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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96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4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96화

백 초가 다가오자 두 사람의 격전은 더욱 험해졌다.

지든 이기든 둘 중 하나는 치명상을 입어야 할 만큼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운호가 깔아놓은 음모의 검은 자락이었다.

만약 귀왕이 목숨을 걸지 않고 후퇴라는 방법을 쓰게 되면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자존심이라는 덫을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덫은 멋지게 맞아 들어 귀왕으로 하여금 전력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구십 초가 넘어가면서 두 사람의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워낙 전력을 다해 부딪쳤기 때문에 두 사람의 숨소리는 거칠게 변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마지막 삼 초를 남겨놓고 드디어 미증유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시작할 때 그어놓은 선에서 정확히 여덟 발자국 되는 곳까지 밀렸기 때문에 두 발자국만 더 뒤로 물러서면 이 내기는 운호가 지게 된다.

하지만 내기는 미끼에 불과했기 때문에 운호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가해 마지막 승부에 대비했다.

귀왕은 혈사도법의 최후 초식 귀곡(鬼哭)을 꺼내 들었는데 마지막을 위해 남겨놓은 것 같았다.

미첨도에서 맺힌 핏빛 검기 속에서 한을 품고 죽어간 원혼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구슬프고 섬뜩한 비명.

운호는 흑룡검을 휘둘러 회풍 중 탄(彈)자결을 불어넣었다.

위력 면에서 회풍 중 가장 강한 초식으로 지금처럼 단초 승부에 최적화된 비기다.

문제는 한 번 펼치면 시전한 운호조차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강력했고 치명적이다.

운호는 이를 악물었다.

강호에 나와 한 번도 시전하지 않았던 비기를 펼친 것은 이 한 수로 귀왕을 잡기 위함이었다.

귀왕의 공격에 맞추어 운호는 검에 맺혀 있던 검기를 강하게 튕겨냈다.

쐐액…!

귀신의 울음소리를 흘리며 날아드는 귀왕의 숨겨진 도기를 향해 회풍이 첩첩을 이루며 날아갔다.

온 세상이 운호가 펼친 원형의 검기로 가득 뒤덮였다.

원의 물결.

귀왕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공격하던 힘에 숨겨놨던 마지막 내력까지 쥐어짜서 대응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는 무엇 때문인지 칼에 살기를 담고 있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그의 생명을 단축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절대고수들의 싸움에서 살의를 거뒀다는 의미는 단순한 비무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충돌에 이어 무수한 불꽃이 허공을 향해 터져 나갔다.

병기 간의 충돌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내력으로 인한 것이었기에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고 공간 속을 헤매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소멸되었다.

승부는 백 초를 채우지 않았다.

마지막 일 초를 남기고 밀어낸 운호의 회풍이 귀왕을 땅바닥에 처박았기 때문이었다.

쓰러진 귀왕의 허리는 반이나 잘렸고 입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운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도사라는 놈이 암계를 쓰다니… 쿨럭.”

희미해져 가는 눈을 한 채 귀왕이 어렵게 입을 놀리다가 선지피를 쏟아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며 어깨와 가슴에 상처를 입은 운호가 천천히 다가왔다.

“미안하오. 당신이 도망가면 잡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랬소.”

“나는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알고 있소.”

“왜 그랬는지 아느냐?”

“그건 모르겠구려.”

“도사를 죽이면 지옥에 갈 것 같아서… 으히히히.”

피를 흘리며 웃는 귀왕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신음 대신 괴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농담이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을 그리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마지막 초식인 귀곡처럼 서늘한 웃음을 터뜨린 귀왕이 잠시 호흡을 고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꼬마 도사 놈아, 무공만 뛰어난 게 아니라 머리도 뛰어나구나. 나 같은 늑대를 유혹해서 승부를 보게 만들었으니 너는 여우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널 죽이고자 했다면 너 역시 온전하게 서 있지 못했다는 걸.”

“그랬을 것 같소.”

“참으로 엿 같은 한평생이었다. 이제 눈을 감는다고 생각하니 모든 괴로움이 다 꿈처럼 느껴지는구나. 이리 편해지는 걸 모르고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미친 듯 살아오다니 진정 어리석었다.”

“귀왕, 미안하오. 하지만 약속은 지켜줬으면 좋겠소. 암계가 어디까지요?”

“조만간 천하는 강자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각축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천검회가 벌인 일은 그중 하나일 뿐. 아마 호남과 강서에도 지금쯤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게다.”

“사천에서 벌어지는 일도 같은 맥락이오?”

“내가 알기로 사천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영향을 받긴 했겠지. 팽팽한 힘의 균형을 누군가 깬다면 천하는 금방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당문은 어리석게도 제일 먼저 그 희생양이 된 것뿐이다.”

“주재자는 누구요?”

“그것까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의 주재자는 천검회가 아니라 다른 자들이다. 그들은 그 조직을 천(天)이라고 불렀다.”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오?”

“광오하게도 그렇게 부르더라. 나는 그자들의 세력이 엄청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그것을 어찌 아셨소?”

“헉헉… 마두들을 제외하고 사파의 고수 중 백대고수에 속한 자들은 나를 비롯해서 셋에 불과하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그들과는 교분을 가지고 지내 왔었다. 나를 뺀 나머지가 간 곳이 호남과 강서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내가 한 짓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간 곳은 어디요?”

“천문과… 수라맹… 커억!”

이번에 토해낸 것은 뭉쳐 있던 핏덩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진한 피가 가슴으로 흘러내릴 때 귀왕의 잘라진 옆구리를 막고 있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팔에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는 건 신체의 기력이 모두 빠져나갔다는 뜻이다.

귀왕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흐려진 눈. 간신히 떠진 눈은 여전히 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귀왕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운호의 검이 그의 목을 향해 겨누어졌을 때였다.

 

장황은 돌아서는 운호를 바라보며 꼼짝하지 못했다.

무림십왕의 하나인 지옥귀왕을 소멸시킨 마검의 위력은 그의 행동을 제어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것은 장황뿐만 아니라 철혈문 본단에서 나온 매풍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귀주 전역을 휩쓸고 다니던 검객이었으나 운호의 막강한 신위를 직접 눈으로 견식한 후부터 말을 잊고 말았다.

천천히 다가간 운호가 입을 연 것은 그들 뒤에 있던 부단주 장학이 기세에 압도되어 한 걸음 물러섰을 때였다.

“들으셨소?”

“들었습니다.”

“철혈문은 천검회의 표적이 되었소. 철저히 준비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본 문이 비상 상태에 돌입한 상태입니다. 천검회가 강하다는 건 인정하나 우리도 그리 녹록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오.”

“암계가 있고 귀계가 있습니다. 재삼 숙고해서 행동해야 하오.”

“그러리다. 귀왕을 처단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들어가십시다. 저녁에 반주를 준비하겠소.”

“아닙니다. 나는 지금 천평으로 갈 생각입니다.”

“유령마조를 잡으실 생각이오!”

“나의 목표는 탕마행입니다. 유령마조와 음풍수사를 잡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마검께서 그리해 주신다면 본 문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오. 철혈문의 일원으로서 마검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오.”

“사문의 명을 받고 탕마를 위해 출행한 사람입니다. 저는 제 할 일만 했을 뿐이니 그리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어…….”

장황의 입에서 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천하를 들었다 놨다 한다는 절대고수이자 무림십왕 중의 하나인 지옥귀왕을 죽여놓고도 아무런 생색을 내지 않는다.

만약 이 자리에 마검이 없었다면 바닥에 뒹굴고 있는 시체들은 흑포 괴인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장황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마검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했지만 그의 심성은 그에 못지않게 넓고 깊다.

그랬기에 그는 감탄을 숨기지 않은 채 운호를 바라봤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는 마검과 함께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싶구려. 그대와 마시는 술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술이 될 것이오.”

“고마운 말씀이오. 아마 내일쯤 내 동료들이 당주님을 찾아올 겁니다. 그들은 내가 여기에 있는 걸로 알고 있으니 나를 찾으면 천평으로 갔다고 전해주십시오.”

“걱정하지 마시오. 내 그렇게 하리다.”

 

운호는 화평을 떠나 천평으로 향했다.

장황에게 한 말처럼 당장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오직 사문에서 명받은 탕마뿐이었다.

물론 수많은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천검회가 마두들을 이용하면서 그 속내가 궁금했으나 함부로 뛰어들어 그들의 뒤를 캐다가는 태강처럼 수많은 목숨과 싸워야 하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게 될 것이었다.

쉽사리 결행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귀왕의 말을 들으며 더욱 굳어져 갔다.

천이라는 정체 모를 조직이 천하를 혼돈에 빠져들게 한다는 정보를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막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 해도 개인의 힘으로 그들 모두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탕마는 다르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는 한 그들을 척결하면서 협의 기치를 드높일 수 있으니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었다.

더불어 암중 세력이 그들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로로든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은 순리에 따라야 한다.

천평으로 가서 유령노조를 잡으려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 때문이었다.

유령노조와 음풍수사를 잡은 후 호남과 강서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운호는 탕마행을 하면서 천하의 흐름을 볼 필요성이 있었다.

천이라는 조직의 목적이 무엇인지.

천하가 그들의 손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꿈틀거리는 천하.

새삼 죽으면서 아쉬워했던 막여의 말이 생각났다.

무인으로 태어나 멋진 싸움판에서 살다가 죽고 싶었다던 그의 말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천하가 암계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팽창할 대로 팽창된 무림문파들의 힘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과 다름이 없었다.

누군가 억지로 제어해도 힘들 시기에 오히려 뇌관을 건드리는 세력까지 나타났으니 이제 무림은 난세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천평은 철혈문의 뇌호당이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화평과는 직선거리로 백 리가 떨어져 있고 철혈문의 전초부대가 자리 잡았던 삼도의 후방으로 오십 리에 위치한 남부의 요충지 중 하나였다.

이곳이 유령노조가 이끄는 부대들에게 기습을 당하기 시작한 것은 화평의 풍뢰당이 공격당한 시기와 비슷했다.

치고 빠지는 전략.

워낙 최정예의 무인들로 교묘하게 기습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뇌호당은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분명 화평과 똑같은 상황일 것이다.

운호가 천평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평에서 한 것처럼 철혈문을 찾지 않고 뇌호당이 머무는 전각에서 멀찍이 떨어진 야산에 자리를 잡았다.

경험이 불러온 행동이었다.

기습을 하고 빠지는 자들이라면 굳이 뇌호당과 같이 있을 이유가 없었고 유령노조가 강남삼대마두에 포함될 만큼 강하다 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혈문과의 관계도 껄끄러웠다.

자신이 싸움에 가담한 이유는 탕마의 대상이 철혈문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천하가 혼돈에 빠져드는 지금, 쉽사리 타 문파의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운호는 건량을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저녁노을이 불타듯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을 속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당운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잘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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