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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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71화
아주 길고 긴 잠을 잤다.
며칠 동안 불면으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운상과 운여는 어느새 일어나 떠날 준비를 마친 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났냐?”
“너희 벌써 준비 끝낸 거야?”
“해가 중천이다. 시체처럼 자서 안 깨웠다.”
“그래, 오랜만에 푹 잔 것 같다.”
“일어나서 준비해. 이제 떠나야 하니까.”
운상의 말에 운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당운영의 혼인식은 사시 말에 시작된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으나 일행은 서둘러 움직였다.
그러나 서두른 것은 운호 일행만이 아닌 모양이다.
황보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집사를 찾았으나 그녀는 벌써 당문으로 출발한 상태였고, 객방을 나서자 그토록 많던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황보혜는 당운영의 둘도 없는 친구이니 들러리를 해주기 위해서라도 일찍 출발할 수밖에 없었고, 풍검문의 무인들은 하객이면서 석천을 호위하기 위해 온 자들이니 분명 아침 일찍 석천과 함께 당문으로 향했을 것이다.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간양으로 향했다.
당문은 월운장과 정반대 방향에 있기 때문에 간양 시내를 통과해야만 한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 서두르지 않았음에도 당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제 막 사시가 되었을 뿐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당가타로 이동하고 있었다.
거의 축제나 다름없는 혼인식.
당문은 풍검문과의 혼인으로 인해 강력한 조력자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사천에서의 영향력이 드디어 청성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기에 당문의 수뇌부는 이번 혼사를 위해 엄청난 자금과 인원을 투입했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행사.
혼인식에 버금가는 식전 행사가 도처에 마련되어 하객들을 즐겁게 만들었고, 어디서나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번 혼인식을 통해 당문의 위세를 사천은 물론 중원 전역에 알리기 위한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모든 행사는 혼인식의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와 함께 일시에 정지했다.
예식장은 당가타 외당에 마련되어 있었고, 각종 행사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초례청 중앙에 설치된 교배상으로 신랑인 석천이 동쪽에 나와 섰고, 곧이어 당운영이 서편으로 나와 마주 보고 섰다.
신랑과 신부가 맞절하는 교배례가 이어진 후 술을 나눠 마시고 백년해로를 다짐하는 합근례가 뒤를 따랐다.
당운영은 다소곳하게 서서 도와주는 사람들의 손길에 의지하며 하나씩 절차를 이행해 나갔다.
그녀의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면사에 가려 얼굴을 볼 수 없으나 운호는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수많은 생각과 그리움, 살면서 처음 느낀 감정, 그녀의 웃음과 눈물이 하나씩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잊어야 하는 것들이다.
운호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것은 당운영이 합근례를 위해 표주박에 담긴 술을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가자.”
“응?”
“이제 가자.”
“정말 가지고?”
“그래.”
놀라는 운상과 운여를 향해 싱긋 웃어준 운호가 먼저 움직였다.
천근보다 무겁다는 미련이 그의 발걸음을 잡았으나 운호는 그 미련을 모두 이곳 당가타에 남겨두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떼었다.
그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운 사문의 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운호 일행이 처음부터 성도를 목적으로 삼은 이유는 능외쌍마 손칠(孫七), 손평(孫平) 형제와 귀영신마 우쟁휘(宇爭輝)의 행적 때문이었다.
명부에는 그들의 최근 행적이 성도였다고 적혀 있었다.
사문에서는 운호 일행에게 줄 명부를 작성하느라 매우 고심한 것이 틀림없었다.
명부에는 마흔세 명의 명호와 이름, 최근 행적, 그리고 그들의 죄목이 샅샅이 적혀 있었는데 얼마나 세세한지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능외쌍마의 죄는 살인과 강간.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죽였고, 수시로 회가 동할 때마다 서슴없이 강간을 저질렀다.
그들의 손에 죽은 사람의 숫자는 의심 가는 것만 헤아려도 족히 백은 넘는다고 했으니 그들의 악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간양에서 성도까지는 백 리에 불과했지만 무후사(武侯祠)와 청양궁(靑羊宮)을 구경하고 오느라 운호 일행이 도착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진 후였다.
화려한 불빛의 향연.
사천에서 가장 큰 도시답게 성도는 지금까지 봐온 어떤 도시보다 압도적인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인구는 십만 호에 달했고 사천 서부평원의 중심지에 위치해 물산이 풍부했으며, 교역이 발달했기 때문에 언제나 활기에 넘쳤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가 청성과 근접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탕마행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사마 척결을 통해 사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호의 인사들과 친분을 나눠 인맥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강호 견문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운호 일행이 금룡표국을 찾은 것은 후자의 이유와 능외쌍마의 행적으로 인해서였다.
명부에 따르면 가장 마지막으로 피해를 입은 곳이 금룡표국이라 적혀 있어 늦은 밤임에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금룡표국은 성도를 대표하는 표국이었는데 청성의 속가제자인 광한검 현천우(玄天雨)가 세워 지금까지 이십 년간 운영되어 왔다.
광한검은 청성의 일대제자와 배분이 같은 절정의 검객이었다.
굳게 잠긴 문을 두들기는 운상의 얼굴이 밝지 못했다.
너무 늦은 방문은 자칫하면 문전박대를 당할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문이 열린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표사로 보이는 무인들이 검을 든 채 운호 일행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시오?”
“국주를 뵈러 왔소. 점창에서 왔다고 전해주시오.”
“점창!”
운상의 말에 맨 앞에 선 말상의 사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점창은 이년 전 황수전투에서 막강한 전력으로 칠절문을 격파함으로써 세상을 경악케 한 문파이다.
그런 곳에서 야밤에 갑자기 찾아왔으니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말상사내는 곧 평정을 되찾고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안채에 기별을 넣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말상사내의 지시에 급히 전갈을 전하려 들어갔던 표사가 다시 나온 것은 불과 반각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표사는 기골이 장대한 사내를 대동하고 있었는데 그는 운호 일행 앞으로 대뜸 나서며 예를 표했다.
“저는 표두 황충이라 하오. 국주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제가 모시겠소.”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앞에 나서 대화를 시도한 운여가 황충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자 황충은 마주 허리를 숙인 후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금룡표국의 규모는 상당했다.
사람이 사는 전각과는 별도로 표물을 보관하는 창고가 이십 동에 달했고, 마사도 일곱 동이나 지어져 오십여 마리나 되는 말을 관리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연무장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황충은 연무장을 가로질러 중앙에 있는 거대한 전각으로 운호 일행을 안내했다.
접견실로 보이는 곳으로 황충이 안내해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모양인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호랑이상의 얼굴을 지닌 노인이 바로 광한검 현천우였고, 좌측에 선 사내는 총표두 황학이었다.
현천우는 들어오는 자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가 금방 다시 폈다.
운호 일행의 나이가 너무 젊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강호의 노회한 늑대답게 즉시 표정을 고친 후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어서 오시오. 내가 국주인 현천우요.”
“밤이 늦었는데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양해하시기를. 저는 점창에서 온 운호입니다. 이쪽은 운상이고 저 사람은 운여라고 하지요.”
“점창마검! 그대가 정녕 마검 운호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운호의 정체를 확인한 현천우가 그동안의 여유로움을 지워 버리고 와락 긴장된 표정을 얼굴에 띠었다.
마검의 명성은 자신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놀란 것은 옆에 있는 총표두 황학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얼굴은 노랗게 변해 있었다.
그는 표행을 하면서 워낙 마검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황수전투에서 보인 활약을 줄줄 꿰고 있어 충격이 더한 것 같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현천우였다.
“허어, 이런 정신을 봤나. 일단 앉으십시다.”
급히 자리를 권한 현천우는 운호 일행이 모두 자리에 앉자 따라 들어온 황충을 향해 급히 차를 준비해 달라고 지시했다.
사실 점창에서 왔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는 대충 상대한 후 돌려보내려 했다.
어떤 일로 왔는지 모르나 지금은 시간을 허비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아 차도 준비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미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상대는 천하에 쩌렁쩌렁한 위명을 떨치고 있는 마검이었다.
그런 마검을 차도 대접하지 않고 문전박대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천우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시녀가 차를 모든 사람의 잔에 채우고 물러선 후였다.
“천하의 마검께서 어인 일로 금룡표국을 방문하셨소?”
“당분간 신세를 졌으면 해서 왔습니다.”
“신세라면, 여기서 묵겠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저희가 온 이유는 능외쌍마를 잡기 위해섭니다.”
운호의 대답에 현천우의 얼굴이 또다시 변했다.
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예상 밖의 상황으로 인해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계속 변했다.
“금룡표국이 능외쌍마와 관련 있다는 것을 어디서 들으셨소?”
“저희는 그 출처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이 금룡표국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정보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렇구려.”
“만약 그것이 잘못된 정보라면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그자들 때문에 방금까지 회의를 하고 있었소. 금룡표국이 그들로 인해 커다란 곤란에 빠진 것은 사실이오.”
“그렇다면 저희가 도와드리지요.”
“그런데 점창에서 그들을 잡으려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소?”
당연한 의문이다.
난데없이 나타나 능외쌍마를 잡겠다는 점창의 의도는 절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출처도 명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직접 찾아왔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천우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연 운여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야 무릎을 치며 기꺼운 얼굴을 했다.
탕마행 같은 것이라면 청성에도 있기 때문이다.
“점창의 뜻은 잘 알겠소. 아직 저녁 식사도 못하신 것 같으니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 이야기합시다. 어떻소?”
“그리 배려해 주시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랜 여행으로 인해 먼지가 묻은 옷을 확인한 현천우가 눈치 빠르게 제안하자 운여가 즉시 화답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운호 일행이 총표두 황학을 따라 접견실을 나서자 현천우는 직접 따라 나와 배웅했다.
그가 접견실로 다시 돌아온 것은 운호 일행의 모습이 완전하게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였다.
접견실로 돌아온 현천우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 반대쪽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전혀 예상외의 인물들. 바로 운호가 자공에서 만난 청성일미 한설아와 광검 백건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현천우의 맞은편에 다가와 앉았는데 이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백건이었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인상이었고 여전히 날카로운 예기가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탕마행이라……. 점창이 이제 여력이 남아도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보군.”
“사형께서는 그들을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도와주겠다고 찾아왔는데 내칠 이유가 뭐 있겠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안 된단 말일세. 자네들이 있어 다행이지만 능외쌍마 외에 다른 자들이 따라붙는다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으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일세.”
“제 생각도 그래요. 그들이라면 이 난관을 극복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거예요.”
현천우의 말을 들은 한설아가 곧바로 나서며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백건과는 다르게 기대에 찬 시선으로 현천우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의미 모를 미소도 함께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