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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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06화
전혀 뜻밖의 소리를 들은 운여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반문을 했으나 한설아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하기만 했다.
성격 급한 운상이 뒤따라 입을 연 것은 그 역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악검이 남장 여인이란 말이오?”
“그래요.”
“몸이 호리호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분명 남자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소. 비록 대단한 미남자였지만 결코 여자는 아니었단 말이오. 우리가 강호의 경험이 적어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아오.”
“역용한 거예요.”
“역용?”
“그래요. 얼굴을 바꿨어요. 그리고 목소리도.”
“허허, 그것 참. 그런데 소저는 그걸 어찌 그리 확신하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역용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사숙이신 만인자께서는 역용술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세요. 저는 그분께 가르침을 받았답니다.”
한설아의 대답에 운상과 운여는 동시에 입을 떠억 벌렸다.
만인자.
청성의 장로였으나 무력보다는 기행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바둑으로 신선이 되겠다고 떠들며 돌아다니기도 했고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들겠다며 천하의 악산이란 악산은 모두 뒤지기도 했다.
성격 또한 변화무쌍해서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천하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유명한 것은 바로 바둑과 역용술에서 천하제일의 독보적인 기예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한설아가 정말로 그에게 역용술을 배웠다면 충분히 자신할 만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운여였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재차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소저는 남자로 변장한 그가 엄청난 미인이란 걸 어찌 알았소?”
“그녀의 역용은 그저 본바탕에 살짝 분칠을 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어요. 그랬기에 대단한 미남자로 보였던 거예요. 아마 그녀의 본 모습은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울 게 분명해요.”
“허, 그것 참.”
“믿으세요. 정말이니까요.”
“그래도… 소저만 하겠소.”
운여의 질문과 한설아의 설명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운상이 그녀가 말을 마치자 태연하게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표정 없이 말을 끝낸 한설아의 얼굴에서 봄꽃처럼 화사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호호… 난 이래서 운상 오라버니가 좋아요. 어쩜 그렇게 사람을 즐겁게 만들 줄 아세요. 오라버니는 정말 훌륭한 재주를 가졌어요.”
“내가 그런가?”
“그럼요.”
운상이 어깨를 으쓱하자 어느새 다가온 한설아가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친밀감을 표현했다.
마치 사이좋은 오누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운여가 입이 튀어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참, 듣고 있자니 민망하네. 소저, 그건 말이요. 재주가 아니라 아부라는 거요. 우리 이젠 말 좀 가려서 합시다.”
운호는 그동안 치료하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듯 하루를 꼬박 움직이지 않고 요상에 전념했다.
아무도 없을 때는 선명하게 나타나던 오룡은 운상과 운여가 번갈아 자리를 지키고 있자 숨바꼭질하듯 그림자처럼 잠깐씩 모습을 보이다 사라지곤 했다.
마치 신랑 뒤에 숨어 있는 부끄럼 많은 새색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운상과 운여는 그런 용의 모습을 발견했지만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전에도 운호는 다쳐서 치료를 할 때마다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제는 당연하게 여겼다.
천룡무상신공의 효력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
운호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연하게 바뀌었는데 하루가 지나자 외상의 부기가 현저히 가라앉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현천기공의 요상력도 대단했지만 천룡무상신공의 요상력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기 때문에 운여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운호의 치유 능력은 점점 빨라져 이제 하루만 지나면 충분히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후욱…
운기를 끝내며 몸 안에 있던 탁기를 뱉어내기 위함인지 가볍게 숨을 뿜어낸 운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선명했고 고요했다.
“밥은 먹고 그러고 있는 거냐?”
“어라, 깼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냐?”
“하루, 꼬박.”
“꽤 길었군.”
“길었지. 너 지키느라 우리가 고생 좀 했다. 배고프냐?”
“응.”
“너 깨면 같이 먹으려고 우리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 운상이 부를 테니까.”
“어디 갔는데?”
“한 소저랑 바깥에 있다.”
운여가 대답을 흘리며 몸을 날리자 운호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분명 운상은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해서 동굴로 들어오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세 사람은 금방 돌아왔다.
그리고 그중 한설아의 손에는 음식이 담긴 보가 들려 있었는데 보를 풀자 고소한 냄새와 함께 기름종이에 싼 구운 오리와 만두가 담긴 반합, 그리고 궁보계정이 담긴 그릇이 나왔다.
“와아, 이게 다 뭐냐. 진수성찬이네.”
“너 치료하는 동안 한 소저가 문양까지 나가서 사온 거다. 문양은 여기서 백 리나 되는 곳인데도 주저하지도 않고 떠나더라. 꼬박 반나절이나 지나서 돌아왔어, 인마!”
“뭐 하러 그 먼 길을…….”
“글쎄, 뭐 하러 갔다 왔을까… 그걸 모르겠어. 그렇지 않냐, 운상아?”
“나한테 묻지 마. 대답하기 상당히 싫은 질문이니까. 그나저나 배고파 죽겠다. 한 소저가 너 깨면 같이 먹자고 버티는 바람에 우리까지 쫄쫄 굶고 있었어. 맛있는 걸 앞에 두고 참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나 해? 군침 삼키느라 생고생했다.”
“거참.”
운호가 헛기침을 하며 한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매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껄끄러웠지만 그것이 운상과 운여의 식욕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어느새 기름종이를 벗기고 오리를 잘게 찢기 시작했는데 무공의 고수답게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였다.
언제 어디서든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며 행복이다.
그랬기에 네 사람은 연신 웃음꽃을 피우며 준비해 온 음식들을 먹었다.
본격적으로 운상과 운여가 취조를 시작한 것은 음식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을 때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성격 급한 운상이었다.
“자, 먹을 건 다 먹었고. 대충 보니 몸도 추스른 것 같으니까 이제 말해봐.”
“뭘?”
“뭐긴 뭐야. 우리와 헤어져서 움직였던 너의 행적에 대해서 말해보란 거지. 어느 경로로 움직였고, 누구와 싸웠으며, 왜 다쳤는지 상세하게 말해보란 말이야!”
“천원에서 너희들과 헤어져 나는 곧장 화평으로 갔다. 거기에 지옥귀왕을 만났는데…….”
운호는 화평에서 지옥귀왕을 만난 일과 그가 알려준 천이란 조직의 비밀을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천평으로 이동해서 유령마조와 음풍수사를 쫓던 일과 무당의 쌍악을 만나게 된 일들을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패천일도와 만나 목숨을 건 승부를 펼쳤다는 말과 무령에게 구해졌다는 사실을 끝으로 긴 이야기를 끝내자 그동안 잠자코 있던 운상과 운여가 동시에 긴 신음을 흘렸다.
헤어져 있는 동안 운호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졌기에 그들은 저절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막아내지 못했다.
천하백대고수에 포함되는 두 명의 절대고수를 박살 냈다는 사실이 그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운호의 무력이 강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지옥귀왕에 이어 패천일도까지 잡았다면 운호가 이미 초절정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인이었다.
운여가 먼저 요청했고 운상이 뒤를 이어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지옥귀왕과 패천일도를 상대하면서 펼친 초식과 그들의 대응, 그리고 내공의 변화 등 싸움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투의 흐름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한 그들의 질문은 끝이 없을 정도였다.
길고 긴 설명을 끝으로 운호가 입을 닫자 그들의 눈이 저절로 감겨졌다.
설명을 통한 전투 결과를 상상하기 위함이었다.
직접 눈으로 봤다면 훨씬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설명만으로도 그들은 전투를 흐름을 충분히 인지하고 개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두 사람이 눈을 감아버리자 그동안 잠자코 있던 한설아가 대신 나섰다.
“오라버니를 치료한 건 누구죠?”
“대악검이었소.”
“…그랬군요.”
“왜 그러시오?”
“혹시 치료할 때 정신을 차리고 있었나요?”
“처음에는 정신을 잃고 있었으나 두 번째는 깨어 있었소. 그런데 이상하군. 소저는 태악검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구려. 그게 왜 중요한 거요?”
한설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확인한 운호가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물었다.
하지만 한설아는 쉽게 대답하지 않고 운호의 얼굴을 살피며 애써 평정을 찾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그녀의 입이 열린 것은 답답함을 참지 못한 운호가 재차 물었을 때였다.
그녀의 음성은 떨림으로 인해 가볍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대악검은 여자예요.”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운상과 운여는 그녀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고 단순한 놀람만 표시했을 뿐이지만 운호는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악검이 여자라면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친구 놈들은 저희들 일이 아니니 치료한 사람이 대악검이란 사실을 흘려들었을 테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당사자인 자신은 알몸인 상태로 여자에게 중요한 부위까지 모두 보였기 때문에 단순히 은혜를 입은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성질이 아니었다.
새삼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날뛰던 태악검의 태도가 생각났다.
분명 그는 대악검이 여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자신을 치료한 것이 대악검이란 사실을 알자마자 검을 빼들고 죽이려 덤빈 것은 그가 대악검과 단순한 관계가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불타던 그의 눈.
태악의 분노는 단순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긴 것이었다.
도대체 그게 뭘까?
“소저, 혹시 쌍악이 무슨 관계인 줄 아시오?”
“저는 그들이 사형제 간이라 들었어요.”
“음…….”
한설아는 자세한 것을 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단순한 사형제 간이 아니었다.
여자인 무령이 다른 남자의 중요 부위를 봤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분노로 눈이 뒤집힐 정도라면 그러한 경우는 몇 가지에 한정된다.
연인이거나 가족.
특히 연인 관계라면 무상의 그 불같은 분노가 이해가 되었다.
한설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켰기에 자리에는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운호도, 한설아도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침묵을 깬 것은 어느새 눈을 뜬 운상이었다.
“운호, 아무래도 넌 누군가의 가슴에 칼을 박은 것 같구나.”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 운호가 한 일이 아니잖아.”
옆에서 눈을 뜬 운여가 말을 받았다.
그는 운호가 인상을 찡그리자 운상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분위기에 따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데 운상은 그런 면에서 젬병이다.
운상이 변명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는 걸 운여가 중간에서 끊고 말을 이었다.
그의 눈은 운호에게 향하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냐?”
“좋아졌다. 반나절이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어쩔 생각이냐. 패천일도까지 잡았으니 천검회가 그냥 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된다.”
“그럼?”
“강서로 간다. 거기 가서 마창을 잡을 생각이다.”
“넌 도대체…….”
운호의 대답을 들은 운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창은 오히려 지옥귀왕보다 더욱 악명이 자자한 초마두였다.
백대고수의 서열에서도 지옥귀왕보다 무려 스무 계단이나 앞에 있는 절대고수로 강호에서는 그를 일초살로 불렀다.
웬만한 자들은 그의 창에 꼬치 꿰이듯 일 초에 척살되었기 때문이었다.
위험하고 불안하다.
비록 운호의 명성이 중천의 해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절대고수들과의 대결은 목숨을 거는 도박처럼 느껴진다.
지금 강호에서는 그들의 명성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중이었다.
탕마행을 시행하면서 벌여놓은 사건들이 워낙 커서 꼬리를 물고 번졌기 때문에 웬만한 천하인들은 그들이 벌인 일을 다 알고 있었다.
특히 천검회와 벌인 태강전투와 철혈문을 도와 지옥귀왕까지 잡아낸 일로 인해 강호인들은 경악을 멈추지 못했는데 패천일도까지 잡은 게 노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운호는 강서로 가서 마창을 잡겠다고 한다.
지금까지 벌여놓은 일도 수습이 어려운 마당에 판을 점점 크게 벌이자고 하니 고개가 저절로 흔들거렸다.
그때 운상이 불쑥 나섰다.
“마창만 잡으러 가는 건 아니겠지?”
“간 김에 지옥귀왕이 말한 것도 확인할 생각이다.”
“좋군, 좋아.”
“좋긴 뭐가 좋아?”
“일이 점점 재밌어지잖아.”
참, 웃음이 싱그럽다.
옆에서 퉁망 주듯 운여가 말을 가로챘음에도 운상이 활짝 웃었는데 그 웃음이 너무 싱그러워 기분이 좋아진 운호가 따라 웃었다.
잠시 동안 헤어짐이었지만 늘 생각나는 친구들이었다.
같이 이렇게 있으니 즐거움이 그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