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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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자다! 청문자가 나타났다!”
인추산 능선마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군웅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누군가의 입에서 새어 나온 소리는 금방 메아리로 변해 인추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불현듯 나타난 청문자.
점창의 오행진이 꺾이기 직전에 나타난 그의 무력이 황수의 벌판을 붉게 타오도록 만들었다.
적진을 단독으로 헤집으며 그야말로 폭풍처럼 전진해 나가는 청문자의 신위에 군웅들은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전율을 맛봐야 했다.
이곳에는 사천뿐만 아니라 전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는 무인들도 신분을 속인 채 두 문파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었다.
당장 눈에 들어온 자들만 하더라도 혈관음, 무정귀, 금면불마, 신산검옹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무림 어디서라도 충분히 대접받을 만큼 대단한 무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청성과 당문 역시 소속 문도들에게 엄명을 내려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지만 소수의 최정예를 파견해 황수전투를 관전하는 중이었다.
사천의 세력 판도가 변할 수 있는 중요한 일전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 무인들이 온몸을 떨며 청문자의 행보를 주시했다. 긴장으로 입술이 말라 들어갔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땀이 축축이 밴 상태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검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그것은 당문혁과 당운영도 마찬가지였다.
대적 불가의 위력. 절대고수의 힘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인가.
일인의 힘으로 전장의 판을 완벽하게 뒤집어 버리는 청문자.
그를 바라보는 당문혁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나왔다.
“점창, 진정 무섭구나. 문주님의 용화 결단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 이제야 알겠다.”
“우방에 있던 단주급 고수들이 벌써 청문자에게 일곱이나 당했어요. 무너지던 점창의 오행진이 다시 살아났으니 이 싸움은 이제 끝난 것과 다름없어요.”
“진정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칠절문이 단둘에 의해 무너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당문혁의 자조 섞인 음성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이십여 년간의 수련을 통해 쌓은 무공은 문주이자 숙부인 당청마저 인정해 줄 정도로 정심했고 스스로도 누구와 붙어도 쉽게 지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의 연환십이참은 독왕으로 불리는 당문주 당청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했으니 충분히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이제 서른.
연환십이참이 구성에 이른 순간 당청은 그를 당문의 미래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문 역사상 단 세 명만이 익혔다는 만천화우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기대 속에, 그는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칠비의 수장으로 자리 잡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소패왕이라 불러줄 때부터 사천이 비좁게 느껴졌다.
광활한 무림으로 나가 자신의 위명을 만천하에 떨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은 청문자와 운호의 무력을 견식하는 순간 산산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새삼스런 부끄러움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특히 운호의 믿을 수 없는 무력은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청문자는 공히 점창제일고수로 알려져 있었고 용화에서 이미 신검합일의 경지를 보여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충격을 감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아니었다.
칠절문의 절정고수들을 단숨에 격파한 검력.
그의 손에 쓰러진 자들은 절정에 속한 무인만 따져도 이십여 명에 달했다.
집단전으로 벌어진 전장이라 해도 혼자의 힘으로 절반에 가까운 적의 수뇌부를 잡아냈다는 건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충격은 단순히 몸에 지닌 막강한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투혼. 바로 불굴의 의지로 전장을 관장하는 운호의 투혼이 그의 마음을 옥죄었다.
성한 곳 하나 없을 정도로 망신창이가 된 몸은 금방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돈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칠절문의 병력 속에서 한 마리 성난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적진을 휩쓸고 있었다.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배산임수의 아름다웠던 경치는 사람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헉헉!”
가빠진 숨이 목구멍을 가로막았으나 운호는 검을 다시 부여잡고 전장을 응시했다.
흘러내린 피가 손을 따라 흐르다가 검극으로 향했으나 그는 손아귀에서 검을 빼내지 않았다.
우방을 휩쓰는 청문자의 분전를 확인한 후에야 운호와 운상은 전진을 멈추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오행진을 공격하는 칠절문의 병력 속으로 뛰어들었다.
더 힘을 내야 한다. 사형제들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힘들고 괴로워도 적의 칼을 자신에게 집중시켜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운호는 적진을 종횡으로 쓸고 다녔다.
운상이 그 몸으로도 용케 따르며 뒤를 엄호해 줬기 때문에 기세가 뛰어난 자들을 중심으로 적의 진형을 파괴할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점창의 힘은 청문자가 나타나 우방을 깨기 시작한 지 불과 이각 만에 폭발하며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다섯 배에 달하는 숫자의 차이 때문에 방어진을 구축해 싸움을 했을 뿐, 칠절문이 두려워 몸을 웅크렸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청문자와 운호가 좌, 우방을 휩쓸며 절정고수들을 잡아줬기 때문에 점창의 선두를 이끌던 운풍은 지체 없이 오행진을 풀고 전진을 시작했다.
남아 있는 칠절문의 병력은 아직 이백에 달했으나 점창무인이 오행진을 풀고 진격하자 오히려 수세에 몰리며 후퇴했다.
수뇌부의 부재.
그리고 전장을 휩쓰는 절대고수들의 존재가 그들의 가슴에 두려움을 심어주어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균형이 무너지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 되었다.
일방적인 도륙.
끝까지 저항하던 무인들이 하나둘 칼을 떨어뜨리자 칠절문의 남아 있던 백여 명의 무인도 거의 같은 시각에 자신의 병기를 접었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전쟁이다.
무인으로서 문파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싶었으나 그들에게는 간절히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가족이 있었다.
그랬기에 눈물을 흘리며 피로 물든 대지에 무릎을 꿇고 적을 향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전왕은 칼을 빼 들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청무자의 기세를 확인한 순간 쉬운 싸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말도 안 되는 사실이다.
다 쓰러져 가는 문파 점창의 일개 장로가 무림십왕의 일인으로 불리는 자신과 맞상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랬기에 단숨에 목숨을 끊어놓고 전장을 관장하며 청문자를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청무자가 검을 꺼내는 순간 온몸으로 다가서는 검기의 비늘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절대고수의 신위.
청무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와 기세는 십여 년 전 우연히 만난 검왕의 것과 흡사했다.
서로 간의 기파만 확인한 채 인사하고 헤어졌지만 승부를 본다면 이긴다는 장담을 하지 못할 만큼 그의 기세는 대단했었다. 그런데 청무자가 그런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너무 궁금해 물었으나 그는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긴, 이 마당에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 대답은 칼을 꺼내 그의 미간을 겨누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청무자의 눈이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한과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그 고통이 살을 바르고 뼈를 녹여 미친 세월을 살아가도록 만들었음을.
그런 세월을 뛰어넘어 검로의 끝을 봤으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그의 깊게 침잠된 눈은 붉은색 투지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왕은 천천히 허리를 접었다. 죽음을 각오한 수십 년의 수련 끝에 불가능을 뛰어넘어 절대의 경지에 들어섰음을 알게 되었으니 적으로 만났음에도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강자에 대한 예의.
혼과 신을 검에 담은 청무자는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었다.
무려 한 시진에 걸친 사투.
전왕과 청무자는 황수분지의 초입에서 시작한 싸움을 지천강변까지 이동시켰다.
칠절문도 점창의 무인들도 그들의 싸움을 방해하지 않으려 했으나 집단전의 힘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지천강변으로 밀어내 전장에서 이탈시켰다.
지독한 싸움 속에서도 전왕의 눈은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속의 오욕을 모두 잊어버린 듯 그는 오직 청무자의 검을 따라 춤을 추었다.
문파를 세웠으니 사람들은 그를 종사라 불렀다.
혈육은 아니었으나 혈육처럼 지내던 의동생들과 사천을 종횡했고, 천하를 꿈꿨다.
즐거운 삶이었다.
사내로서, 무인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지내온 인생이었으니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고난과 역경의 세월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은 영광을 얻기 위한 길이라 생각하며 기꺼이 괴로움을 감내했다. 그런 세월을 거쳐 사천의 일각을 지배하는 문파를 건설했고, 무인으로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피가 흘러 개천을 이루었고, 수많은 이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분지를 가득 메웠으나 역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인이란 어차피 죽고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자니 전장에 흐르는 비릿한 혈향을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향기로 여기며 살아왔다.
점창의 무인들이 사방을 에워싸며 다가왔으나 전왕은 그들을 무시하고 마지막 내력을 끌어올려 청무자를 향해 뇌전도법을 펼쳤다.
우르릉!
파천도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공간 속에서 뇌전을 만들어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번개가 생성되어 청무자가 뿜어낸 부챗살 검기의 물결과 연속으로 충돌했다.
쾅! 쾅! 쾅!
굉렬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붙었다 떨어지며 삼 장을 벌려 섰다.
두 사람은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억지로 참으며 서로를 노려봤다.
벌써 한 시진이 넘도록 전력을 다해 부딪쳤기 때문에 전신은 상처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들었다. 내력은 고갈될 대로 고갈되어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전왕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온전한 무력을 지녔다 해도 이렇듯 많은 점창무인이 포위하고 있다면 벗어날 길이 요원한데 지칠 대로 지쳐 있으니 황수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전왕 역시 바라는 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보시오, 청무자.”
“헉헉! 말해!”
“당신, 많이 지쳐 보이오.”
“크크크, 나만 지쳤단 말이냐?”
“그럴 리가 있겠소. 헉헉, 나 역시 이제 다리가 잘 떨어지지 않는구려.”
청무자의 반문에 전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은 온통 땀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저기 찢겨진 옷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의 칼을 지탱한 채 간신히 시선을 들어 먼 곳을 바라봤다.
“내 형제들이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저기 저곳에 뒹굴고 있구려. 이제 나도 가고 싶으니 멋지게 보내주시오.”
“칼을 내리겠다는 뜻이냐?”
“그렇소. 당신을 이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마지막 순간까지 원 없이 칼을 휘둘렀으니 후회는 없소.”
“그렇게는 못한다.”
“왜 못하오?”
“무인으로서 승부를 보지 않는 죽음은 치욕이 될 것이다. 그대는 마지막 절초를 펼쳐라. 나 역시 전력으로 그대에게 회풍을 보여주마.”
“늙은 뼈마디를 상하게 하고 싶소?”
“살 만큼 살았으니 죽음은 두렵지 않다. 하나 이대로 너를 보낸다면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 것 같구나.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러니 그대는 칼을 들라.”
“푸하하,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구려. 좋소, 원한다면 기꺼이 상대해 주리다.”
생각을 고쳐먹은 전왕이 자신의 파천도를 끌어올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노안에 담긴 웃음이 참으로 맑았다.
마치 푸른 하늘처럼.
전왕은 칼을 끌어올린 후 몸을 틀어 자세를 잡은 청무자를 향해 뇌전도법의 최후 초식, 금마사풍(金馬社風)을 펼쳤다.
삼 장을 격하고 도약하며 마지막 숨결 속에 남아 있는 내력까지 뽑아내어 칼을 뿌렸다.
사람에게는 원천진기가 있고, 절대고수는 아무리 지쳐도 최악의 순간을 대비해 단전 한 곳에 일정의 내력을 갈무리해 놓는다. 전왕은 그 모든 내력을 하나하나 끌어내어 파천도에 담아 청무자를 향해 도약했다.
하늘에서 붉은 번개가 미친 듯 떨어졌고, 공기를 찢어발기는 뇌성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과연 명불허전. 무림십왕에 포함된다는 전왕의 마지막 일격은 오 장을 격하고 포위하고 있는 점창무인들을 밀어내 고스란히 청무자의 전신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린 듯이 서 있던 청무자의 신형이 움직인 것은 전왕의 칼에서 번개가 쏟아져 나올 때였다.
검기의 회전과 중첩.
중첩이 중첩을 낳고 원과 원이 서로 싸고돌며 번개를 향해 폭사되었다.
원형의 검기는 륜이 되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사방에서 내려오는 번개를 잡아먹으며 곧장 전왕을 덮쳤는데 수많은 충돌이 있었음에도 이전과는 다르게 어떠한 소음도 발생하지 않았다.
소음은 없었지만 충격의 여파는 컸다.
충돌된 기파는 사방을 휩쓸며 돌풍을 만들어냈고, 삼 장의 범위를 완전하게 초토화시켜 완벽하게 빈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왕은 바닥에 누운 채 숨을 헐떡거리다가 기침을 하며 피를 게워냈다.
그의 옆구리는 반이나 갈라져 내장이 끊어진 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왼팔은 잘려 바닥을 뒹굴었고, 검에 찔린 목구멍에서도 피가 계속해서 솟구쳤다.
그럼에도 그는 반대쪽에 쓰러져 있는 청무자를 확인한 후 칼을 지탱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 후 푸른 하늘을 우러러 미친 듯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죽기 좋은… 날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