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75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75화
다음 날, 관도에서 벗어난 능선.
운호 일행은 아침을 먹고 먼저 성도 외곽에 나가 표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섬서로 가는 관도는 이곳 한 길뿐이니 여기서 지키면 표행과 무조건 만나게 되어 있다.
“운여야, 우리 내기할까? 그녀가 여기로 오나 안 오나 맞혀보는 건 어때?”
“누구, 한 소저 말이냐?”
“그래.”
“싫다, 인마. 짜고 치는 내기는 안 한다.”
“뭘 짜고 쳐?”
“나도 봤거든. 한 소저 얼굴 붉히는 거. 내가 이쪽으로 온다는 데 걸 테니까 넌 다른 쪽에 걸어. 그럼 하지.”
“됐다.”
운여가 주섬주섬 허리춤에서 전낭을 꺼내려 하자 운상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거기엔 운호가 뭔가를 생각하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먼 시선. 흩어진 눈망울,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그리움. 분명 거기에 담겨 있는 건 후회와 아픔일 것이다.
그 모습이 운상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운호, 여전하구나. 아직도 못 잊은 거냐?”
“시비 걸지 마라.”
“인마, 남의 여자 된 사람을 왜 생각하고 그래? 그런 짓 하면 너만 괴로워져.”
“넌 어째 그리 냉정하냐. 좋아하던 사람을 어떻게 금방 잊어버릴 수 있어? 이렇게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생각나는데 그걸 어떻게 막아!”
“찌질한 놈.”
“운여야, 쟤 좀 데리고 가.”
“저기 낭떠러지로 밀어버릴까?”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구경하던 운여가 빙글거렸다.
두 놈 하는 짓이 귀여운 모양이다.
그런 운여를 향해 운상이 침을 튀며 자신의 주장을 거듭 나열했다.
“야, 내 말이 맞잖아. 어차피 임자가 정해진 여잔데 계속 생각하면 어쩌라고. 그렇게 좋으면 지랄을 떨어보든가. 그것도 못한 놈이 답답한 짓을 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
“그건 맞는 말이다.”
“너도 저쪽으로 가, 인마!”
운여가 고개를 끄덕대자 운호가 도끼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운여의 맷집은 타고났을 정도로 세다.
“야, 운호. 내가 봤을 땐 말이야, 한 소저가 남의 여자 된 당 소저보다 훨씬 예쁘더라. 그렇게 생각 안 되냐?”
“사람은 얼굴만 보고 평가하는 거 아니야.”
“한 소저는 성격도 좋아. 천하를 다 뒤져도 정말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여자다.”
“그래서 어쩌라고?”
“한 소저가 너한테 호감이 있다는 거, 척 보면 모르겠어? 사람은 지나간 인연보다 새로운 인연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해야 돼. 특히 이성 간에는 더욱더. 그러니까 당 소저는 잊고 한 소저랑 잘해봐.”
“됐다. 어지럽다.”
“이놈이 복이 흘러넘치니까 아주 오만이 몸에 밴 거 같아. 운상아, 안 그러냐?”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시끄러워. 그만하고 둘 다 저쪽으로 가!”
친구는 이래서 좋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 편하고 같이 있기만 해도 즐겁다.
능선에 도착한 지 한 시진이나 지났지만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앉아 옛날 일을 회상하며 웃고 떠들었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운호가 말을 끊은 것은 멀리서 먼지가 피어난 걸 확인했을 때였다.
표행으로 인한 먼지.
행렬은 단 하나의 마차만 호위하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스물이 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운상이 올 거라 자신하던 한설아의 모습도 보였다.
“어때, 내 추측이?”
“응. 너 잘났어.”
운상이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치켜세우자 운여가 아주 멋지게 맞장구를 쳐줬다.
따른다는 말을 했어도 대놓고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에 운호 일행은 표행이 앞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뒤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표행의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다.
능외쌍마나 혈번 등이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한설아의 뒷모습만 따라가다가 아무런 기약 없이 섬서로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중강(中江).
성도의 동북 방향으로 칠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강으로, 사천의 최북단에서 섬서 쪽으로 흐르는 장강의 지천이다.
그곳에 칠십여 명의 흑건인이 나타난 것은 오시 무렵이었다.
흑의 무복의 왼쪽 상단에는 번개 문양이 새겨져 있고 흑건의 좌우로는 구름이 흘렀다.
문제는 그들의 기세였다.
검을 갈아놓은 것처럼 날카로운 기세가 새어 나왔는데 특히 중앙에 자리한 자들의 몸에서는 금방이라도 폭발한 것 같은 엄청난 기세가 숨겨져 있었다.
“그들의 위치는?”
“방금 전 도착한 전서에 따르면 금당(金堂)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반 시진 정도면 이곳에 당도할 겁니다.”
“호위 책임은 누구냐?”
“만수자라 합니다. 그 외에 청풍팔검에 속하는 광검과 호풍검, 그리고 청성일미가 같이 옵니다.”
“만수자라……. 재밌겠구나. 더군다나 선물까지 들고 오다니 고마운 일이로고. 클클클.”
“소주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그럴 게다.”
가운데 있는 자가 기꺼운 듯 웃었다.
이상한 건 목소리는 분명 웃고 있었는데 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
한 번 봐도 영원히 잊히지 않을 정도로 뱀처럼 차가운 눈이다.
대답하는 자의 기세 또한 무시무시했지만 중앙에 있는 자에 비하면 그 격에서 분명 차이가 있었다.
“물건이 이쪽으로 오는 건 확실하겠지?”
“그렇습니다. 약속한 대로 그자들이 아침에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놈들의 속셈이 궁금하군.”
“그자들의 목적은 청성인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단지 이유를 몰라서 한 말일 뿐이야.”
“죄송합니다.”
“놈들이 무슨 짓을 하건 상관없다. 우리는 물건과 선물만 가지고 돌아가면 된다.”
“아무래도 전운이 감도는 것 같습니다. 대계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땐 모두 죽을 자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준비는 끝났나?”
“모든 게 완벽합니다. 놈들이 오면 일은 끝납니다.”
“좋아, 가서 쉬어.”
“저기, 만수자는 어찌할까요? 구원이 있는 자입니다. 통령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제 손으로 잡고 싶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라. 하지만 일각 이내의 승부다. 질질 끌게 되면 그냥두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한설아는 광검에게 부탁해 섬서로 가는 표물로 따라붙었다.
사형들은 그녀를 모두 예뻐했기 때문에 섬서 쪽의 경치를 구경하고 싶다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표행이 출발하면서부터 한설아는 꾸준히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만수자는 청성십구숙 중 아홉 번째로서 청운적하검을 대성한 절정의 검객이다. 그랬기는 그녀는 이번 표행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능외쌍마뿐만 아니라 혈번과 신마까지 온다 하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전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경치를 구경하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열심히 운호 일행을 찾았다.
몰래 뒤따를 게 분명했지만 개활지나 평원으로 들어서면 결국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도를 벗어난 이후로 개활지는 한 군데도 나타나지 않았고, 고수라면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는 지형이 연속으로 나타났다.
답답했으나 내색할 수 없어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운상의 암묵적 제안을 받으면서 내심 기대를 했다.
어차피 개입하지 않는다면 같이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운호 일행은 철저히 몸을 숨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과 하루 떨어졌는데도 벌써 보고 싶어졌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와 따스한 눈빛.
그를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훈훈해지며 기분이 좋아진다.
혹시 그를 좋아하게 된 걸까?
스스로 던진 질문에 괜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바보.
대답도 못할 거면서 그런 질문을 하다니…….
표행을 바짝 따라붙을 필요는 없었기에 운호 일행은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청성의 무인들을 필두로 전진하는 표행의 진형은 너무나 탄탄해서 웬만해서는 기습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한설아처럼 운호 일행도 똑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혈번이 아무리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 해도 만수자가 가세한 청성의 전력을 깨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표행의 이동 경로로 볼 때 최종 목적지는 면양(綿陽), 아니면 광원(廣元)일 가능성이 컸다.
두 곳 모두 섬서로 넘어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덕양까지는 똑같은 경로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결국 최종 목적지를 알기 위해서는 덕양을 지나야 된다는 뜻이다.
운상은 표행과 함께 움직여도 되지 않겠냐며 의견을 냈으나 운호와 운여의 반대에 부딪친 후 깔끔하게 입을 닫았다.
만약이라도 같이 있다가 청성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거나 원망을 사게 된다면 사문에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먼 곳에서 흘끗흘끗 표행을 확인만 했을 뿐 가급적 모습을 숨긴 채 천천히 전진했다.
문제가 일어난 것은 금당을 통과해서 오십 장에 달하는 넓이의 중강이 나타났을 때였다.
칠십에 달하는 흑건사내가 강변을 따라 횡으로 포진한 채 표행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그 기세가 너무나 날카로워 오한이 들 정도였다.
막 능선으로 올라서던 운상이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연 것은 흑건사내들의 중앙에 있던 자가 천천히 표행 앞으로 걸어 나왔을 때다.
“저놈들은 또 뭐냐?”
전혀 예상외의 병력이 출현하자 양옆으로 올라온 운여와 운호도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떡 벌렸다.
나오라는 혈번이나 능외쌍마는 보이지 않고 웬 시커먼 옷을 입은 복면인들만 잔뜩 나타났으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복면인들의 기세가 대단해서 그들이 서 있는 곳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피부가 여기서도 따끔거린다.”
“기다리고 있었어. 정확히 경로를 예측하고.”
“내통?”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지. 어쨌든 한 가지는 이제 확실해졌다. 어젯밤 장원에서 놈들이 모두 사라진 건 미리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렇다면 저 복면인들 사이에 혈번이나 능외쌍마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우리 운여가 역시 똑똑하단 말이야.”
번뜩이며 돌아가는 머리를 운호가 칭찬하자 운여의 어깨가 대번에 올라갔다.
그 정도는 기본이라는 시늉이다.
“그런데 운여야, 너 내가 장원에서 한 말 기억 나냐? 놈들이 한 조직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랬지. 이제 보니 의심스럽긴 하군.”
“의심스러운 정도가 아니야. 모두 복면을 뒤집어썼잖아. 저 속에 진짜 놈들이 있다면 확실한 거다.”
“미칠 노릇이군.”
“점점 재밌어져. 한번 파볼 필요가 있겠어.”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저건 어쩔 거야?”
“어쩌긴, 기다려야지. 확실하게 밀릴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괜히 먼저 나섰다가는 고생하고 원망만 듣는 수가 있어.”
“이 냉정한 놈아, 그러다 한 소저가 다치면 어쩔래?”
차분하게 말하는 운호를 향해 운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한설아가 제일 걱정되는 모양이다.
“은밀하게 접근해야지. 무슨 일 생기면 즉시 도울 수 있게. 그런데 너, 한 소저한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냐?”
“여자니까 그렇지!”
만수자는 표행의 전면에 서서 다가오는 흑건의 사내를 조용히 기다렸다.
예상외로 많은 적이 나타났음에도 그의 표정은 한 올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입이 열린 것은 흑건의 사내가 일 장 앞까지 다가왔을 때다.
“대낮에 복면은 왜 뒤집어썼느냐?”
“그렇게 됐다.”
“천하의 혈번이 복면을 하고 나타나다니 내가 산에 있는 동안 세상 참 많이 변한 모양이구나.”
대번에 복면인의 정체를 확인한 만수자의 입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복면을 했어도 금마혈번이란 명호를 얻게 만든 핏빛 깃발을 가지고 있는 한, 혈번이 정체를 숨긴다는 건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혈번도 정체가 노출된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도사들이 적응을 잘 못하는 거야. 세상은 무섭게 돌아가는데 산에 처박혀 쓸데없는 도나 닦고 있으니 놀랄 일이 하나둘이겠어.”
“그때 내가 네 입을 덜 찢어놨나 보다. 여전히 잘 떠드는 걸 보니 말이다.”
“흥, 옆구리가 뚫려서 죽을 뻔한 놈이 누군데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냐!”
“크크, 옆구리로 말하는 거 봤어? 그때도 네가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서 아가리를 찢어놓았던 거야. 아니었으면 팔다리를 하나씩 잘랐을 텐데.”
이십여 년 전 동정호변에서 두 사람은 세 시진에 걸쳐 목숨을 건 승부를 벌였다.
청성이 주기적으로 시행하는 제마행을 위해 만수자가 세상에 나왔을 때 벌어진 일이다.
그때 모사충은 얼굴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고. 만수자는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 사경을 헤맸었다.
“요즘 도사 새끼들은 산에서 도는 안 닦고 주둥이질만 배우는군.”
“도 닦다 보면 말재주도 느는 법이다.”
뒤로 물러서는 모사충을 향해 만수자가 등에서 검을 끌어내리며 진하게 웃었다.
혈번과 대화를 하면서도 뒤쪽에서 이곳을 응시하는 흑건의 사내들을 지속해서 살폈다.
그러다가 중앙에 서 있는 금색 번개 문양의 사내를 확인하고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고수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
혈번도 어려운 마당에 정체 모를 고수가 있다는 건 이 싸움의 향방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만큼 힘들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물러서지 못한다면 단 한순간도 기세에서 밀리기 싫었다.
무인은 언제나 불가능을 생각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