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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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85화
한설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정문객잔으로 간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운호와 한설아가 의방을 나서자 운상과 운여는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객잔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운호는 밖에서 기다리며 귀신같이 나타나 뒤를 따라온 친구들을 향해 뒤늦게 인상을 썼다.
“너희, 나 감시했냐?”
“감시는 무슨, 저번에 왔을 때 네가 오늘이면 한 소저가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시간 맞춰 왔을 뿐이다.”
“내가 언제?”
“나도 들었어. 그러니까 시비 걸지 마.”
운상에 이어 운여까지 나서자 운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두 놈이 한꺼번에 똑같이 주장하자 헛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없었다.
한설아가 언제 일어날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는데 누구한테 말한단 말인가.
이 두 놈은 미리 입을 맞춘 게 분명했다.
“솔직히 불어. 너희, 내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운여야, 얘가 오늘이라고 말 안 했나?”
“흐흐, 그런가?”
“그럼 우리 오늘 어떻게 온 거냐?”
“뭘 어떻게 와. 대충 시간이 된 것 같아 그냥 와본 거지. 그랬더니 떡하고 행장 차림으로 나와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잖아. 그러고 보면 운호는 정말 착해.”
“얼씨구!”
아주 둘이 죽이 척척 맞았다.
그대로 놔뒀다가는 이놈들은 언제까지 농담을 이어갈지 몰랐다.
그랬기에 운호는 표정을 바꾸며 질문했다.
“어떠냐,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져 가는 중이야. 청성에서는 공식적으로 당문의 제안을 거부했다.”
“아마 당문은 청성이 거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당문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어.”
“어떻게?”
운상에 이어 운여가 보충 설명을 하자 운호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당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전쟁의 시기가 당겨진다는 걸 의미한다.
“당가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천문학적인 돈을 풀어서 낭인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낭인을?”
“돈은 귀신도 부린다는 소리가 있잖아. 무림에는 조직에 속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검귀, 도귀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지. 당문은 사천남부를 장악해서 번 돈으로 그들을 사고 있다.”
“청성이 갑갑해지겠군.”
“그렇지만 청성도 만만치 않아. 점창과 달라서 그들은 최근 백 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기 때문에 소속 무인들 숫자도 많고 속가의 세력도 대단하다. 아마 낭인을 끌어모은 당문이라 해도 청성을 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운상이 바닥에 대충 그려진 사천 지도에서 청성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그었다.
칠절문의 영역을 흡수했기 때문에 당문이 차지한 지역은 청성보다 컸으나 그럼에도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운여가 사천 지도 옆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리며 운상의 설명을 보충했다.
“문제는 풍검문이겠지. 아마 당문은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 같아. 풍검문을 사돈으로 맞아들인 것은 청성과의 전쟁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거다.”
“운여, 속단하면 안 돼.”
“타당성은 충분해. 나는 당청이 그랬으리라 본다.”
“풍검문은 쉽게 전쟁에 가담하지 못할 거다.”
“왜?”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운여가 얼굴을 찡그리자 운호가 이번에는 청성의 영역 위쪽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렸다.
그 동그라미는 청성 본산과 아주 근접하게 그려졌는데 서로 이어진 것처럼 가까웠다.
“풍검문이 참전하면 아미파가 나서기 때문이지. 청성과 아미는 전통적으로 우의를 다져온 문파이니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되면 사천 전체가 난리가 나겠군.”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쟁의 승패는 정보전이 될 수밖에 없다. 청성은 온 힘을 기울여 풍검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어야 치명상을 막을 수 있어.”
“그렇겠군. 기습을 당하지 않으려면.”
운호가 눈을 지그시 내리깔며 말하자 운상이 지체 없이 동의를 해왔다.
이제 분석할 내용은 거의 분석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들이 하나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청성도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겠구나.”
“당문과 마찬가지야. 청성은 오랜 시간 사천 북부를 장악한 패자였다. 그들도 만만치 않은 자금력을 가지고 있으니 병력 충당에 박차를 가할 게 분명해.”
“우리와 칠절문의 싸움과는 완전히 다른 싸움이 되겠어.”
“벌어지게 된다면 그럴 거다. 시작되면 사천이 모두 피바다로 변할 수도 있어. 자칫 풍검문이나 아미파까지 참전하게 되면 강북 전체가 시끄러워지고.”
“그리 되면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빨리 표물을 찾아 당문의 의도를 막는 게 최선의 방법일 거야.”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해봐야지.”
세 사람이 분석한 내용은 거의 일치했다.
점창과 칠절문은 지닌 무력만으로 전쟁을 치렀지만 청성과 당문의 싸움은 사천 전체를 전장으로 몰아넣는 거대한 싸움이다. 두 문파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원군까지 가세한다면 전쟁은 사천에서 확산되어 강북으로 치닫게 될지 몰랐다.
현재의 무림 세력 분포는 누군가가 기름만 붓는다면 언제든지 타오를 만큼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운호 일행이 밖에서 숙의를 할 동안 정문객잔의 밀실에서도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한설아와 백건이었다.
백건은 아직 왼 손목에 하얀 붕대를 매고 있었는데 괴인들에게 당한 상처가 완벽하게 완쾌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두 사람의 표정은 굳어 있고 음성은 신중했는데 주로 묻는 것은 한설아였고 대답하는 것은 백건이었다.
“정말 전면전을 벌일까요?”
“그럴 가능성은 이제 팔 할이 넘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오랜 시간 기다려 온 것 같구나.”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많은 피가 흐를 텐데 그들은 왜 전쟁을 원할까요?”
“무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사천의 패자는 언제나 청성이었어. 그들에게는 아마 그것이 치욕으로 여겨졌을 거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업신여긴 적이 없잖아요.”
“우리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수없이 당하고 느꼈을 것이다. 그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느냐.”
“이길 수 있을까요?”
“당문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난다 긴다 하는 낭인고수들이 대부분 그들에게 포섭되었고 수많은 특수병기가 미리 제작되어 실전 배치되었다.”
“그럼 어쩌죠?”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천하에는 전쟁을 찾아 떠도는 자가 수없이 많고 그들 중에는 명호만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강한 자들도 숱하다. 전운이 감돌게 되면 그자들은 분명히 움직일 것이고, 우리 역시 그런 낭인들을 포섭할 생각이다. 또한 무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청우회가 소집되었다. 당문이 원한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게 장문인의 의지다.”
“아, 청우회마저…….”
백건이 청우회를 거론하자 한설아의 안색이 급격히 흐려졌다.
청우회는 청성과 인연이 있는 무림명사들의 모임을 말한다.
청성은 오 년에 한 번씩 그들을 본산으로 초청해서 우의를 다지는 자릴 마련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삼백에서 오백에 달하는 무인이 참석했다.
청우회에 속한 무인 중 상당수는 무림에서 쟁쟁한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이었다.
한설아의 안색이 흐려진 것은 청우회의 소집이 무얼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명운을 건 전쟁.
청우회까지 참전시킨다는 것은 청성이 이번 싸움을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 그것도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는 파멸도 각오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백건의 얼굴은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결의에 찬 표정이다.
“네가 귀주로 가는 것에 대한 허락이 떨어졌다. 장문인께서는 네 안위를 무척이나 걱정하시고 계신다. 그러니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마검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거라.”
“그럴게요. 그분이 표물의 행방에 대해서 단서를 잡았다고 하니 잘하면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리 되면 이 전쟁도 막을 수 있겠죠?”
“명분을 청성으로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전쟁을 피하지는 못할 거다. 표물은 핑계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찾아라. 표물을 찾게 되면 천하가 심정적으로 청성의 편을 들게 된다.”
“표물의 정체를 가르쳐 주세요. 그게 뭐죠?”
마침내 한설아가 지금까지 참아온 질문을 던졌다.
표물을 찾으러 간다면서 표물이 뭔지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사문에서 비밀로 취급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건은 당연한 질문임에도 침묵을 지킨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도 이제 말해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건 그 비밀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입이 열린 것은 한설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독촉하기 위해 움찔했을 때였다.
청성 수뇌부만 알고 있다는 비밀.
비원주까지 모르게 한 표물의 정체는 한동안 망설이고 망설이던 백건의 입을 통해 어렵게 세상으로 나왔다.
“…검이다.”
“검이라뇨?”
“천문상단이 보낸 것은 막사검이었다.”
“말도… 안… 돼…….”
한설아는 너무 놀라 입을 열고 다물 줄을 몰랐다.
사람은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실을 듣게 되면 얼이 빠진다.
막사검은 무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두 개의 보검 중 하나이다.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검.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스스로 운다는 명검 중의 명검으로 막사검을 가진 자는 천하를 제패한다는 전설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막사검의 제작은 칠황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백 년 전 뛰어난 장인이던 간장은 제왕의 명을 받아 두 자루의 검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의 이름을 딴 간장검이고 다른 하나가 그의 부인 이름을 딴 막사검이었다.
간장검과 막사검이 나타난 것은 무림 역사상 단 일곱 번뿐이었다.
그때마다 무림은 피로 점철된 전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무인들이 보검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간장과 막사의 출현은 언제나 무림에 재앙을 불러왔는데 그때마다 천하에는 피가 흘러넘쳤다.
두 개의 보검이 완전하게 모습을 감춘 것은 백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 당시 홀연히 나타나 수많은 무인의 피를 삼킨 간장과 막사는 어느 날 문득 황룡과 청룡으로 변해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물론 사실이 아닐 것이다.
전설은 검이 용으로 변했다고 전했으나 사람들은 검의 행적이 너무나 완벽하게 숨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과장이라 믿었다.
그런 막사검이 나타났다고 하니 한설아가 기절할 듯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백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건의 이야기는 너무도 중요해서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매, 절대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라도 발설하면 안 된다. 막사검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무림이 알게 되면 거대한 혼란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당문이 막사검을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나 그들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복수에 눈이 멀어 무리수를 둔 것 같은데 그들로 인해 무림 전체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혹시 막사검을 가져간 괴인들의 정체는 알아냈나요?”
“알아내지 못했다. 본산 병력의 반이 내려왔고 광원 근처의 속가를 모두 동원했으나 놈들의 행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신비한 자들이에요. 막사검이 그들의 손에 들어갔으니 걱정이에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사실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절대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
“점창 사람들에게도 말하면 안 되나요?”
“당연한 말이다.”
“그들은 저를 도와 표물을 찾으러 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마저 속이란 건가요?”
“어쩔 수 없다. 지금의 무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이니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른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알겠어요.”
“할 일이 너무 많아 나는 그만 일어나야겠다. 부디 몸조심하거라.”
“사형도요. 그리고 아버지께 걱정하지 말라 전해주세요.”
“그러마.”
백건은 서둘러 일어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설아를 보다가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한설아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은 마검 일행을 따라 귀주로 떠나지만 방금 그녀와 이별한 백건은 피가 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짧은 이별이 되기를 바랐다.
귀주에서 돌아왔을 때 웃으며 마중하는 백건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