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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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79화
운호가 천천히 걸어 장내로 들어선 것은 금마혈번의 붉은 깃발이 막 뽑혀 나올 때였다.
그의 흑룡검은 어깨에 걸쳐 있었고 두 눈은 장내에 있는 이십여 명의 적색 도객을 훑은 후 혈번을 향해 움직였다.
“고맙다. 와줘서.”
“으… 마검!”
혈번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도 이전 싸움에서 단황야와 눈앞에 있는 마검의 싸움을 봤다.
절대의 무력을 가진 자.
사천을 휩쓸고 다니며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으나 직접 마검의 위력을 확인했기에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랬기에 표행을 추적하며 마검 일행의 부재를 확인한 후에야 나타났는데 놈은 기다렸다는 듯 결정적인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물을 쳐놓고 기다렸다는 뜻이다.
기분은 더러웠으나 혈번은 적기(赤旗)에 힘을 가하며 눈을 부릅떴다.
혼자라면 모를까, 신마가 있고 철령대의 정예 이십 명이 같이 왔다.
비록 놈에게 대단한 조력자가 있다고는 하나 이 정도면 충분히 싸워볼 만한 전력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 마검이 두려워 표물을 포기하고 도망친다면 처참한 죽음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검도 두려웠으나 자신을 조종하는 단체의 힘은 두려움을 넘어 경이적인 것이었다.
운호는 혈번이 기세를 끌어올리며 싸움을 준비하자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싸우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잠깐, 혈번. 한 가지만 묻자.”
“뭘 말이냐?”
“당신은 언제나 혼자 다닌 것으로 아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명령을 받는 건가?”
“내가 말해줄 것 같나?”
“그럴 리가 없겠지. 하지만 생각은 해봐. 천하의 혈번을 협박해서 개처럼 부려먹는 자들에 대해서 말이야.”
“시끄럽다!”
슬쩍 건드렸더니 바로 튀어 오른다.
그만큼 성격이 다혈질이란 뜻이고 자신의 처지가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운호는 그의 눈을 노려본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혈번을 보고 마두라고 부르더군. 숱하게 많은 사람을 이유도 없이 죽였기 때문이지. 도대체 왜 사람들을 그렇게 미친 듯이 죽이는가 하고 알아봤더니 당신의 불행했던 과거가 나오더군. 당신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죽이지 않았다. 비겁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자존심을 지키며 강호를 활보했지. 그런 당신이 왜 하수인이 되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해야 될 일도 있는 법이다.”
“좋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대신 이건 대답해 줬으면 좋겠군. 광원에는 얼마나 갔나?”
“그들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만큼.”
“청성에서 지원군이 오는데도?”
“당연하다. 그 정도의 정보력도 없이 움직였겠는가. 청화전이 나섰으니 그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청화전이 무엇이냐?”
“그만하고, 검이나 뽑아라.”
혈번은 적기를 끄집어 올려 운호의 눈을 겨냥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겠다는 의지다.
아마 그것은 뒤쪽에서 냉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적의도객들로 인해서인 것 같았다.
그들은 혈번의 대화가 진행될수록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운호는 어깨에 걸쳐 놓았던 흑룡검을 천천히 끄집어 내렸다.
이제 대화는 끝났고,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야 할 때였다.
왼손 엄지로 검병을 슬쩍 튕긴 운호가 뒤쪽에서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황충과 표두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황 표두, 표사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나시오! 이 싸움은 우리가 하겠소!”
좌방과 우방에서 각기 나타난 운상과 운여가 몸을 날려 운호의 좌우측에 각기 섰다.
그들은 주춤주춤 물러서는 표사들의 전면을 가로막고 전열을 형성하는 적들을 지켜봤다.
역시 놈들은 전투부대가 맞았다.
도객들은 마치 기계처럼 움직여 일곱씩 나뉘더니 운상과 운여를 압박했다.
나머지 여섯은 혈번과 신마의 좌우를 받치며 섰는데 운호를 공격하겠다는 진형이다.
싸움은 좌측의 운상 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니다. 거의 동시에 우측의 운여가 몸을 날려 도객들 속으로 파고들며 검을 날렸으니 어디가 먼저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처음부터 굉렬한 접전이다.
흑의복면인들과의 싸움은 일방적이었으나 적색 도객들은 협공의 진수를 선보이며 운상과 운여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은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다.
선두에 선 혈번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는 운호의 검이 뽑히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해서가 아니다.
고수의 검은 오히려 발검할 때가 가장 위험했기에 혈번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충혈된 눈으로 운호의 몸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흑룡검을 천천히 빼 들었다.
미리 알고 기다린다면 그에 맞춰 상대해 줄 생각이다.
“이제 뽑았으니 와라!”
“그러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다.”
운호의 검이 뽑혀 자신의 미간을 노리자 혈번의 펼쳐졌던 적색 깃발이 순식간에 감겨 창처럼 변하며 급작스럽게 쇄도해 들어왔다.
혈번의 공격이 신호가 되어 다른 자들의 움직임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움직이자 어느새 신마가 좌측에서 구절편으로 다리를 쓸어왔고, 적색 도객들은 사방을 점유한 채 운호의 전신을 한꺼번에 찍어왔다.
무시무시한 공격.
천지사방을 휩쓰는 회오리 같은 공격이다.
하지만 운호의 눈은 냉정하게 혈번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쐐액!
흑룡검에서 발현된 검기가 순식간에 사방을 쓸었다.
운호의 명호는 점창마검.
무림백대고수로까지 거론되었던 운호의 검은 이 년간의 칩거 수련을 통해 혈번과 도객들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들의 수준이 아무리 대단해도 절대의 경지로 들어선 운호의 검은 거대한 파도가 움직이듯 그들이 펼친 공격을 한꺼번에 뒤덮어 버렸다.
섬전(閃電), 풍영(風影), 월파(月破)로 이어지는 연환 공격이 터졌다.
먼저 덤볐던 혈번과 신마가 튕겨지듯 뒤로 물러났고, 곧이어 도객들이 공격해 오던 역방향으로 비산되어 날려갔다.
둘은 쓰러져 일어서지 못했고, 나머지도 제대로 서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냉막했던 얼굴은 사신을 본 것처럼 경악으로 물든 채 부르르 떨고 있다.
운호의 검은 망설임이 없다.
이 년 전 황수전투에서 익힌 실전 경험은 그에게 동정과 자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충분히 알려주었다.
그랬기에 그의 검은 비틀거리는 그들의 중심으로 파고들며 낙영(落英)과 무영(無影)을 날렸다.
팡, 파파팡!
전력으로 반격했으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그들의 병기를 철저하게 파괴했고 육신마저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다시 일격에 두 명이 쓰러졌고 한 명이 전장에서 이탈했다.
멈추지 않는 진격.
불과 십 초.
신마를 비롯해서 여섯 명의 도객이 핏물 속에 잠긴 것은 십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쓰러진 자들보다 이 장이나 뒤쪽으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있던 혈번이 옆구리에서 삐져나오는 창자를 손으로 막은 채 헐떡거렸다.
“헉헉! 이 정도일 줄이야. 정말 대단하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느냐?”
“어차피 너는 죽는다. 그러니 말하라. 너의 자존심을 망가뜨린 자들에 대해서.”
“크윽! 그게 그렇게 궁금했단 말이냐?”
“자,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어서 말해.”
“듣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왜?”
“듣는 순간 너뿐만 아니라 점창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괜찮다! 말해!”
“좋다. 헉헉, 어차피 죽을 테니 말해주마. 저승에서 구경하려면 판이 커지는 게 좋을 테니 말이다. 놈들은…….”
혈번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운상과 운여가 적색 도객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가 하나둘 쓰러뜨리기 시작할 때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쉽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해서 운호는 입을 떠억 벌렸다.
워낙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자꾸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으나 그는 결심한 듯 끝까지 자신의 말을 끊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들어야 할 정보가 많았지만 그는 불과 반각을 넘기지 못하고 거짓말처럼 몸을 늘어뜨렸다.
사천을 넘나들며 갖은 악행을 저지르던 혈번의 마지막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운호가 혈번에게서 떨어져 나왔을 때 운상과 운여도 싸움을 끝내고 다가왔다.
피로 물든 검을 천으로 닦은 후 검집에 넣은 그들은 조용히 다가와 운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이마를 찡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이것은 운호가 뭔가를 깊게 생각할 때 하는 버릇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운호를 가운데 두고 침묵을 지켰다.
운호가 눈을 뜬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였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급히 입을 열었는데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했다.
“우린 광원으로 간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왜?”
“청성이 위험하다.”
“이미 늦었어. 놈들은 아마 시간을 맞췄을 거야. 이쪽과 그쪽을.”
운호의 말에 운여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확한 판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모른 척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설아만은 살리고 싶었다.
“알아. 하지만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그녀 때문이냐?”
“꼭 그것만은 아냐. 나중에 말해줄게.”
“알았다.”
운상과 운여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친구가 말했고, 친구로서 들었기 때문이다.
운호가 뒤로 물러난 황충에게 시신의 처리를 부탁하고 먼저 떠난다는 인사를 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짐을 챙긴 후 벌써 광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결정한 후의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일사불란했다.
어둠은 그들의 전진을 막지 못했다.
마차로 반나절의 거리였지만 전력으로 신법을 발휘하자 광원은 두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청성무인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광원에 도착했으나 어디가 목적지인지 알 수 없으니 막다른 길에 몰린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어떡하지?”
“할 수 없다. 흩어지자.”
“그게 좋겠다.”
“대신 불리하면 싸우지 말고 피해. 괜히 목숨 걸지 말고. 위험하면 신호 보내는 거다. 알았어?”
“그놈 참, 알았으니 방향 정해.”
운호가 눈을 부라리자 운상이 손사래를 쳤다.
잔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행동이다.
“분명 시가지에서는 일을 벌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시가지에서 가깝다.”
“시가지일 수도 있다. 표행의 최종 목적지는 도시 내의 어떤 곳이었을 테니까.”
“좋아, 그럼 운상 네가 도시로 들어가. 나와 운여는 외곽을 찾아볼 테니까. 해시에 여기서 다시 만나는 것으로 하지.”
“좋아.”
해시라면 두 시진 후다.
광원 외곽을 찾기 위해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정해놓지 않은 채 무작정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적이 강하다는 건 위험의 강도가 크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운호는 친구들과 헤어져 광원 외곽 동쪽으로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시 내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무인들의 세계는 범인들의 세계를 가급적 침해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고, 놈들은 은밀하게 일을 진행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천천히 신법을 펼치며 샅샅이 훑었다.
표행이 있던 곳에서 그들은 광원까지의 직선로를 따라왔다.
그 이야기는 급하게 움직인 청성의 예상 경로를 그대로 따라왔다는 얘기도 된다.
싸움이 벌어졌다면 분명 그들이 도착한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추측은 그대로 맞아들었다.
불과 오 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격렬한 싸움의 흔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흔적은 동쪽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싸움의 분산.
누군가가 고의로 의도하지 않은 이상 나타날 수 없는 행적이다.
운호는 사방을 살피다가 그중 흔적이 가장 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흔적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싸움이 격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적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추격전.
한쪽은 쫓기고 다수가 추격하는 형태.
쫓기는 사람들의 무력이 워낙 강해서인지 대부분의 시신은 청갑을 몸에 두른 괴인이었다.
하지만 이 리 정도 따라가자 청성무인들의 시신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싸움이 점점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신법의 속도를 올렸다.
이름 모를 산과 이어지는 둔덕을 넘어서자 십여 구의 청갑괴인 시신과 세 명의 청성무인 시신이 나타났다.
얼마나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는지 둔덕의 평지는 성한 나무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하나로 뭉쳐 있던 흔적들이 또다시 사방으로 갈라졌다.
여기서 청성무인들이 각자 흩어져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보였다.
운호는 쓰러진 청갑괴인들의 시신을 세밀하게 살핀 후 지체 없이 산기슭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산 쪽으로 향해 쓰러진 시신의 가슴 상처가 다른 쪽에 쓰러진 자들의 상처보다 얇았다.
면검에 당했다는 증거다.
한설아는 여인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은하검(銀河劍)을 소지하고 있었으니 그녀는 산 쪽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컸다.
싸움이 벌어진 시각은 피의 응고와 시신의 경직 상태로 봤을 때 반 시진 전으로 추정되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인다면 그녀를 구할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운호는 전속력으로 유운신법을 운용했다.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지만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차고 오르며 신형을 날렸다.
저절로 급해지는 마음과 달리 놈들의 흔적은 갈수록 약해져 일각이 지나자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신형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내력을 극도로 끌어올려 사방으로 내기를 쏘아 보냈다.
이것으로도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녀를 찾지 못한다.
좌방에서 여인의 끊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미약하게 들린 것은 눈을 감은 지 다섯 호흡 만이었다.
단 한 번의 비명만으로도 그녀가 한설아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비명은 마치 영혼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애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