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83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83화
운호의 이야기가 울음을 멈추게 만들었으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목소리는 떨렸다.
“소협을 원망해서 운 게 아니에요. 모든 일은 저로 인해 생긴 것인데 어찌 당신을 탓하겠어요. 강호를 살아가다 보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러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상황으로 따진다면 그녀의 말이 백번 옳다.
일부러 보고 싶어 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댄 것이다. 어찌 그의 잘못이랴.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일 뿐.
얼굴을 돌린 채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용의 당당함과 다르게 비에 맞아 꺾인 한 떨기 수선화처럼 애처로웠다.
여자라는 존재는 참으로 특별하다.
눈에 슬픔을 가득 담고도 입으로는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화가 나면 화가 난다 말해야 알아들을 텐데 여인들은 반대로 말하거나 아예 입을 닫아버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운호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자 당운영과의 아픈 이별이 떠올라 스르륵 눈이 감겨왔다.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픈 기억이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설아가 아파하는 이유를 왜 모를까.
운상이 거품을 물며 떠들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은 이전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애써 모른 체했다.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당운영을 그는 아직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다.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준 여인.
그녀의 밝은 웃음과 눈물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어떻게 다른 여인의 마음을 금방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운상과 운여는 아무런 연락 없이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추적을 해보겠다고 하더니 꽤 먼 곳까지 이동한 모양이다.
한설아는 그동안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운호는 식사 때마다 그녀를 부축해서 미음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여러 번 살을 맞대게 되자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 열기가 피어올랐다.
막고자 해서 막아질 수 없는 본능이었다.
한설아가 오랜만의 침묵을 깨고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연 것은 운호의 품에 안겨 점심을 마친 후였다.
“저를 눕히지 말고 부축해 주세요.”
“왜 그러시오?”
“심법을 운용하려 해요.”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명문이 보유한 심법에는 상처를 치료하는 요상법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녀는 요상법을 운용해서 상처를 치료할 생각인 것이다.
운기가 가능하다면 한설아의 외상은 범인이 상상하지 못할 속도로 아물게 될 테지만 지금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상처는 워낙 커서 혼자 가부좌를 틀기에는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하는 게 어떻겠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없으니 힘들더라도 해야 돼요. 도와주세요.”
한설아가 성한 오른팔을 든 후 머리를 곧추세우려 애를 썼다.
기어코 하겠다는 의지이고 행동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운호는 그녀가 옆구리에 입은 상처 때문에 허리를 움직일 수 없어 힘겨워하자 고개를 흔든 후 슬며시 뒤로 돌아 등을 받쳐주었다.
“으… 음.”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억지로 움직이자 극렬한 고통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주 느린 속도로 그녀는 가부좌를 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무척이나 힘든 움직임이었으나 그녀는 끝끝내 멈추지 않았다.
운호의 손이 얼떨결에 그녀의 허리를 잡은 것은 고통으로 인해 균형이 무너지며 상체가 휘청했을 때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꼭 그 짝이다.
밥을 먹이기 위해 그녀를 기대게 한 것도 힘들었는데 이제 허리까지 붙잡았으니 오금이 다 저려왔다.
그럼에도 운호는 그녀의 허리가 버틸 수 있도록 오히려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어차피 시작한 것, 그녀가 요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금으로써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한설아는 심법을 운용하면서 많은 땀을 흘렸고, 자꾸 몸이 멈칫거리며 흔들렸기 때문에 운호는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만약 심신이 약화된 상태에서 기혈이 엉키게 된다면 주화입마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녀가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운호의 손 때문임이 분명했다.
뒤에서 안다시피 한 운호의 팔은 그녀의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집중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남정네의 가슴이 등에 밀착되고 허리마저 붙잡혀 있으니 한설아의 입장에서는 정신을 잃지 않는 것만 해도 용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꿈틀거림을 멈추고 반각 만에 몰아일체의 경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휴우…….”
저절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이마에는 땀이 연신 솟아났고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은 축축이 젖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손을 떼지는 못했다.
심법에 집중하고 있는 이 순간 자칫 손을 떼게 되면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운호는 그녀의 심법 운용이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한설아가 눈을 뜬 것은 거의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백지장처럼 창백하던 그녀의 얼굴은 청성의 독문심법 청명신공의 운기가 끝나자 완연하게 붉은색을 띠었다.
그렇다고 단 한 번의 운기로 그녀의 상세가 대폭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숨을 몰아쉰 한설아가 다시 휘청하며 운호의 품으로 쓰러진 것은 상처의 경직과 고통 때문이었다.
“괜찮으시오?”
“네, 괜찮아요. 나 좀… 눕혀줘요.”
품에 안긴 자세에서 한설아가 운호를 바라보았다.
처음이 힘들 뿐 여러 번 같은 일이 반복되면 익숙해지는데 그것은 한설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토록 얼굴을 붉히더니 이제는 운호의 손이 허리에서 떨어진 것만으로도 여유를 되찾을 만큼 편안한 목소리로 부탁을 해왔다.
운호가 자세를 바꾸어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히자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취한 것에 따른 고통 때문임이 분명했다.
자신 역시 몇 번이나 당해본 일이기에 운기가 끝난 후의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누구의 도움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저,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으면 좋아질 거요. 팔다리에 힘을 빼고 최대한 편하게 몸을 늘어뜨리면 고통이 덜할 겁니다.”
“잘 아시네요.”
“나도 소저처럼 여러 번 누워 있었소.”
“정말인가요?”
“그렇소.”
“상처가 완쾌되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나 같은 경우는 운기를 시작하고 나서 삼 일 만에 일어났소.”
“무슨… 그런…….”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린 상태에서도 그녀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중상을 삼 일 만에 치료했다는 소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기에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운호의 얼굴을 맥없이 바라봤다.
웬만해서는 농담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갑자기 그런 농담을 하는지 살피는 시선이다.
하지만 운호의 얼굴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못 믿으시오?”
“말이 안 되잖아요.”
“뭐, 못 믿는다면 할 수 없지만 정말 그랬소.”
“그럼 나도 삼 일 후면 일어설 수 있겠네요?”
“그거야…….”
빤히 쳐다보며 한설아가 말하자 이번에는 운호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사람마다 특성이 다르고 입은 상처의 경중이 다르다.
또한 심법의 요상 능력에 차이가 있을 터이니 똑같은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씩 예를 들며 설명하기에는 한설아의 눈빛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눈빛은 이틀이 지난 지금 점점 더 선명하게 바뀌고 있었다.
현명하고 착한 여자란 건 그녀의 행동이 말해준다.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어 운호의 곤혹스러움을 해소시켜 주었다.
“혹시 친구 분들 연락이 없었나요?”
“없었소.”
“금방 오실 줄 알았는데 많이 걸리네요.”
“곧 돌아올 테니 잠시만 참으시오.”
“제가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소협께서 저에 대한 소식을 청성에 알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어찌하면 되오?”
“광명로에 나가면 정문객잔이 있어요. 거기 주인에게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주시면 청성으로 소식이 갈 겁니다.”
“그렇다면 내 그리하리다.”
운호는 의방에서 나와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광원의 중심대로인 광명로를 향했다.
정문객잔은 광명로의 끝 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 한산했다.
천천히 걸어 산대에 서자 뚱뚱한 삼십 대 장한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주인은 어디 있소?”
“내가 주인인데 왜 그러시오?”
“잠깐 시간을 내주시오. 전해줄 말이 있고 물어볼 말도 있소.”
“내가 자리를 비우면 계산은 누가 한단 말이오? 여기서 말하시오.”
주인은 운호의 등에 매달린 검을 보고도 조금의 두려움도 내보이지 않았다.
기세를 슬쩍 끌어올렸는데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건 사내가 단순한 객잔 주인이 아니란 뜻이다.
“일미에 대한 소식이오. 그래도 자리를 옮기지 않으시겠소?”
“일미? 그대는 누구요?”
“점창.”
“음, 이쪽으로.”
주인은 오른쪽 문을 가린 발을 들어 올린 후 눈짓을 했다.
먼저 들어가란 뜻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문을 통해 좁다란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는 폭이 반 장밖에 되지 않을 만큼 좁았는데 열 발자국 걷자 제법 커다란 공터가 나왔다.
공터는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크기는 다섯 평에 지나지 않았다.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공터를 둘러싼 건물들의 구조를 유심히 살피고 있을 때였다.
기척.
무인의 숨소리는 언제나 기세를 동반하고 그 기파의 흐름은 고수의 귀에는 천둥처럼 들린다.
건물에는 세 명이 숨어 있었는데 기운을 숨겼음에도 미세한 기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스로 주인이라 한 사내가 운호의 면전으로 다가온 것은 기파의 흔적이 흘러나온 곳을 주시한 후 원래의 위치로 시선이 돌아왔을 때다.
그의 입은 빠르게 열렸는데 표정은 무척 급해 보였다.
“일미는 어디에 있소?”
“그녀는 서량의방에서 치료 중이오.”
“다쳤단 말이오?”
“심각한 검상이 네 군데요. 다행히 치료가 늦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소. 이제 나도 물읍시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이곳 비원을 책임지고 있는 추보승이란 사람이오.”
“청성 사람이오?”
“그렇소.”
“나는 그녀에게 두 가지를 부탁받았소. 첫 번째는 당신에게 그녀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고, 둘째는 청성의 피해와 흉수들에 관한 정보를 알아오라는 것이었소. 말해주실 수 있겠소?”
“삼 일 전 급습으로 열한 명이 목숨을 잃었소. 본산 주력 무인들이 대거 하산해서 흉수들을 추적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그들의 흔적이나 정체는 밝혀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소.”
“그렇다면 표물은 어찌 되었소?”
“무슨 표물 말이오?”
“이번 싸움의 원인은 표물 때문이었소. 그에 대한 말은 듣지 못하셨소?”
“표물이 있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오.”
“음…….”
질문은 운호가 했으나 의문을 더 많이 나타낸 건 사내였다.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원은 청성의 정보기관인데 책임자인 추보승이 표물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가장 궁금한 것이었으나 추보승이 오히려 반문하며 의문을 나타내자 운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모른다면 더 이상 표물에 대해서 떠들어봤자 괜한 분란만 만들 뿐이다.
들은 건 다 들었고 말해줄 건 다 말해줬으니 이제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기에 운호는 마지막 말을 꺼냈다.
“아마 일미는 의방에 며칠 더 있어야 될 것이오. 본산에 연락해서 빠른 시간 내에 사람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소. 나는 바빠서 그녀를 더 이상 돌봐줄 수 없소.”
모든 일은 예상처럼 되지 않았다.
비원에 다녀왔으나 청성에서는 삼 일이 지난 지금까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운상과 운여조차 깜깜무소식이란 것이다.
흉수를 추적하겠다고 나선 놈들은 오 일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의 연락조차 없었다.
답답함과 걱정으로 찾아 나설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운호는 결국 의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설아로 인해서였다.
그녀는 삼 일이 지난 지금까지 몸만 간신히 일으키는 상태이기 때문에 홀로 두고 떠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한설아는 식사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운호의 품에 안겼고, 운기를 할 때면 등을 내밀며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더욱 웃긴 것은 운호 역시 그것을 평상시 하던 버릇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인단 것이다.
습관은 이처럼 무섭다.
운호의 품에 안겨 식사를 마친 한설아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입술 위 닦아줘요.”
“어디 말이오?”
“왼쪽 입술 위에 국물이 묻은 것 같아요.”
“여기 말이오?”
“네, 거기요.”
운호가 하얀 면포를 들어 그녀가 말한 곳을 닦아주자 한설아의 입에서 애교 섞인 비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불과 며칠 만에 운호에게 알몸을 보여주었던 부끄러움을 모두 잊어버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