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67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67화
청문자는 운호의 곁을 스쳐 지나며 작게 마른기침을 흘렸다.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움직인다.
특히 당문 칠비에 해당하는 무인의 막무가내 행동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여인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당추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역시 당황한 얼굴로 서 있을 뿐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인내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무인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모욕을 받았고 참아낼 수 있는 시간이 모두 지났으니 이제 점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도전과 응전.
무림의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움직여 왔다.
그랬기에 청문자는 손짓으로 운호를 불러냈다.
진 것도 지지 않았다고 우기는 당문에게 빌미를 만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단호하게 대처해서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 판단이 들었다.
당추의 전음이 급히 들려온 것은 운호가 중앙으로 걸어 나올 때였다.
“이 아이는 나의 친형님인 내원당주 당황의 딸이오. 도대체 왜 이런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칠비 중 가장 강하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오. 더군다나 보름 후 혼사를 치러야 하는 아이이니 사정을 봐주셨으면 하오. 부탁이오.”
운호는 청문자의 말을 듣고 고개를 흔들었다.
혼인까지 한다는 여인이 저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녀와 일 장을 격하고 섰을 때 금방 알 수 있었다.
안면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단박에 알아봤다.
언제나 그리워하던 그녀의 눈이다.
별빛처럼 아름답게 빛나던 눈.
따듯한 미소와 더불어 그윽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소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냉랭한 말투.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음성이다.
그녀의 음성은 북풍한설처럼 차가웠고 칼날처럼 날카로워 심장을 찌를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운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다시 불렀다.
“소저, 보고 싶었소.”
“거짓말!”
“정말이오. 그대를 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소.”
“흥, 사내가 가식적인 말을 입에 달고 사는군요.”
“거짓이라고 해도 좋소. 하지만 내 마음은 항상 그대 옆에 있었소.”
운호의 말에 당운영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운호를 똑바로 바라본 채 말을 잇지 못했는데 두 손은 꼬옥 쥐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운호는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왔다.
“많은 후회를 했소. 마음에 둔 여인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저지른 바보 같은 행동이었소.”
“그만하세요.”
“소저를 아프게 했다면 정말 미안하오.”
“난 이미 정혼자가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혼인을 한다는 것이 정말이란 말이오?”
“그래요. 이 년이었어요. 그 이 년 동안 당신은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하다못해 서신이라도 전해줬다면 나는… 나는…….”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오.”
“오랜 시간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었답니다. 검을 뽑으세요. 당신을 그리워하던 내 마음을 나비에 심어 돌려드릴게요.”
“소저에게 검을 겨누기는 싫소.”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 되면 점창의 마검이 당문의 유성호접에게 패했다는 소문이 천하에 파다하게 퍼질 테니까요.”
“괴롭소. 그만하시오.”
“나는 더 괴로웠어요.”
“정혼자는 어떤 사람이오?”
“그 사람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아요. 이제 그만하고 검을 뽑아요. 분명히 경고했으니 원망하지 말아요.”
운상과 운여는 두 사람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온 청문자의 태도도 이상했고, 싸우기 위해 나선 운호의 표정도 이상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두 사람이 마주 서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운여야, 네가 봤을 때 쟤들 뭐하는 것처럼 보이냐?”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군.”
“너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왜 물어?”
“저 여자, 아무래도 당운영 소저 같아.”
“헉!”
운상의 말에 운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의외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알기로 두 사람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운여는 금방 반박하지 않고 그저 눈만 크게 뜬 채 운상을 바라봤다.
자신은 당운영을 보지 못했지만 운상은 그녀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랬기에 그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냥 직감이야.”
“그 직감, 쓸 만한 거냐? 두 사람, 서로 좋아한다며. 네 눈에는 저 여자가 운호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여?”
“아니. 전혀. 아무래도 이 년이란 세월이 쟤들 사이에 좋지 못한 뭔가를 만든 모양이다.”
“이유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쨌든 내 짐작이 틀렸으면 좋겠다.”
“네 말대로라면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이미 늦었어. 시작하잖아.”
당운영의 별호는 유성호접이다.
유성호접은 그녀가 여인이고 나비 문양의 안면을 썼기 때문에 붙여진 별호가 아니었다.
추혼비접(追魂飛蝶).
당문에는 이대암기술이 있는데 주력 무인들이 익히는 십이연환참과 추혼비접(追魂飛蝶)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이 더 강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하지 못한다.
두 가지 암기술 모두 극에 달하면 만천화우를 펼칠 수 있는 천고의 비학이기 때문이다.
다만 굳이 구분을 한다면 남자 무인은 대부분 십이연환참을 익히고 여자 무인은 추혼비접을 익힌다.
그 차이는 섬세함에 있었다.
십이연환참에도 변화가 있으나 근간을 강력함에 둔 반면 추혼비접은 모든 초식의 근간이 변화였다. 따라서 추혼비접은 섬세한 성격과 손길을 지닌 여인에게 가장 적합한 암기술이었다.
당운영이 익힌 것은 바로 추혼비접이었고, 그 경지가 구성에 달한 절정고수였기 때문에 사천 무인들을 그녀를 일러 유성호접이라 불렀다.
당추가 그녀를 칠비 중 가장 강하지 않다며 부정한 것은 마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실질적으로 그녀의 무력은 흑호(黑虎)와 고하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으나 깊은 심계를 지닌 당추는 그녀의 무력이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친형의 딸이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그녀가 방심한 마검을 쓰러뜨릴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녀의 무력은 강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운호가 검을 꺼내 들자 천천히 춤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인을 앞에 두고 사랑을 속삭이는 여인처럼 춤사위는 고혹적이고 유연해 운호는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별빛처럼 빛났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기쁨이 아니라 지독한 슬픔이었다.
한 마리의 나비가 그녀의 손을 떠나 천천히 날아왔다.
유혹이라도 하듯 팔랑거리며 날아온 흑접은 운호의 곁을 맴돌며 수줍게 춤을 추었다. 마치 그녀가 운호에게 처음 다가왔을 때처럼.
흑접은 일 장을 격한 채 뱅뱅 돌기만 했는데 마치 운호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 것보다 조금 더 크고 화려한 세 마리의 나비가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해서 다가온 것은 흑접이 운호의 몸을 세 바퀴째 돌았을 때다.
세 마리의 나비는 처음의 흑접과 어울려 절묘한 춤사위를 펼치며 운호의 몸을 감쌌다.
따스한 기운.
나비에게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을 것이다.
나비들은 한참을 날았다.
쌍으로 비행했고, 엇갈리기도 했으며 원을 돌며 서로의 몸을 탐하기도 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나비들의 유영은 사랑을 가슴에 품은 연인들의 몸짓 그 자체였다.
나비들만 춤춘 것은 아니었다.
연환십이참의 기본 원리를 추혼비접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운영은 나비들이 춤추는 동안 육안의 경계선에 머물며 옷깃을 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 사위도 나비와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춤을 추는 여인처럼 그녀의 춤은 그렇게 보는 이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춤은 오래가지 않았다.
쌍으로 움직이며 사랑을 노래하던 나비들이 각자의 길을 떠나며 이별을 노래했다.
나비들의 헤어짐은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천릿길로 여겨졌고, 그 몸짓에서 이별의 아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 것은 나비들이 운호에게 인사하듯 잠시 멈춰 섰다가 자신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다.
그리고 검은 안개가 온통 하늘을 뒤덮었다. 온 하늘이 그녀의 손사위에 나비로 뒤덮였고, 기괴한 음향이 공간을 덮으며 운호에게 날아갔다.
공격 의사가 없어 보이던 그녀에게서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경천동지할 공격이 터지자 점창무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기습이나 다름없는 공격이었고, 너무나 치명적이라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보장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운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비들이 몸을 스치며 피를 튀겨냈지만 조용하게 서서 눈물 속의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마치 폭풍우처럼 다가왔으나 살기가 없으니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공격이었다.
그랬기에 피하지 않았다.
그대의 인사를 어이 마다하리. 몸에서 흐른 피가 그대의 마음을 어루만져 아픔을 달래줄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그리하겠네.
그대의 마음이 느껴지오.
나에 대한 미움, 나에 대한 사랑, 나에 대한 그리움.
착한 당신. 그대는 끝내 나를 미워하지 못하는 모양이오.
피가 흘러 방울방울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나비의 공격은 운호의 전신을 망신창이로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운호는 슬픈 웃음을 지은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당운영의 눈에서 눈물이 홍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당신, 왜 막지 않았나요?”
“그대가 준 마지막 선물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소.”
“바보… 바보… 당신… 끝까지…….”
혈인이 되어 서 있는 운호를 향해 그녀의 몸이 뛰어들었다.
그녀는 운호의 온몸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손을 들어 그녀를 달래주지 못했다.
남의 아내가 될 사람. 심장은 그녀를 안으라 했지만 차가운 머리는 그러면 안 된다며 그의 팔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아프게 했으니 더 이상 아프게 할 수는 없다.
그랬기에 온 힘을 다해 참았다.
그녀의 따스한 손, 그녀의 참새처럼 가녀린 어깨, 그녀의 눈물 젖은 얼굴.
눈을 아래로 내리자 나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울지 마오, 그대여.
이것은 모두 그대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니 내가 그대 몫까지 아파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