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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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01화
의식은 살아 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운호는 자꾸 감기는 눈으로 달을 바라봤다.
달은 여전히 교교하게 빛나며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식…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지만 한 올의 두려움이나 후회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천하를 휘어잡는다는 절대고수, 패천일도와의 싸움에서 이 정도 상처에 그쳤다면 절대 손해 본 장사는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있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아니, 거의 죽는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천검회의 수중에 있는 지역이었으니 누군가 그를 본다면 반드시 가슴에 칼을 꽂을 것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힘을 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와공을 수련해 본 적이 없었지만 생사의 기로에 몰렸기 때문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눈을 감고 단전으로 내기를 집중시키려 애를 썼다.
그러나 사지에 퍼져 있던 내기는 어쩐 일인지 꼼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는데 내상을 입었는지 단전으로 힘을 모으자 죽은피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시뻘겋게 변한 얼굴이 아귀처럼 일그러지며 입을 통해 피가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패천일도와의 싸움보다 더 처절한 사투가 운호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단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반다경이 지날 무렵부터였다.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한 기운이 단전에 뭉쳐 꿈틀거렸다.
천룡무상심법의 효능이 와공에서 가능할 것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나 최악의 상황에서 막상 기운이 움직이자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아무런 대책 없이 목숨이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운공을 시작한 지 불과 일 각 만에 불청객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운호는 운공을 멈추고 숨도 멈췄다.
누군지 모르나 나타난 사람은 연신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한동안 누군가에게 쫓긴 것 같았다.
나타난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즉시 운호를 업고 신법을 펼쳐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신법은 신묘하기 짝이 없어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속도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운호는 이 상황이 너무 황당했으나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운공을 하기 위해 무리한 것이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살아날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
운호를 동굴에 누인 무령은 즉시 등짐에서 금창약을 꺼낸 후 옷을 벗겨냈다.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가 옷에 눌어붙어 잘 벗겨지지 않았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조금씩 운호의 옷을 벗겼다.
피가 범벅이 된 몸이었으나 정말 기가 막히도록 멋진 몸매가 나타나자 무령의 몸이 움찔했다.
군살 하나 없는 운호의 몸은 작은 근육들이 촘촘히 배어 있어 마치 차돌처럼 강하게 보였다.
칼에 베인 가슴과 양쪽 팔에 금창약을 바른 무령은 눈을 돌려 아래쪽을 향했다.
운호의 하체 쪽도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곳은 아직도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령은 쉽게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같은 남자라면 주저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무당의 제약으로 인해 남장을 하고 살아온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싫어 남자로 살아 온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어 남자로 살아 왔을 뿐이니 사내의 아랫도리를 벗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의 주저함을 뒤로하고 운호의 아랫도리를 벗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수라도 눈을 돌린 채 치료할 수는 없다.
물론 대충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운호처럼 중상을 입은 경우에는 지혈을 하면서 꼼꼼하게 치료해야 되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깝다.
슬쩍 비켜 있던 무령의 눈이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돌아왔다.
남자들은 여자들과 달리 고쟁이를 입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것은 운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하체 쪽으로 눈을 돌리던 무령이 기겁을 하고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보는 남자의 중요한 부분은 너무 징그러워 눈뜨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한동안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있던 무령이 용기를 낸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운호가 정신을 잃고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눈을 뜬 무령은 상체를 치료할 때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아래쪽에 난 상처를 지혈하고 금창약을 발랐다.
강적과 대결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던지 급하게 운호의 하의를 입히기 시작했다.
사내의 아랫도리를 벗겨놓고 같이 있기에는 여자로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벗겼던 것보다 입히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피가 엉겨 붙어 조심스럽게 떼어내면서 벗겼기 때문에 벗길 때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입히는 것은 그보다 배는 더 어려웠다.
그녀의 눈에 운호의 중요 부위가 자꾸 들어왔고 옷을 입히면서도 자꾸 손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최대한 조심하고 또 조심했으나 옷을 입히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꾸 건드리다 보니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문제는 옷을 다 입히고 난 다음이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운호의 입에서 말라붙은 검붉은 피를 뒤늦게 확인한 그녀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는 건 내상을 입었다는 뜻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 분명했다.
그때서야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아챈 무령의 등에서 땀이 새어 나왔다.
기혈이 엉킨 상태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주화입마에 빠뜨리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큰일이다.
사형인 무상과 헤어지면서 내일 오전 풍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운호의 상태를 봤을 때 약속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자신의 부상을 염두에 두고 홀로 광룡십팔도를 가로막은 사형의 안위가 걱정되었으나 운호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운호는 여기에 남겨 두면 죽고 말 것이다.
상청관에 모인 사람은 장문인을 비롯해서 청문자와 청무자였다.
그들은 탁자에 한 장의 서신을 펼쳐 놓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무거워 쉽게 입이 열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예상은 청문자로 인해 금방 깨지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아이들이 너무 위험하오. 내가 내려가 봐야 될 것 같소.”
“내려가시면요?”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겠소.”
“안 될 말씀입니다.”
“무슨 소리요?”
“풍운대는 점창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입니다. 더군다나 운호의 무력은 사형께서 인정할 정도로 강하잖습니까. 그러니 두고 보셨으면 합니다.”
“천검회가 개입되어 있고 그 배경에 괴 단체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위험해질 수도 있소이다.”
“사형께서 가시면 정말 점창이 개입하게 됩니다. 아이들만 있다면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하겠지만 사형이 직접 움직이면 점창은 이번 일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됩니다.”
“두려우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칠절문과의 전쟁에서 이제 겨우 회복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다시 분쟁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 점창은 또다시 오욕의 역사를 다시 맛봐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끄응!”
청문자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문인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려가면 천하에 흩어졌던 풍운대가 자연스럽게 소집된다.
풍운대와 점창십삼검이 모두 모인 채 그 선두에 자신이 서게 되면 점창의 행사로 변할 수밖에 없으니 장문인이 꺼려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백여 년 전 선두에 서서 천왕성과 일전을 벌인 점창은 수많은 세월을 서러움 속에서 살아 와야 했다.
장문인인 청현자는 사문이 혹시라도 다시 한 번 그리될까 봐 경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되는 처사였기에 청문자가 신음 소리와 함께 입을 닫아버리자 대신 나선 것은 청무자였다.
“장문인, 그럼 어쩌실 생각이오?”
“탕마행을 중지하고 돌아오라 하겠습니다.”
“그건 안 되오. 점창의 역사에서 탕마행을 중지한 적은 한 번도 없소이다.”
“저 또한 그러고 싶지 않으나 사형들의 걱정이 크고 저 또한 아이들의 안위가 염려됩니다. 그러니 걷어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 장문인께서는 너무하시는구려.”
“뭘 말입니까?”
“알았소. 장문인의 뜻을 잘 알았으니 지켜봅시다. 나 역시 운호의 무력은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말이오. 대신 신응을 최대한 가동시킵시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움직여야 할 테니 말이오.”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험험!”
청현자가 빙그레 웃으며 되묻자 청무자가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청문자가 나서기 전에 먼저 내려가겠다고 설친 사람은 바로 청무자였다.
그런 청무자가 한숨을 내쉬며 차선책을 제시하자 청현자는 염화시중 같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운상과 운여는 한설아와 함께 급히 천평으로 향했다.
화평에서 장황을 만나 운호의 행방을 알아낸 그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는데 운상은 침을 튀기며 운호의 행동에 볼멘소리를 해댔다.
장황은 운호의 무력에 대해 진정으로 존경을 표했으나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운상과 운여는 불안함에 죽어라고 달려야 했다.
“이놈 이거 미친 거 아니냐고. 귀왕이 있으면 피할 것이지. 거기서 맞상대를 왜 해!”
“이겼다잖아. 그러니까 그만해.”
“우리한테는 그렇게 조심하라며 잔소리하던 놈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어떻게, 만나면 한 대 패줘?”
“당연하지.”
“그나저나 천평에서도 사고 친 거 아닌지 모르겠다. 천검회하고 또 부딪쳤을지 몰라.”
“그러니까 빨리 가자. 걱정되서 죽겠다.”
운여의 말에 운상이 급하게 발길을 옮겼다.
그들의 얼굴은 걱정으로 굳어져 있었는데 뒤를 따르던 한설아는 말 한마디 벙긋 못 하고 그저 묵묵히 움직이기만 했다.
자신으로 인해 다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조금의 내색조차 하지 않아 더욱 미안했다.
걱정되고 불안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그런 이유로 그녀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밤을 낮 삼아 달린 그들이 천평에 도착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철혈문의 뇌호당은 아침 일찍 들이닥친 그들을 살벌하게 경계했으나 자초지종을 들은 후 어제 벌어졌던 일들을 설명했다.
결론은 그들도 운호의 행적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거였다.
적들의 공격을 받아 악전고투 끝에 격퇴했지만 운호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에 일행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만약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운호는 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적들의 뒤를 쫓아갔다는 추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떠난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뇌호당을 떠났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나 뇌호당에서 벌어진 전투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운호가 추격을 했다면 독문표식을 남겨놨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하게 들어맞아 뇌호당이 머무는 전각과 삼십여 장 떨어진 야산에서 표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되었다.
표식을 따라가면 운호가 어디로 움직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 이제 추적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