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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94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7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94화

운호의 결연한 음성에 막야가 중심을 잡지 못한 몸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휘청거렸는데 찢어진 옆구리에서는 창자가 삐져나오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음성은 약했고 힘들었으나 단호하고 강했다.

“이봐, 마검. 그냥 죽여라. 여기 있는 자 중에서 살려줬다고 고마워할 놈이 있을 것 같은가. 천만에, 이대로 우리를 돌려보낸다면 나를 포함해서 살아남은 파혼당 무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너를 원망할 것이다.”

“당신은 몰라도 저들에게는 가족이 있을 텐데 개죽음을 당할 필요가 있을까?”

“개죽음이 아니다. 원래 무인은 이렇게 살다 죽는 것 아니겠나. 한평생 가족들과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면 이 길을 처음부터 걷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괜한 짓 하지 마라. 우리 역시 너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사파의 무리를 이용하는 걸 보고 사특한 무리라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좋아, 끝장을 내지. 그런데 말이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 봐도 괜찮겠나?”

“뭐냐?”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철혈문?”

“그래, 말해 봐. 궁금하다.”

“크크큭. 이봐, 마검. 그걸 어떻게 말해줄 수 있겠나. 나중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궁금하더라도 참아라.”

“조금만 미리 알려주면 안 되겠나?”

“정 그렇다면 아주 조금만 가르쳐 주지. 그동안 무림이 재미없었어. 무인들이 살기에 너무 조용했단 말이지. 곧 무인들이 살맛 나는 세상이 다가올 거다. 피가 끓는 무림이… 철혈문을 건드린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뭔 소린지 못 알아듣겠군.”

“헉헉… 유도 심문 하지 마라. 네가 아무리 사정해도 더 이상은 안 돼.”

운호가 지그시 바라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 있는 것이 힘들었던지 숨을 가쁘게 몰아 쉰 막여가 말을 끊었다.

하지만 운호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 안 되겠어?”

“졸린다. 자꾸 떠들지 마라. 빨리 쉬고 싶으니까 그만 떠들고 끝내자.”

“힘들어 보이는군……. 더 기다려도 말해주지 않을 것 같구나. 그렇다면 이제 보내주지.”

“맞아, 서 있기도 힘들다. 멋지게 보내줘라. 웃으면서 갈 수 있게.”

막여는 자신의 검을 우방으로 내려뜨려 땅에 걸친 자세로 있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평생 무인으로서 살아온 인생이었다.

가까운 시기에 펼쳐질 멋진 무림을 눈앞에 두고 삶을 마감하려 하니 아쉬운 부분도 있으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어떤 무인보다 멋지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삶이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사내로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다 해봤고 가슴을 터놓은 친구도 사귀었다.

후회할 일도 없었고 미련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강호를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쉬울 뿐.

막여는 감았던 눈을 뜨고 검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막았던 창자가 다시 삐져나왔으나 이번에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멋지게 가기 위해서는 불쌍하거나 초라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깨 높이까지 검을 치켜든 막여의 입에서 고함이 터진 것은 무리한 몸놀림으로 상처 부위가 다시 터지며 분수처럼 피가 흘러나올 때였다.

“파혼당, 미안하다. 좀 더 멋있는 곳에서 좀 더 그럴듯하게 죽어야 되는데 당주가 못나서 모래바람을 맞게 만들었구나. 그래도 어쩌겠나. 이게 우리 운명인걸. 그동안 고마웠다!”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막여의 신형이 운호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뒤를 남아 있던 오십 명의 파혼당 무인이 따랐다.

무언의 함성.

이를 악물고 검을 치켜든 채 달리는 그들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그 가슴과 눈은 거대한 함성을 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운호 일행은 태강에서 벗어나 급속 남하해서 철혈문의 영역으로 물러났다.

운상과 운여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인데, 그들은 단시간 내에 혈룡과 무정객을 잡느라 각기 세 군데에 꽤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여화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철혈문 풍뢰단이 위치한 화평보다도 훨씬 남쪽인 천원까지 이동한 후에야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천검회에서 추적을 한다면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는 당할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거듭되는 부상과 치료였기에 그들은 의방의 아랫목에 누우면서 깊은 한숨을 내리쉬고 말았다.

이 정도 상처라면 최소 삼사 일은 지나야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밥 먹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은 또다시 운공요상법을 통해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운공요상의 요체는 내공을 이용해서 상처 입은 부위의 탁기를 태우는 행위였다.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온 정신을 집중해야 되기 때문에 고역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좋은 면도 있었다.

그들은 요상이 끝나면 방에 누워 하인처럼 운호를 부려먹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거부하며 버티면 바로 한설아를 시켰기 때문에 운호는 울며 겨자 먹는 마음으로 갖은 심부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터진 것은 그들이 천원에 온 지 삼일 만이었다.

운상과 운여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막 움직이기 시작할 때였다.

철혈문을 향한 파상적인 공세.

운호가 미행했을 때보다 훨씬 강한 전력의 만마당이 철혈문의 오대지단을 동시에 공격했던 것이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강남삼대마두로 꼽히는 유령마조, 음풍수사, 지옥귀왕이었다.

그들 중 지옥귀왕은 무림십왕 중의 하나였으며 무림백대고수에 속해 있는 절대고수였다.

철혈문의 북부 병력은 만마당에 의해 습격당하면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으나 철혈문은 이미 전시 상태로 전환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다.

팽팽한 접전.

비록 기습을 당했으나 철혈문은 막강한 고수들을 전진 배치시켜 만마당과 일진일퇴의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 먼저 가야겠다.”

“어딜?”

“너희들은 여기서 마저 치료한 후 따라와. 난 화평으로 가서 지옥귀왕을 잡을 테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 미친 거냐?”

“소리 지르지 말고 내 말 들어 봐. 지옥귀왕이 무림십왕에 속한 고수지만 난 자신 있다. 그리고 놈이 소문보다 훨씬 강해서 어려울 것 같으면 철혈문 뒤로 피할 수 있단 말이지. 어때, 충분히 해볼 만할 것 같지 않아?”

“너 장문인 말씀 못 들었어?”

“들었다.”

“그런데 왜 그래. 위험한 짓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한 걸 그새 잊어!”

“내 가슴속에 든 명부에는 분명 그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나 혼자라면 어렵겠지만 철혈문의 고수들이 도와준다면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탕마행은 위험하다고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미치겠네.”

“이틀이면 되겠지?”

“대충. 그 정도면 치료가 될 것 같다.”

“그럼 이틀 후 한 소저 데리고 화평으로 와. 그 전에 한두 놈 잡아놓고 있을게.”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말 안 들을 거잖아!”

운호가 빙긋 웃으며 말을 하자 운여가 버럭 신경질을 냈다.

그는 먼저 떠나는 운호가 걱정되는지 자꾸 손을 비벼대고 있었는데 그것은 옆에 있는 운상도 마찬가지였다.

점창에서 하산한 이래 가장 강한 자들을 운호 단독으로 잡으러 간다고 하니 불현듯 긴장감이 몰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더욱 걱정이 되었다.

물론 운호의 무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옥귀왕은 누구나 겁낼 수밖에 없는 절대고수 중 하나였으니 자꾸 말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호는 한설아에게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분명 떠난다는 말을 들으면 두 팔의 소매를 걷고 따라나설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심한 잔소리를 들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녀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강남삼대마두로 꼽히는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만약 그녀가 따라온다면 싸움도 하지 못하고 도망이나 다녀야 할 게 뻔했다.

천원에서 화평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백이십 리.

신법을 전력으로 펼치면 불과 한 시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운호가 풍뢰단이 있는 전각으로 다가가자 꽤 많은 무인들이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중에는 부상을 입은 자들도 여럿 보였는데 중상이 아니라면 모두 임무에 투입된 모양이었다.

경계 무인들 중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운호는 손쉽게 접견실에서 풍뢰단주 방패도 장황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역시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어 붕대를 감았는데 그 범위가 제법 컸다.

“마검께서 어인 일이시오?”

“싸움이 있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소.”

“지옥귀왕이 직접 왔다고 하더군요.”

“이 상처는 그자에게 당한 거였소. 귀왕은 워낙 특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소. 그런데 마검께서는 그자를 왜 물으시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그자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철혈문에 폐가 되지 않는다면 지옥귀왕은 제가 잡았으면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와 내 동생, 그리고 본 문에서 나온 매풍검까지 합세했는데도 이리 큰 상처를 입었소. 그자는 진짜 엄청난 괴물이었소. 마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으나 그자를 혼자 상대하는 건 재고해야 할 것이오.”

“만약 내가 그자를 잡지 못하고 패한다면 그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점창을 대표해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마두들을 때려잡기 위해 하산한 몸입니다. 탕마의 기치를 걸었으니 두렵다고 물러설 수 없습니다. 철혈문에서 양보만 해준다면 협으로 악을 제거할 생각입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구려. 하지만 우리와 같이하셔야 하오. 철혈문은 허수아비만 있는 문파가 아니오. 만약 그대가 위험해지면 전력을 다해 도우리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소. 어제부터 세 시진마다 공격을 해왔으니 이제 한 시진이 지나면 다시 공격해 올 것이오. 잡는다면 그때 잡아야 하오.”

“다른 지단도 공격 받고 있다던데 이곳 상황과 비슷합니까?”

“그렇소. 도대체 놈들의 꿍꿍이가 뭔지 알 수 없으나 소수의 정예로 급습한 후 후퇴했기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소.”

“철혈문 본단의 지원은 없습니까?”

“주력들이 지단으로 온다는 전서가 도착했소. 아침나절에 도착했으니 지금쯤 전력으로 오고 있는 중일 거요.”

장황은 본단 주력이라고만 표현하고 상세한 내용은 말해주지 않았다. 문의 병력 이동은 비밀이었으니 장황은 어색하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곤혹스러워하는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데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기에 운호는 입을 닫은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적은 강남삼대마두였을 뿐 철혈문 무인들의 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한 시진은 금방 지나갔다.

막여는 반시진이 지난 후부터 병력을 이끌고 정문으로 나가 적이 오길 기다렸으나 서른의 흑포 괴인은 시간을 꽉 채운 후에야 나타났다.

그들의 선두에는 오 척이 겨우 넘는 단신의 노인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사파의 고수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지옥귀왕이었다.

절대의 경지에 오른 세 명의 마두 중 하나로서 사파인들은 그를 십제의 반열에까지 주저 없이 올렸다.

그만큼 엄청난 무력을 지닌 고수가 바로 지옥귀왕이었다.

따끔거릴 만큼 피부를 자극하는 기세.

내력을 갈무리해 놓은 상태인데도 운호는 지옥귀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를 감지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의 몸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진정 무시무시한 미증유의 거력.

지금까지 만난 어떤 무인보다 강력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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