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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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05화
운호는 말을 마친 후 내력을 검에 주입했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내력이 검에 도착한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음이 일면 뜻이 되고(沒我一體) 뜻과 몸이 일치되니(心身合一) 검은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검이었다.
운호의 경지는 이미 심신이 하나가 되는 등봉조극(登峰造極)에 이르렀다.
그 말은 애써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언제든 적과 교전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뜻이다.
운호가 치켜든 검에서 뿜어져 나온 시린 검기가 무상을 향해 창처럼 일어섰다.
흑룡검에서 생성된 검기는 무상의 것보다 훨씬 투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검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그에 맞추어 운호의 몸에 새겨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무리한 운기로 인해 간신히 아물던 상처가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운호는 검을 내리지 않고 무섭게 굳은 눈으로 무상을 응시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무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단 일합의 승부.
비록 최악의 상황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지만 점창의 마검은 절대 허무하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랬기에 그는 흔들리는 검을 굳건히 붙잡고 이빨 사이로 무상을 향해 차가운 음성을 날렸다.
“와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운호의 몸에서 터져 나온 피분수를 보며 무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당하게 맞서오던 운호의 몸은 최악이었고 이대로라면 일 초에 죽일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더군다나 놈은 마지막까지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승냥이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빼어든 검을 천천히 끌어내어 견적세를 만들었다.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망설임을 없애기 위해서는 단숨에 목을 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미안하다. 잘 가거라.”
무상의 입에서 작고도 무거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야 하는 자의 마지막 음성은 평소의 말투보다 훨씬 딱딱했다.
잘못된 결정이라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동생을 위한 일이니 설혹 나중에 잘못된 결과로 나타난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랑잎처럼 무상의 몸이 환영을 만들어내며 운호에게 접근했다.
그가 펼친 것은 무당의 독문보법인 현천보(玄天步)가 분명했다.
극상으로 익히면 시전자의 실체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고 알려진 천고의 보법으로 강호십대보법에 꼽히는 절기 중의 절기였다.
현천보를 펼쳐 운호에게 접근한 무상의 몸이 허공에서 맴돌다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연환혈풍(連環血風).
어느새 그의 검은 다섯 개로 변해 운호의 몸을 검기의 그물로 가두고 있었다.
그때 화살처럼 날아온 희뿌연 인영이 운호의 전면을 가로막으며 무상의 검을 향해 마주 검기를 날렸다.
콰앙!
술 취한 것처럼 다섯 발자국이나 비틀거리며 물러났던 인영이 힘든 표정으로 허리를 들었다.
그는 다름 아닌 무령이었는데 충돌의 여파로 안색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사형, 이게… 뭐하는 겁니까!”
똑바로 시선을 부딪쳐 오는 무령의 모습에 무상은 움직임을 멈추고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어느새 호흡을 가라앉힌 후 운호의 정면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시 공격하면 이전처럼 막겠다는 행동이었다.
“무령아…….”
“저 때문입니까?”
“저자는 죽어야 한다… 비켜라.”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저자가 죽지 않으면 네가…….”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이게 되면 사형은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됩니다. 사형이 저 때문에 그런 구렁텅이에 빠진다면 저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걸 바라시는 겁니까!”
“무령아!”
“사형, 검을 내리십시오. 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제 일은 제가 감당할 것입니다.”
“그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으… 음…….”
수긍해서 토해낸 신음 소리가 아니었다.
무령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신 있게 말했지만 무상은 무령에게 걸린 제약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천천히 검을 내리면서도 살기를 풀지 않았다.
지금은 무령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검을 내렸지만 언제든 기회가 난다면 운호를 죽일 생각이었다.
무상이 뒤로 물러나자 무령이 즉시 발길을 돌려 운호에게 향했다.
운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검을 의지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온 피로 인해 주변은 온통 핏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검을 수습한 무령은 그런 운호를 부축해서 자리를 이동시킨 후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그러고는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소?”
“당신들, 도대체 뭐야?”
“뭐가 말이오?”
“한 사람은 살리려고 하는데 한 사람은 반드시 죽이려 하는군. 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소.”
“미안하오. 나의 사형께서 그대를 해하려 했던 것은 불가피한 이유가 있어서였소.”
“그게 뭐기에 사람을 죽이려 하는 거지?”
“그건 말해줄 수 없소.”
“보아하니 저자는 아직도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군. 이봐, 죽이고 싶으면 이리 와라. 신경 쓰여서 편히 눕지도 못하겠다. 끝장을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 거기서 눈깔 부릅뜨지 말고!”
운호는 여전히 살기를 흘리고 있는 무상을 향해 차갑게 말을 쏟아냈다.
무리한 운기로 인해 전신에서 피를 쏟아내면서도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이없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운호는 스스로 죽겠다고 발악하는 사람같이 보였다.
그랬기에 무령은 억지로 일어서려 하는 운호를 가로막으며 한숨을 내리쉬었다.
운호도 그렇고 무상 역시 대단한 성격을 가졌다.
사내로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호승심을 가졌으니 무인으로의 성정은 충분하고도 흘러넘친다.
기묘한 동거.
동굴은 세 사람이 뿜어내는 각기 다른 기운으로 인해 무거운 정적에 빠져들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 다시 밤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무령이 운호의 곁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무상의 기운에서 살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상황에서는 운공요상을 할 수 없었기에 운호는 고통을 참아내며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쩐 일인지 무령은 상체만 치료해 줬기 때문에 허벅지를 비롯한 하체는 핏물에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쓰리고 아프다.
피가 흐르면서 금창약이 모두 씻겨 나간 상처에서는 열이 펄펄 끓었고 끝없는 고통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운호가 기다리던 상황이 변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진이 더 지난 후였다.
반가운 얼굴들.
드디어 운상과 운여가 한설아와 함께 동굴로 들어섰던 것이다.
“어디 보자.”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상체는 치료가 됐는데 왜 하체는 치료를 못 한 거냐. 벌써 창이 생기려고 하잖아, 인마!”
“치료했다. 다시 터져서 그렇지.”
“미치겠네.”
운호의 태연한 대답에 운여가 손을 반쯤 들었다가 놨다.
그런 후 급히 운상에게 눈짓을 보냈다.
척하면 착.
치료를 할 테니 한설아를 내보내란 뜻이다.
하지만 운상이 다가오기 전에 한설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치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랐다.
재밌는 것은 그녀를 따라 무령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한설아가 자리를 비우자 운여의 손은 날아갈 듯 빨라졌다.
바지를 벗기고 피가 굳어 딱지가 진 붕대를 푼 그는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내 꼼꼼히 상처를 치료했다.
그러면서도 잔소리는 어김없이 계속되었다.
“도대체 이 정도로 상처가 심해지도록 그냥 둔 이유가 뭐냐. 운공요상을 했다면 이리되지는 않았을 텐데?”
“사정이 있었다.”
“무슨 사정?”
“날 죽이려고 한 놈 때문에 운기를 할 수 없었어.”
“누가 널 죽여?”
의외의 대답에 황당한 눈을 하고 있던 운상의 시선이 운호를 따라 무상에게로 향했다.
아직도 무상에게서는 살기가 슬금슬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운여보다 인상이 먼저 일그러진 것은 운상이었다.
“저자는 누군데 가자미눈을 하고 너를 노려보는 거냐. 기분 나쁘게?”
“무당의 태악이다.”
운호의 대답에 운상과 운여의 표정이 신중하게 굳어졌다.
쌍악은 무당이 자랑하는 고수 중의 고수들이었다.
운호의 말대로 태악이 목숨을 노리는 것이라면 상황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군. 칠성의 회색 전도복이라… 그런데 널 왜?”
“모르겠다. 무작정 죽이려고 하더라.”
“그럼 나간 자는 대악이겠구나. 이것들이 상처 입은 사람은 핍박했다 이거지… 그런데 어떻게 살았냐. 너 정도 상태라면 죽이는 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
“넌 꼭 내가 죽기를 바란 놈 같구나.”
“설마 그랬겠냐. 궁금해서 물은 거지.”
“날 살리고 이렇게 치료를 해준 건 대악이었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좀 잘 알아듣게 상세히 말해!”
“말 그대로다. 한 사람은 목숨을 살려주고 한 사람은 죽이려고 하더라.”
“환장하겠군.”
“어쨌든 아파 죽겠으니까. 너희들이 쟤 좀 맡아줘. 난 더 악화되기 전에 치료를 해야 되겠다.”
“그래라. 걱정 말고 좌정해. 우리가 저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테니까.”
아무리 천하의 태악검이라 해도 운상과 운여가 기세를 끌어올리자 동굴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기운은 이미 절정을 넘어 파천의 극을 보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동시에 내기를 풀어놓자 동굴이 금방이라도 폭파될 것 같은 강력한 기세가 무상을 압박했다.
물론 일전을 불사할 각오였다면 그리되지 않았겠지만 무상의 마음은 복잡함으로 인해 두 사람의 압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운호를 죽여 입을 막으려던 그의 계획은 동생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순간 반쯤 풀이 꺾여 있는 상태였다.
살며시 흘리던 동생의 눈물.
그 눈물이 너무 슬퍼 보여 그는 동굴에서 벗어나자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별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뇌에 찬 모습.
처음에는 운호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때문에 적의를 내보이던 운상과 운여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기세를 풀어버렸다.
동굴에서 내보이던 살기는 어느새 말끔히 사라졌고 오직 정대함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만 있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운호의 생명을 구한 것이 대악검이었으니 무상의 살기가 죽은 이상 억지로 시비를 계속하기도 애매했다.
그들에게 말을 붙여 온 것은 먼 하늘을 바라보는 무상을 안타까이 바라보던 무령이었다.
“마검과 같이 다닌다는 검귀들이 당신들인 모양이오. 나는 대악이라 하오.”
“이미 들었소. 운호를 구해준 점, 진심으로 감사하오. 반드시 신세를 갚도록 하겠소.”
“점창 사람들은 빚지는 걸 매우 싫어하는 모양이오. 마검도 그러더니 당신들도 그러는구려.”
“점창은 받은 걸 반드시 돌려주기 때문이오.”
“어쨌든 당신들이 왔으니 우리는 떠나겠소. 바쁜 와중이었는데 마검으로 인해 가는 길이 지체되었소.”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무령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바람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무상이 그녀를 따라 사라진 것도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린 그들의 신기는 그들의 무력이 얼마나 강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감탄에 겨운 시선.
운상과 운여는 바람처럼 사라진 그들의 잔영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제 누구와 상대해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강호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막강한 무인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설아가 다가와 입을 연 것은 운상과 운여가 발길을 돌려 동굴로 향할 때였다.
“천하에 소문이 자자한 대악검이 여자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더군다나 엄청난 미인이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