“운남을 공략하려 했는데 십삼검의 수장인 운풍을 모르겠소.”
천수의 대답에 운풍의 고개가 작게 흔들렸다.
막상 대답을 듣고 보니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긍정의 표시를 하지도, 천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도 아니다.
그의 시선은 천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했소?”
“뭘 말이오?”
“운남은 척박한 땅이오. 사천의 그 풍요로운 물산을 놔두고 왜 운남을 욕심낸 거요? 보시오. 당신의 그 하잘것없는 욕심 때문에 벌어진 결과를!”
“다 아시면서 그러오. 그릇에 물이 차면 넘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소. 무인이 아닌 나도 그 이치를 아는데 무인인 당신은 왜 모른다 하시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물을 그릇에 채우는 건 사람의 욕심 때문이오. 그런 궤변으로 죄를 면하려 하오?”
“그대는 내가 변명하는 것으로 보이오?”
“변명이 아니면!”
“나는 오직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를 말했을 뿐이오.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힘없는 자는 강한 자를 동경하오. 같은 맥락으로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길 원하고 힘을 갖춘 자는 더욱 큰 힘은 원하게 되니 칠절문의 행사는 그 이치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오.”
“역시 궤변이로다!”
천수의 달변을 듣고 있던 운풍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는데 어느새 손을 썼는지 천수의 왼팔이 잘려 땅바닥에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생살이 찢겨져도 아픈데 팔이 잘렸으니 얼마나 아플까.
하지만 천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저 운풍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왜 목을 치지 않으셨소?”
“당신의 행동을 아까부터 지켜보았기 때문이오. 이것은 점창이 그대에게 내리는 제약이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믿지만 만약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점창의 검이 그대를 찾으리다.”
운풍은 성큼 다가와 천수를 구덩이에서 들어낸 후 잘린 팔의 혈도를 제압하고 상처를 치료했다.
그리고 천수가 쥐고 있던 파천도를 대신 잡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운풍을 바라보는 천수의 눈은 더없이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혈인으로 변한 운호와 운상은 칠절문의 무인들이 칼을 놓고 항복할 때까지 야차처럼 버티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바닥에 쓰러졌다.
점창무인들은 피투성이로 변해 있는 그들을 지천강변으로 옮겼다. 상처가 너무 심해 조심하느라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검귀가 되어 황수분지를 종횡한 두 사람.
전장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운호와 운상의 무력은 진정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들을 대하는 점창무인들의 태도는 극도의 공경이 담겨 있었다.
운자배 사형들은 전장을 정리하느라 황수분지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운호와 운상을 돌보는 것은 명자배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함부로 말조차 붙이지 못하고 그저 조심스럽게 치료만 한 후 멀찍이서 경계를 섰다.
상처가 심할 뿐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닌 운호가 옆에 누운 운상을 바라봤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운상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아프냐?”
“말 시키지 마. 힘들어 죽을 지경이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어쨌다고.”
“너 따라다니다가 이렇게 된 거니까 네 책임이지! 무슨 놈이 그렇게 미친 듯이 뛰어다녀!”
어느새 눈을 뜬 운상이 인상을 잔뜩 쓴 채 소릴 질렀다.
고통이 심했던지 소리를 질러놓고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운호의 입에서 저절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싸울 땐 사신 같던 놈이 이럴 때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런 운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진 것은 석양을 등지고 한 여인이 다가왔을 때였다.
웃음 대신 떠오른 놀라움.
그녀는 다름 아닌 당운영이었다.
“소저가 어찌?”
“지금 이곳에는 수많은 무인이 몰려 있어요. 바로 점창과 칠절문의 황수전투를 보기 위해서죠. 저도 그중 한 명이구요.”
“그렇구려.”
“그나저나 소협은 저를 볼 때마다 매번 다쳐 있군요.”
“미안하오.”
운호가 많이 놀랐던지 반쯤 일어선 상태에서 말끝을 흐리자 당운영이 다가와 원래대로 눕혔다. 그리고는 품에서 당문의 비전 활인고를 꺼내 꼼꼼하게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은 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왜 미안하죠?”
“소저에게 매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가 보오.”
“소협이 싸우는 거 지켜보고 있었어요. 정말 잘 싸우더군요. 대단했어요.”
“과찬이오.”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드리리다.”
“의빈에 마검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혹시 소협이 마검과 관계가 있나요?”
“그게…….”
당운영의 질문이 의외였기 때문에 운호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의도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그녀의 존재는 판단력을 흐려놓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세상에 나와 처음 만난 여인. 목숨을 구해주었고, 그에게 잊지 못할 추억과 감정을 선사한 여인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대답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답이 나온 것은 엉뚱하게도 운상에게서였다.
“의빈에 있던 마검을 말하는 거라면 그가 맞소. 그러니 이제 나도 좀 치료해 주시오. 저 친구보다 내 상처가 훨씬 심하다오.”
점창무인들이 칠절문 무인들을 남겨놓고 후퇴를 시작한 것은 석양이 붉은 노을을 동쪽에 펼쳐놓은 저녁 무렵이었다.
스물다섯의 시신은 천으로 꼼꼼히 싸서 운반했고, 상처가 심한 자들은 동료들의 부축을 받았다.
가까운 도시로 가서 마차와 수레를 구하지 않으면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사상자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이동은 매우 느렸다. 더군다나 상처가 심한 제자들은 황수에 남아 치료를 해야 하니 분지에서 벗어나면 여러 갈래로 나뉘어야 될 터였다.
양문에서 벌어진 싸움도 점창의 승리로 결정되었지만 그곳에 있던 청명자를 포함해 많은 수가 죽거나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때문에 후퇴하는 점창무인들의 분위기는 무거울 대로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 와중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비록 혈육처럼 지내던 사형과 사제, 그리고 사질들을 잃었지만 백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을 풀어냈으니 어찌 가슴속에 든 것이 슬픔만이겠는가.
그랬기에 걸음은 느렸지만 당당하게 움직였다.
이젠 돌아간다.
꿈속에서조차 잊지 못하던 점창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