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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70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0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70화

운호는 다음 날 집사를 통해 황보혜에게 잠시 시간을 내달라는 기별을 보냈다.

남의 집에 와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기별만 넣어놓고 하염없이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운상과 운여는 그 이유에 대해 꼬치꼬치 깨물었으나 운호는 입을 꾸욱 닫고 말해주지 않았다.

집사가 다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집사는 운호를 데리고 건물 사이를 한참 돈 후 다른 곳보다 담장이 높게 설치된 문으로 다가갔다.

그런 후 문 앞에 서서 운호에게 들어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향긋한 꽃 냄새가 먼저 풍겨와 코끝을 자극했고, 곧이어 아름다운 광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정원은 온통 꽃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황보혜는 꽃밭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불쑥 이렇게 연락을 드려 미안하오.”

“아니에요. 하실 말씀이 있었겠지요. 앉으세요. 차를 내오라고 할게요.”

그녀는 운호를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한 후 시녀를 불러 차를 내오게 했다.

황보혜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차가 운호의 앞에 놓인 후였다.

“용정차예요. 향기가 깊어 천천히 입술로 축이며 드시면 심신이 맑아진답니다.”

“귀한 차를 내주셔서 고맙소.”

“자, 이제 말씀해 보세요. 귀를 씻고 들을게요.”

“외람된 질문을 하나 할까 하오.”

“그게 뭘까요?”

황보혜의 눈이 별빛처럼 빛났다.

운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어떤 질문이 나올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입을 닫고 기다렸다.

“당 소저와 혼인하는 사람이 풍검문의 장자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와 당 소저가 어떻게 만났는지 알고 싶소.”

“제가 알고 있기로는 작년 중양절에 풍검문에서 납채를 가져온 걸로 알고 있어요. 석천 대협이 당문을 찾은 것은 당황 어르신께서 납채를 허락하는 서신을 풍검문으로 보낸 그다음 달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혹시 그를 보셨소?”

“봤습니다. 운영이가 저한테 그를 소개시켜 줬어요. 아마 제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는 어떤 사람이었소?”

“사실대로 말씀드릴까요?”

“그래 주시오.”

“얼굴은 잘생기지 않았어요. 대신 우직한 마음을 지녔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운영이를 보고 첫눈에 반했는지 그 먼 길을 두 달에 한 번씩 찾아왔어요. 사람들은 그가 무공에 미쳐 안휘를 벗어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지만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사천에서 살다시피 했답니다.”

“그것이 당 소저 때문이란 말이오?”

“맞아요.”

“그랬구려.”

헛웃음이 나온다.

자신은 이 년 동안 서신 한 통 보내지 않았는데 그는 당운영을 위해 칠천 리나 되는 길을 두려움 없이 달려왔다고 한다.

“운영이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공자를 못 잊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요.”

“그랬구려.”

장안평에서 본 그녀라면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공자를 기다렸어요. 석천 대협의 그 지고한 구애에도 운영이는 오직 한마음이었어요. 언젠가 공자로부터 소식이 올 거라며 석천 대협을 절대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어요.”

“그랬구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자신을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줬다.

그런데도 자신은 수련을 끝내고 시간이 남을 때에야 비로소 절벽에 걸터앉아 꿈꾸듯 그녀를 생각했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운영이가 석천 대협을 받아들인 건 불과 두 달 전이었어요. 비 오던 어느 여름날 그는 장대 같은 비를 맞으며 운영이의 방 밖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고 해요.”

“그랬구려.”

그의 행동에서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분명 그는 당운영의 가슴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신주십강에 당당히 낀 풍검문의 정보망은 강호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밤을 새우며 사랑을 고백했다고 한다.

밤을 새울 수 있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다른 사내를 사랑하는 여인을 한마디 원망 없이 기다린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혼인 날짜가 잡힌 것은 그로부터 칠 일 후였어요. 세간에서는 운영이의 혼인이 단순한 정략결혼이라며 말도 많았지만 제가 알기로 이 혼인은 석천 대협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니 공자께서는 더 이상 운영이가 힘들지 않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그럼에도 공자를 이곳으로 모신 것은 제 마음이 모질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나는 운영이가 가문의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당 소저는 분명 그렇게 될 것이오. 그리고 나는 그대의 부탁을 잊지 않으리다.”

운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황보혜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런 후 발걸음을 돌려 그녀가 머무는 이화원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올 때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고, 처졌던 어깨는 원래대로 돌아와 예전의 당당하던 운호로 바뀌어 있었다.

 

객방으로 운호가 돌아오자 운상과 운여는 지체 없이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으나 함부로 물어볼 내용이 아니기에 그들은 운호의 눈치만 보며 속으로 끙끙댈 뿐이었다.

운호는 굳건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 못지않게 눈치도 빠른 사람이었다.

“뭐부터 말해줄까?”

“왜 갔냐?”

“네 추측이 맞나 확인하러. 네 추측은 틀렸다.”

“틀렸다고? 어떻게?”

“정략결혼은 맞았으나 그녀 스스로 선택한 혼인이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봐.”

운여는 답답함을 풀지 못하고 곧장 되물었다.

그녀의 마음을 장안평에서 충분히 봤기 때문에 운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알기로 다른 남자를 가슴에 품고도 결정할 수 있는 혼인은 정략결혼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깊은 탄식을 터뜨려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나가는 운호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운호야, 그래서 너는 어쩔 생각이냐?”

“조용히 있다가 가려 한다.”

“혼인식은?”

“볼 수만 있다면 잠시라도 보고 싶다.”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어차피 내일이니 혼인식이 끝나는 대로 떠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운상이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결론을 내린 후 다시 입을 꾹 닫았다.

유쾌하지 않은 결론.

웃으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의 끝은 언제나 침묵이다.

 

간양 시내에 나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운호 일행이 월운장으로 되돌아온 것은 밤이 어둑해진 유시 무렵이었다.

재워주는 것도 고마운데 얻어먹기까지 할 수 없다는 운여의 주장에 그들은 객잔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 객방은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월운장 객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풍검문 무인들이라는 걸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들과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한 조용히 머물다 가려 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바로 지금처럼.

마당에는 오 척이 조금 넘는 사내가 홀로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운호 일행을 압박해 온 기세는 사내 하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객방에서 기세를 풀어놓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즉각 방문을 부수고 튀어나올 것으로 여겨지는 날카로운 기세가 전 객방에서 스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결코 호의에서 비롯된 기세가 아니었다.

거의 오십에 달하는 무인의 기세는 마당을 휩쓸고도 남았다.

그러나 상대는 황수전투에서 홀로 적진을 돌파한 운호였다.

“우리를 기다리셨소?”

“그대가 마검이오?”

“남들이 그렇게 부르더이다.”

“나는 석천이란 사람이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소.”

“풍검문에 귀검이 있다고 하던데 그대인 모양이오.”

의외의 인물.

당운영과 내일 혼인해야 되는 사내가 갑자기 찾아왔다는 건 분명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뜻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말을 아꼈다.

함부로 말을 하거나 행동하게 되면 자칫 당운영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바랐소. 당 소저의 마음을 훔친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해서 오지 않을 수 없었소.”

“나와 당 소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오. 내가 그녀를 본 것은 단 세 번뿐인데 어찌 마음을 훔칠 수 있겠소. 모두가 헛된 소문에 불과하오.”

“정말이오?”

“그렇소.”

단호한 운호의 대답에 석천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 한동안 운호를 바라보았다.

황보혜의 말처럼 잘생기지 않은 얼굴이다.

더군다나 키가 작고 체격도 왜소해서 등에 멘 검만 아니라면 시장통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자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엄청난 압박감이 몰려왔다.

고수다. 그것도 수준을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분명 일부러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칠절문과의 전쟁에서 마검의 명성은 중천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떠올라 전 중원에 알려진 지 오래였다.

젊은 무인들에겐 우상이었고 또 어떤 무인들에겐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지닌 무인들은 대부분 후자의 경우에 포함된다.

그들 역시 한때는 어떤 이들의 우상이었을 테지만 마검의 존재로 인해 그 명성을 넘겨줘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석천이다.

석천의 한 걸음은 단순한 한 걸음이 아니었다.

그 한 걸음에 생사가 결정되니 석천의 접근은 도발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운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석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석천이 산이라면 운호는 끝이 없는 대해였다.

“마검의 명성이 하늘을 찌른다더니 정말 대단하오.”

“온 이유나 말하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가 보고 싶어 왔을 뿐이요. 당 소저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데도 그대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구려. 하지만 상관없소. 그대의 말이 거짓이라면 나는 정말 행운아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오.”

“무슨 뜻이오?”

“사랑한 여인의 행복을 위해 거짓말까지 하는 사내에게서 그녀를 얻었으니 내가 어찌 행운아가 아니겠소.”

“무례하군. 볼일을 다 봤으면 그만 돌아가 주시오.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피곤해서 쉬어야겠소.”

“그러리다. 하나 이 말을 꼭 하고 가야겠소. 그녀를 한평생 사랑하며 살겠소. 그러니 그대는 마음 놓고 떠나도 되오. 언젠가 그녀가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 풍검문으로 찾아오시오. 내 그대를 반갑게 맞아주리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 말이오.”

운호는 말을 끊어버리고 돌아섰다.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고 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다.

방으로 들어와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되었다.

일부러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석천을 보게 되자 그동안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불안감이 한꺼번에 수그러들었다.

사람은 눈을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운호가 본 석천은 황보혜의 말대로 우직한 성격을 지녔고 표리부동과 거리가 먼 사람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한 것은 사람의 일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불행해지는 빌미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당운영을 한평생 사랑하며 살겠다는 그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쉽고 아프다. 그러면서도 안심이 되는 것은 그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이 아쉬움과 아픔을 뒤로하고 그녀를 보내줘야 한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젠 정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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