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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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72화
금룡표국이 능외쌍마로부터 공격을 당하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부터였다.
모두 세 번의 표행이 털렸고 이십여 명이 그들의 손에 죽었다.
표국에서 일하는 표두나 표사들은 목숨을 잃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산적들이나 도적을 만나도 타협을 통해 일정 부분의 금액만 전하면 대체적으로 무사히 통과하기 때문에 싸움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아주 가끔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살인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차피 표물이 목적이니 사람까지 해할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뺏으면 곤란한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표국이 힘이 없어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표국은 강력한 문파의 속가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도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뒷배가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표물을 노리는 자들의 행동은 극도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을 죽인다는 건 돈 몇 푼 벌어보겠다고 무리 전체의 목숨을 내놓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기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런 짓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능외쌍마는 서슴없이 세 번에 걸쳐 스물세 명이나 되는 자를 모두 죽여 버렸다.
한 편의 지옥도.
잘린 육신과 피로 물든 현장에는 풀어헤쳐진 표물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고 한다.
표물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흉수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기에 금룡표국은 더욱 커다란 고민을 떠안아야 했다.
어떤 사건이든 목적을 알아야 대처가 가능한 법인데 현장에는 아무런 단서조차 남겨 있지 않았다.
현천우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세 번째 강탈사건이 벌어진 후에는 결국 청성으로 파발을 띄워야 했다.
목적은 둘째치고 더욱 중요한 흉수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누가,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 몰라 애를 태웠다. 그러나 거금을 주고 얻은 하오문의 정보에서 흉수가 능외쌍마라는 것을 알아낸 후로는 마음을 옥죄는 긴장감 때문에 잠을 못 잘 지경이었다.
단순한 도적이나 산적이라면 모를까, 능외쌍마라면 금룡표국 자체의 힘으로는 상대하기 버거웠다.
정보의 핵심은 취합과 분석이다.
사건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해도 그 주변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의 행동을 면밀히 분석하면 얻고 싶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데 하오문은 그런 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하오문의 정보는 개방과 쌍벽을 이룬다고 알려졌지만 정보의 질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세 번의 표행은 경로도 달랐고 표물의 내용도 모두 달랐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표물의 주인이 사천제일거상으로 꼽히는 희목염(希睦艶)이라는 것이었다.
금룡표국에서 운반하는 표물의 삼분지 일이 희목염의 천문상단에서 나온다.
그 말은 희목염이 금룡표국의 최대 손님임과 동시에 목숨 줄을 죄고 있는 고객이란 뜻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최대한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희목염은 금룡표국에 더 이상의 표물을 맡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 되는 순간 금룡표국은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능외쌍마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능외쌍마와는 아무런 원한을 지은 적이 없다.
물론 놈들의 악행이 어떤 원한 때문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유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과 금룡표국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놈들과 엮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놈의 움직임은 희목염이 목적이란 얘기가 되지만 그마저도 확실치가 않으니 답답함만 더할 뿐이었다.
능외쌍마.
폭급한 성격과 절세의 무공으로 사천, 감숙, 귀주를 휘저으며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절정고수들이다.
청성에서 수학하며 나름대로 절정의 반열에 들었지만 능외쌍마는 자신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본산에 연락을 취해 지원군을 요청했다.
광검 백건과 한설아가 도착한 것은 어제 점심 무렵이었다.
청풍팔검의 일인인 백건과 청성십팔수에 포함된 한설아는 충분히 능외쌍마와 자웅을 결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 그러나 현천우의 얼굴은 근심을 풀지 못하고 계속해서 굳어 있었다.
하오문이 비밀리에 보내온 문서에는 귀영신마 우쟁휘(宇爭輝)와 금마혈번 모사충(毛巳沖)이 혈사가 벌어진 인근에서 모습을 보였다는 정보가 쓰여 있었다.
물론 하오문은 혈사의 주체를 능외쌍마로 단호하게 한정 지었지만 강호의 오래된 늑대 현천우의 감각은 비상종을 계속 울리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가세가 현실이 된다면 금룡표국은 물론이고 백건과 한설아조차 무사하기 힘들 터였다.
금마혈번 모사충은 강북십마의 일인으로 백건이나 한설아와는 근본적으로 격이 다른 마두였다.
성도의 날씨는 무더운 운남에 비해 훨씬 시원했고 아침저녁이면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추운 것은 아니었기에 운호는 세면을 마친 후 표국의 대문을 나섰다.
금룡표국에서는 일행에게 각각 방을 배정해 주었기 때문에 운호는 운상과 운여의 감시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산책을 나설 수 있었다.
아침의 상쾌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바람을 맞으며 운호는 천천히 걸어 금룡표국 외곽을 가로지르는 관도로 나갔다.
관도는 끝없이 이어져 성도의 중심가로 뻗어 있었고, 아침임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도시였다.
지금까지 가본 도시 중 가장 큰 곳은 자공이었는데 성도는 자공에 비해 다섯 배는 더 커 보였다.
산에서만 자란 그에게 세상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람 사는 도시가 그랬고, 여행하면서 본 온갖 절경과 유적지는 모두 충격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렇게 산책하는 걸 즐기기 시작한 것은 세상에 나온 이후부터이다.
산책은 바쁜 일상에서 보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보여줘 즐거움을 갖게 만들곤 했다.
거의 반 시진가량 걷던 운호가 천천히 몸을 돌린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정확히 맞았다.
“아니, 소저께서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자연스러운 인사.
따라온 것을 들켰으면 얼굴이라도 붉혀야 할 텐데 한설아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운호였다.
한설아는 여전히 아름다워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산에서만 지내던 사람이 무슨 일이 있었겠소. 나는 잘 지냈소.”
“질문이 조금 이상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소. 그저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 그리 대답했을 뿐이오.”
“호호, 여전히 솔직하시군요. 마검의 위명은 귀가 따갑게 들었답니다.”
“이제 믿는 거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잖아요. 혹시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한 건 아니죠?”
“나는 그렇게 속이 좁은 사내는 아니오. 그런데 어인 일로 이 새벽에 혼자 나오셨소? 어딜 가는 길이오?”
“아뇨. 공자님 산책 나오는 거 보고 따라 나온 거예요.”
사천을 들었다 놨다 한다는 미녀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한설아는 태연하게 말하며 운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거의 도발적인 시선이다.
무력으로 따진다면 그 누구와 붙어도 자신 있는 운호였지만 여인의 눈빛 공세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랬기에 슬며시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구려.”
“금룡표국에 주무셨잖아요. 저도 거기 머물고 있거든요.”
“정말이오?”
“광한검께서는 청성의 문하세요. 점창에서 알고 온 일을 청성에서 모를 리가 없죠.”
“그래서 도와주러 오신 거요?”
“청성의 일이니까요.”
“음…….”
운호의 입에서 메마른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금룡표국이 청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명부에 적혀 있지 않았다.
물론 강호 경험이 풍부했다면 사전에 금룡표국부터 조사를 하고 나서 움직였을 터였다. 그러나 운호 일행은 초출이나 다름없었으니 빼먹고 흘린 것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막상 한설아의 말을 듣고 나자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금룡표국이 청성의 속가이고 청성 본산에서 지원하기 위해 내려왔다면 점창이 끼어들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청성에서는 몇 명이나 내려오셨소?”
“사형과 저 둘이 왔어요.”
“사형이라면?”
“왜 예전에 자공에서 한 번 만났잖아요. 광검 백건.”
“그렇구려. 이제 생각나오.”
“예전에 있었던 일 잊었죠?”
한설아의 질문에 운호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살폈다.
무슨 의도로 한 질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그 당시 백건의 무례함이 떠올랐다.
한설아는 운호가 아직까지 그때의 불쾌함을 가진 건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몰라서 한 실수는 당연히 잊을 수 있소. 하지만 힘이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타인을 멸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아직까지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를 상대하지 않을 생각하오.”
“저희 사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랍니다. 성격이 조금 급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그나저나 청성이 나섰으니 우리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소. 현 국주께서는 도와달라고 하시던데 청성의 입장은 어떻소?”
“저희는 소협이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능외쌍마의 무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현장 조사 결과 조력자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었어요. 그자들은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 마두예요. 무림 정의를 위해 하는 일인데 문파를 내세울 수는 없다는 게 저의 생각이랍니다.”
“현명한 생각을 가지셨구려.”
“별말씀을요. 그런데 같이 오신 분들은 친구 분이신가요?”
“그렇소.”
“그분들도 황수에 있었나요?”
“점창인치고 황수와 관련 없는 사람은 없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이제 표국으로 돌아가실 거죠?”
“그럴 생각이었소. 소저께서는…….”
“저도 이제 돌아가려고요. 가면서 이야기나 해요, 우리.”
“아, 네.”
‘우리’라는 말에 흠칫 놀란 운호가 뒤늦게 대답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설아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예전처럼 여전히 순진하다.
여자는 남자의 순진함을 보면 오히려 더 대담해진다는데 한설아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반갑지 않았나요? 난 무척 반가웠는데.”
“아, 그게… 나도 반가웠소.”
“정말이죠?”
얼떨결에 대답한 운호를 향해 그녀가 활짝 웃으며 반문했다.
그녀는 운호의 대답이 무척 흡족한 모양이었다.
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운상과 운여는 눈을 부릅뜨고 운호를 노려봤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랑의 신파극을 펼치며 다 죽을 것처럼 빌빌대던 놈이 갑자기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 매달고 나타났으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잘못 봤을지도 몰라 열심히 눈을 비벼봤지만 앞에 나타난 놈은 운호가 분명했다.
“어디 갔다 오냐?”
“산책.”
“그런데 왜 도둑고양이처럼 다녀? 뭐 잘못한 거 있어?”
심문하듯 덤비는 운상과 운여의 태도에 운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놈들의 눈이 한설아에게 가 있는 걸 확인한 후에서야 쓴웃음을 지었다.
“인사해라. 청성에서 오신 분이다.”
“청성?”
운호의 소개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반문이 튀어나왔다.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설아는 그들의 놀람과 상관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왔다.
“처음 뵙겠어요. 저는 한설아라고 해요.”
“음, 이제 보니 청성일미셨구려. 운호를 통해 귀가 따갑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요?”
한설아의 지체 없는 반문에 운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내용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운상과 한설아는 열심히 대화를 지속해 나갔다.
“그런데 아침부터 다정하게 두 분이 어딜 다녀오시오?”
“산책이요.”
“그렇구려. 두 사람이 들어오는데 꼭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소.”
“그렇게 잘 어울렸어요?”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요.”
슬쩍 놀려보려 꺼낸 말에 한설아가 대뜸 화답하며 다가오자 운상이 오히려 주춤 뒤로 물러났다.
운호의 이야기로는 무척이나 예의 바르고 심성이 고운 여인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 성격도 무척 밝다.
운호 이놈, 여복은 타고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