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52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52화
운호의 대답에 한설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어느새 대화를 멈춘 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성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점창에 대해 자꾸 물었기 때문에 점창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자신이 마검이란다.
믿겨지지 않는 말을 접하면 사람은 잠시 당황하고, 곧이어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들 역시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완벽하게 다른 탐색.
그들이 들은 정보에 의하면 마검의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라 했으니 사내의 나이와 비슷하다.
마지막 싸움은 의빈 외곽에서 벌어진 구룡단과의 충돌이었다.
그 후 행방이 묘연해졌기 때문에 칠절문에서는 일곱이나 되는 경로를 뒤지느라 난리가 난 상태였다.
그중 한 경로가 이곳 자공이다.
따라서 마검이 자공에 나타난다고 해서 전혀 이상하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내는 몇 가지 미심쩍은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마지막 의빈 싸움에서 마검은 동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지금 혼자였다.
둘째, 추적당하는 자가 이렇게 버젓이 나돌아 다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셋째, 고수의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아무런 내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내력이 아예 없거나 내력을 완벽하게 갈무리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아무리 마검이라 해도 젊은 나이에 이토록 완벽하게 숨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넷째, 마검은 황룡단의 사문두저진과 구룡단과의 대결에서 엄청난 부상을 당했는데 이자는 멀쩡하게 걸어 다닌다.
의심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셋이 운호를 바라보며 순식간에 공감대를 형성하며 분석한 내용이다.
그랬기에 인사만 하고 지금까지 말을 붙이지 않던 백건의 얼굴에 슬며시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초면에 농담이 심하군. 우리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당신, 말이 짧아졌구려.”
“나는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하오배에겐 말을 올려주지 않는다.”
“왜 거짓이라 생각하지?”
“마검은 중상을 입고 사라졌다. 지금쯤 그는 어딘가에서 상처를 치료하느라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 분명한데 멀쩡한 모습으로 마검이라 사기를 치니 얼마나 가로소운가!”
“부상이라……. 그렇지. 부상을 입었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을 이리 크게 키우는 이유가 뭐냐? 그만 조용히 하고 밥이나 먹어라.”
마침 운호가 시킨 음식과 한설아 일행이 시킨 음식이 한꺼번에 소녀들의 손에 들려오는 걸 본 백건이 싸늘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운호를 시정잡배 취급하고 있었다.
서서히 시작된 분노가 머리 꼭짓점에서 빙글빙글 돌았으나 운호는 간신히 참아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성질부리는 것처럼 멍청한 놈이 없기 때문이다.
“좋소. 배고프니 일단 식사 먼저 합시다. 그러고 나서 증명을 해주겠소.”
서로 기분이 상했으니 식사가 즐거울 리 없다.
한설아는 자신의 질문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에 얼굴 가득 근심을 매단 채 젓가락을 놨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얼굴만 잘생긴 사내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내력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지만 무력만 갖춰진다면 천하의 기남자란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형인 백건은 청풍팔검에 속하는 절정의 무인이다.
무력으로 보면 그녀와 비교할 수 없는데 그마저 운호의 말을 거짓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사형마저 운호의 몸에서 어떠한 내기도 느끼지 못했다는 걸 의미했다.
“휴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저 간단하게 농담이었다고 말하면 모든 게 해결된 텐데 운호는 고집을 꺾지 않고 버텼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식사를 모두 마치고도 계속해서 시인하지 않는다면 성격이 대쪽 같은 사형들은 그를 그냥 두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먼저 손을 써서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소협, 식사를 다 하셨나요?”
“그렇소.”
“그럼 먼저 가세요. 저희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끼리 할 이야기도 있으니 자리를 비켜주시면 고맙겠어요.”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 모양이오. 그렇지 않아도 일어서려 했소.”
“죄송해요. 먼저 오셨는데 무리한 부탁을 해서.”
“별말씀을.”
한설아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자 운호가 마주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백건이 서늘한 눈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그는 한설아의 의중을 눈치채고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은 채 남은 음식을 먹었다.
문제는 운호였다.
이대로 떠나면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을 텐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증명을 하겠다고 말했으니 가기 전에 보여드리리다. 부상당한 걸 가지고 시비를 걸었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구려. 소저께서는 나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오.”
운호는 말을 끝내고 천천히 자신의 상의를 벗었다.
남자가 상의를 벗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렇기에 한설아를 비롯해 청성의 무인들은 운호의 행동을 말리지 못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면 왜 말리지 못했겠는가.
하지만 운호의 행동은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 일이고, 그다음 눈에 들어 온 충격적인 장면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사내의 상체에 새겨진 수많은 상혼.
마치 몸에 지도를 그려놓은 것처럼 운호의 상체에는 수많은 상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운호는 백건이 상처를 확인하는 걸 보고 천천히 옷을 입었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걸로 의심이 풀렸으면 하오. 그대의 무례함은 한 소저의 도움을 감안해 참는 것으로 하겠소. 하나 다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한다면 그때는 당신들이 말한 마검이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 똑똑히 알려주겠소.”
용화.
청문자가 당문주를 만나기 위해 떠난 이틀 동안 당문의 정예와 점창삼군은 서로 진형을 만들어 대치하며 꼼짝하지 않았다.
회담의 결과에 따라 서로의 죽음을 원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긴장과 침묵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막사에 운곡이 들어선 것은 저녁을 마치고 한참이 지난 술시 무렵이었다.
그곳에는 운청이 앉아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청문자가 자리를 비운 지금 점창삼군을 이끄는 사람은 점창십삼검의 운청이었다.
풍운대를 맡고 있는 운곡과는 같은 운자배를 써서 사형제지간이었지만 나이로 따진다면 사숙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왔느냐. 앉거라.”
“예, 사형.”
“너도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운상이 놈들의 뒤에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운상의 무력이 그 정도로 강했단 말이냐?”
“소문에는 과장이 따른다고 봅니다. 아마 사실은 소문과 다를 것입니다.”
“그렇겠지. 나도 그럴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세밀해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그만큼 운상의 움직임이 강력했다는 것이겠지. 얼마나 놈들을 괴롭혔으면 마검이라는 명호까지 받았을까.”
운청은 말하면서 기꺼운 웃음을 내보였다.
비록 이곳이 전장의 한가운데지만 멀리 사천의 한복판에서 점창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사제를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건 운곡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서둘러야 합니다. 중상을 입었다고 하니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운호겠지?”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구룡단과 싸울 때 두 명이었다고 하니 운상이 운호를 찾아낸 모양입니다.”
“그렇다며 더욱 서둘러야겠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만약 협상이 깨지면 이곳도 험악한 싸움을 해야 될 텐데요.”
“사숙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운호를 구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떠나셨다. 내일이면 돌아오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아침이 밝는 대로 움직여라.”
“사형, 그렇다면 제가 둘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나머지는 혹시 모르니 남기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셋이서 괜찮겠느냐?”
“염려 마십시오. 저희는 마검을 키워낸 풍운대 아닙니까.”
운호는 미리 주문해 놓은 구운 오리고기를 봉투에 담아 의방으로 돌아왔다.
의방에서도 밥은 준다.
하지만 짜고 매운 음식을 배제하고 심심한 반찬만 나오기 때문에 먹기가 곤혹스러워 운상은 벌써부터 죽는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손에 오리고기를 들고 온 운호는 그를 기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야, 이왕 가져오는 거 한 마리 더 해오지 그랬어!”
“인마, 그거 사니까 돈이 딱 떨어지더라.”
“뭔 소리야?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줬는데. 내 전낭에 있던 돈의 반이 넘어.”
“은 다섯 냥이?”
“그게 얼마나 큰돈인데 다 써? 너 기루에 갔었냐?”
“밥만 먹고 왔어. 사정이 있어서 조금 비싼 데서 먹었지만 말이야.”
“도대체 얼마나 비싼 집에서 먹었기에 한 끼 식사 값으로 은 다섯 냥을 날려?”
“사정이 있었다니까.”
“그러니까 무슨 사정?”
운상의 닦달에 운호는 입맛을 다시며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 줬다.
천인로에서 용 문신 편자를 만나 협박을 당한 일과 한설아의 도움을 받은 일, 그리고 천지객잔에서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말하자 운상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야, 분명 청성의 한설아라고 했지?”
“맞아.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인마, 너 그 여자가 누군지 몰라? 청성일미야. 못 들어봤어?”
“난 처음 들어보는 명호다.”
운호가 뻔뻔한 얼굴로 대답하자 운상은 쪽쪽 빨아 먹던 마지막 다리뼈를 팽개치고 엉덩이를 밀어 바싹 다가왔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마리를 해치웠는데 아쉽다는 표정을 지우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안 예뻤어?”
“예뻤지. 그것도 무척.”
“얼마나?”
“눈이 부시더라. 후광. 알지, 후광?”
“에잇! 그래서 나도 같이 가자고 했잖아. 그렇게 예쁜 여자를 이제 어디 가서 봐. 책임져!”
“얼씨구.”
“이런 놈한테만 그런 여자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뭐냐고. 나같이 성격 좋고 자상한 남자한테는 코빼기도 안 보이면서.”
“너 살 만하냐?”
“왜?”
“이제 가야 되잖아.”
“내일 아침이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청문 사숙께서 용화로 돌아오시면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거야. 그전에 우린 조천을 우회해서 감락으로 가자.”
“거긴 왜? 본진과 합류 안 해?”
“뒤로 돌면서 적의 후진을 치자고. 사천 남부를 횡단하면서 놈들의 후미를 박살 내는 거지. 그리 되면 앞뒤에서 압박을 당하게 될 테니 환장할 거다.”
“이놈 이거 마검이란 명호를 얻더니 더욱 호전적으로 변하네.”
“크하하!”
“어쭈? 웃음도 바뀌었어. 그게 마검다운 웃음이냐?”
“어때, 멋있어?”
“멋있긴 뭐가 멋있어? 촌스러움의 대명사다.”
“자식, 부러운 모양이네.”
“나에 대해선 전혀 말 안 해? 뭐 천검이라든가 폭멸검, 환우검 같은 이런 명호 안 지어주더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