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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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82화
운호는 한설아가 정신을 차리자 바로 양해를 얻고 운상과 운여를 찾아 나섰다.
벌써 그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훨씬 지나 있었기 때문에 운호는 신법을 발휘해서 바쁘게 약속 장소로 움직였다.
친구들의 실력을 믿었으나 워낙 험난한 강호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조바심이 생겨났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친구들에게 문제라도 생겼다면 자신은 혀를 깨물어야 될지도 몰랐다.
삐익, 삐이익!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사방을 훑었으나 운상과 운여는 보이지 않았기에 유운신법을 펼쳐 서쪽으로 움직이며 연신 휘파람을 불었다.
내력을 실은 휘파람은 산에 있을 때부터 풍운대가 연락 수단으로 삼은 신호이기 때문에 운상과 운여가 들었다면 금방 나타날 터였다.
하지만 운상과 운여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운호는 광원 외곽을 모두 돈 후에야 신형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두 가지 중의 하나다.
무슨 일이 생겨 광원을 완전히 벗어났거나 아니면 광원으로 들어갔거나.
만약 첫 번째 경우라면 날이 밝은 후 다시 와서 면밀히 조사를 해야 한다.
싸움의 흔적부터 점창의 독문 표식이 남아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는지를 확인해서 추적해 나가야 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일은 훨씬 쉬워진다.
그냥 의방에서 기다리기만 해도 되니 말이다.
광원으로 들어와 의방에 들어오기까지 수시로 점창의 독문 표기인 오족을 군데군데 남겼기 때문에 운상과 운여가 광원에서 잠을 잤다면 날이 밝자마자 놈들은 의방으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어쨌든 두 가지 경우 모두 지금은 의방으로 돌아갈 때였다.
의방으로 돌아온 운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어차피 잠을 자기는 틀렸다.
창문을 통해 여명이 어스름하게 올라와 뿌연 빛을 슬금슬금 뿌리는 지금 잠이 들면 친구들을 맞아들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밤새 자신을 찾아 헤매었을 놈들에게 편히 잠든 모습을 보인다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았다.
천룡무상심법.
심법을 운용해서 주요 혈로 진기를 돌리자 금방 무아지경(無我之境)으로 빠져들며 단전을 빠져나온 진기가 임, 독맥을 타고 풍부, 뇌호를 넘어 강간으로 흘렀다.
막혀 있는 강간은 아직까지 철옹성처럼 덮쳐온 진기를 막아내고 있었으나 순간순간마다 해일처럼 덮치는 진기에 의해 수많은 미세 균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운호의 몸에서 빠져나온 금광 속에서 용들이 꿈틀거리며 완연하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금룡들은 천룡무상심법이 운용되면 스스럼없이 외문으로 빠져나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년 전 운문에서 수련을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뚜렷해진 상태였다.
온몸이 어느 순간 강렬한 금빛에 휩싸이고 금광 속에서 전신을 휘감으며 꿈틀거리던 용들이 순식간에 콧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러자 운호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심법을 운용한 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나 아침의 햇살이 찬란하게 창문을 비출 때였다.
밤을 꼬박 새운 피로는 찾아볼 수 없고, 그의 얼굴은 오히려 윤기가 흘러 방금 세면을 마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운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의방으로 들어서는 익숙한 기운으로 인해서였다.
문을 열고 나서자 운상과 운여가 인상을 쓰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뭐냐, 너? 왜 여기 있어?”
“그렇게 됐다. 일단 들어와라.”
운상의 통박에 운호가 씨익 웃어준 후 먼저 방으로 움직이자 그 뒤를 따라 두 놈이 들어온 후 방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아침부터 뛰어다녔는지 그들의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다.
“외곽까지 갔다 왔어?”
“그럴 수밖에 없잖아. 널 찾으려면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까.”
“고생했다. 그래도 잘 찾았네.”
“시끄럽고. 말해봐. 약속한 시간에 오지 못한 이유, 그리고 여기 있는 이유.”
“밥은 먹었냐?”
“엉뚱한 소리 한 번만 더하면 등짝을 패버린다. 너 찾는다고 우리가 어제 저녁부터 얼마나 생고생한 줄 알아!”
운여가 손을 번쩍 들자 운호가 엉덩이를 밀며 뒤로 물러섰다.
이놈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폭력 행사가 가능한 놈들이었다.
“사실은…….”
운호는 더 버티지 않고 어제 저녁 그들과 헤어진 후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추적 경로, 그리고 싸움의 흔적들, 능외쌍마와 한설아의 이야기까지.
운상과 운여는 눈을 부릅뜨고 한껏 귀를 열어놓은 채 운호의 말을 듣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결국 입까지 벌리고 말았다.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인 사실이 그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다.
“그래서, 한 소저는 어떻게 됐어?”
“안채에서 치료 받고 있는 중이야.”
“어허, 충격이 컸겠는데?”
운상이 그녀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혀를 차자 옆에 있던 운여가 운호를 쳐다봤다.
“얘기는 나눠봤냐?”
“어젯밤에 의식이 돌아왔다. 그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사과했다.”
“한 소저가 뭐라고 했냐?”
“이해한다고 하더라.”
“에라이!”
막을 새도 없이 운여의 손바닥이 날아와 종아리를 때렸다.
놈은 매우 분노한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호는 구타를 당하고도 반항하지 못하고 종아리만 문질렀다.
“이놈아, 세상에 거기서 어떻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러?”
“내가 무슨 천인공노할 짓을 했다고 그래?”
“그럼 실컷 봐놓고 미안하다고 그러면 그만이냐?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와, 미치겠네. 그럼 어쩌라고.”
운호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항하자 그동안 옆에서 지켜만 보던 운상이 나섰다.
“지금부터 내가 말할 테니 잘 들어봐. 이건 단순하게 예를 드는 거니까 알아서 잘 판단해.”
“알았어.”
“네가 어떤 음녀한테 당해서 옷이 홀라당 벗겨진 채 누워 있다고 치자. 혈도를 제압당해서 꼼짝 못했고, 상처를 입어서 온몸이 피투성이야.”
“난 절대 그런 일 안 당한다.”
“조용히 안 할래?”
“알았다. 계속해 봐.”
“그런데 천우신조로 한 소저가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서 음녀들을 단숨에 제압했어. 그런 후 너한테 다가가서 알몸의 네 몸을 구석구석 만지며 치료를 해.”
“그만해. 등판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간지러워 죽겠다.”
“넌 아무래도 한 대 더 맞아야겠다.”
운호가 손을 뒤로 돌려 등을 긁어대자 옆에 있던 운여가 나서며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운호가 뒤로 물러서자 운상이 엉덩이를 밀어서 다가왔다.
“그런데 네가 다친 곳 중에 한 곳이 하필이면 거시기 근처였어. 한 소저 입장에서는 엄청 난감했겠지. 그래도 그녀는 용기를 내서 거길 치료해 줬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시작할 때 단순 비교라고 했잖아!”
“그래도…….”
“운여야, 이놈 좀 붙잡아 봐.”
“그래, 일단 패고 보자.”
“잠깐, 잠깐! 알았으니까 말로 해!”
운상이 인상을 썼고 운여가 일어서며 다가서려 하자 운호가 두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그러자 운상이 운여를 제지하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한 번만 더 엉뚱한 소릴 하면 그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다.
“자, 이제 말해봐. 네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떨 것 같냐?”
“부끄러울 것 같다. 상상만 해도 소름까지 끼치네.”
“그렇겠지? 그런데 한 소저가 다음 날 척하니 나타나서 아무런 내색 없이 그저 치료 때문이었다고 뻔뻔하게 말하면 넌 기분이 좋았을까?”
“그거야… 안 닥쳐 봐서 모르지.”
“인마, 닥쳐 보고 안 닥쳐 보고의 문제가 아니야. 너 한 소저 앞에서 알몸 보이면 부끄러울 거라고 말했지. 여자인 한 소저는 오죽했겠냐. 너한테 알몸 보인 한 소저는 아마 죽고 싶었을 거다.”
“음…….”
“네가 한 말이 한 소저에게는 비수로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을 거야. 그러니까 넌 한마디로 왕재수고 싸가지에 밥 말아 먹은 놈이다.”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아무 소리 하지 말았어야지. 그저 그윽한 눈으로 쾌유를 빌며 옆을 지켜주는 게 최상의 방법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주워 담아.”
“좋은 방법 있냐?”
“말은 안 하겠지만 많이 아파할 거다.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한 소저 옆에 붙어 있어. 네가 말 안 하고 가만있으면 아마 한 소저가 먼저 말할 거다. 그때 잘 대처해.”
“운상아, 넌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인마, 그런 건 기본이야.”
“기본은 무슨. 웃기고 있어.”
“하여간 내 말대로 잘해.”
운호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운상이 키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운여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운호의 건투를 빈다는 듯 주먹까지 들어 보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운호가 급히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디 가는데?”
“확인해 봐야지.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어제는 날이 어두워졌고 너 찾느라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광원을 중심으로 탐문해 나갈 생각이다.”
“그럴 거라면 청성 쪽부터 확인해 봐. 일단 피해 상황부터 알아보고 놈들의 위치를 추적해야 돼.”
“염려 마라. 그런 건 우리가 잘할 테니까 넌 한 소저나 잘 보살피고 있어.”
“밥이나 먹고 가라. 배고플 텐데.”
“가면서 해결하면 돼. 시간이 지체되면 흔적을 놓치게 된다.”
“그렇겠군. 하여간 조심하고 최대한 빨리 돌아와.”
방으로 들어온 지 일각이 지났으나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고 운호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은 그녀가 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나 운호는 운상이 가르쳐 준 대로 침묵만 지켰다.
고역이다.
아무 말 없이 아름다운 여인을 지켜만 보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썹을 보면서 꼼짝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켰다.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난 것은 그로부터 일각이 더 지난 후였다.
미음을 끓여온 의녀는 문을 열자 즉시 팔을 내밀었기 때문에 얼떨결에 소반을 받아 들어야 했다.
그녀는 무척 바쁜 듯 운호에게 소반만 전해주고 부지런히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운호는 난감함에 잠시 동안 멀거니 미음 그릇과 한설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만 보았다.
막상 받아는 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저, 잠시 눈을 뜨시오. 미음이 왔으니 요기를 하십시다.”
부드러우면서도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음성이 한설아에게는 천둥처럼 들린 모양이다.
운호는 막상 그녀가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다시 한 번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음을 먹기 위해서는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녀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운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결심한 운호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녀의 눈이 급히 흔들렸으나 운호는 조심스럽게 한설아의 머리를 받친 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가슴이 무섭게 뛰었지만 운호는 모른 체 그녀가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 후 조금씩 미음을 떠먹였다.
절대고수와 싸움을 해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미음 한 그릇 비우는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고, 온몸에서 땀이 슬금슬금 새어 나와 식사를 마쳤을 때는 전신이 목욕한 것처럼 땀으로 젖었다.
그러나 더한 괴로움은 식사를 끝내고 난 후에 벌어졌다.
식사를 마친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울었기 때문이다.
“흑, 흐윽…….”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녀의 울음소리는 입안에서 억눌려져 작게 흘러나왔으나 운호에게는 천둥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그녀를 안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운상의 말을 들으면서 설마 그럴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생각은 물론, 운상이 예측한 것보다도 훨씬 커다란 슬픔 속에 있었던 모양이다.
새삼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어미 잃은 새처럼 가엽고 구슬퍼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왔다.
울고 싶은 사람은 울어야 한다.
울고 나면 응어리진 마음이 한결 풀어져 그 아픔이 조금씩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조용히 그녀의 울음을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울음을 그쳤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산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여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오. 그대의 눈물이 나의 실수로 인한 것이라면 진정으로 사과드리리다. 이제부터 그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할 테니 그만 우시오. 나는 그대가 우는 게… 싫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