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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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92화
장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비명은 거의 한 시진이 흐른 후에야 멈췄다.
이백에 달하던 진입 병력은 백오십으로 줄어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을 맞으며 그들은 지체 없이 장원을 벗어나 바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정해져 있는 선을 따라가는 자들 같았다.
그들이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여화였다.
삼도에서 서쪽으로 칠십 리 정도 떨어졌고 삼도와 마찬가지로 천검회와 경계선에 있는 도시이다.
만마당은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조금의 주저 없이 철혈문의 여화 지부를 공격했다.
피의 향연.
그랬다.
만마당은 여화지부에 이어 삼 일 동안 철혈문의 접경지대 지부들을 연이어 박살 내며 진군했는데 마치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자들처럼 보였다.
한 번도 쉬지 않았고, 부상 입은 몸조차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해 미친 듯 병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전신을 피로 목욕한 그들은 악귀로 변한 지 오래였다.
출발할 때 이백에 달하던 만마당 중 이제 남은 자는 불과 열둘.
그중에는 운호가 추적하던 흑의괴인과 왼팔이 잘려 고통스러워하는 구유사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언제나 넷이 함께 다니던 구유사귀는 천강 싸움에서 둘이 죽어 이제 둘만 남았을 뿐이었다. 탐스럽던 그들의 백발은 적의 피와 자신의 피로 물들어 벌겋게 변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화평.
지금까지 공격한 것은 철혈문의 첨병 역할을 하는 지부였으나 화평에는 철혈문 오대지단 중 하나인 풍뢰단이 위치해 있었다.
당초에 출발한 이백의 병력이 온전히 덤벼도 상대가 되지 않을 풍뢰단으로 열둘밖에 남지 않은 만마당은 괴성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도대체 이들을 이렇게 만든 이유가 뭘까?
사마외도의 무리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일단 몸부터 사리는 특성이 있는데 만마당에 포함된 자들은 전혀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공격을 끝내고 나타나던 자들이었으나 이번에는 끝내 아무도 정문을 통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철혈문 무인이 정문과 담장을 뛰어넘어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천검회의 청색 전포의 무인들은 남아 있는 자들이 공격을 시작하자 즉시 정해진 후퇴로를 따라 사라졌는데 더 이상 미련을 남기지 않는 행동이었다.
운호 일행은 천검회가 완전히 사라지자 은신처에서 일어났다.
며칠간의 추적에서 천검회는 아예 후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둘째 날부터 운호 일행은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마치고 떠난 천검회.
스스로 사파의 마인들을 처리했다면 천하인 누구나 박수를 치며 칭송했을 테지만 천검회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경쟁 세력의 첨병들을 박살 내는 차도살인을 하게 만든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가고 말았다.
쉬운 판단이 될 수 없었고 섣부른 추측도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 당장의 행동도 결정하기 힘들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장 성격이 급한 운상이었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현재의 상황이 너무도 황당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어쩌지. 놈들을 계속 추적해야 될까?”
“목적을 이룬 놈들이다. 결국 저희 본거지로 돌아갈 것이다.”
“도대체 이 새끼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나쁜 놈들을 동원해서 철혈문을 치다니…….”
“그놈들도 그렇지만 죽을 줄 뻔히 알면서 날뛴 놈들은 또 어쩌고. 이건 완전히 의문투성이야.”
운상의 투덜거림을 받은 운여가 고개를 외로 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하의 천검회가 뭐가 아쉬워 그까짓 사마외도의 무리를 이용해서 철혈문을 친단 말인가.
무인에게 있어 전쟁은 숙명과 같은 것이다.
힘이 있는 자들은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만약 천검회가 귀주를 두고 쟁투를 벌인다 해도 천하인은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며 당연시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기껏 차도살인이라니 진정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죽어간 자들이다. 자신의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병기를 든 채 불나방처럼 뛰어든 그들의 행동은 눈으로 보고도 못 믿을 짓이었다.
해답은 없고 의문은 늘어났다.
그렇다고 이대로 언제까지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동안 잠자코 있던 운호가 입을 열었다.
“자,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바로 놈들을 추적해서 다시 도균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저곳으로 들어가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는 것이다.”
“철혈문한테?”
“철혈문은 앉아서 뒤통수를 맞았다. 두 문파 간의 싸움이라면 우리가 나서서 상관할 일이 아니겠지만 천검회의 행동은 뭔가 구린 냄새가 잔뜩 난단 말이지. 아마 우리가 알려주지 않으면 철혈문은 천검회의 짓인지 전혀 모를 거다.”
“우리한테 시비를 걸면?”
“그런 일은 없어. 호의와 악의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라면 철혈문은 삼십팔세에 포함될 수 없었을 거야.”
운호 일행은 천천히 걸어 철혈문 풍뢰단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불의의 기습을 받았기 때문에 흉흉해진 풍뢰단의 경계무인들은 운호 일행이 다가오자 인상부터 긁었다.
그들이 검을 뽑지 않은 것은 운호 일행의 접근이 너무도 당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멈추시오. 그대들은 누구요?”
“우리는 점창에서 왔소. 이번 기습에 대해서 당신들에게 알려줄 것이 있으니 안으로 연통을 넣어주시오.”
“명호를 밝히면 전해주리다.”
“마검 운호!”
덤덤하게 나온 운호의 대답에 그때까지 뻣뻣한 자세로 질문하던 경계무인의 얼굴에서 경악이 떠올랐다.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입을 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마검이란 위명은 철혈문의 일개 문도가 감당할 만큼 작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경계무사 중 몇이 급히 안쪽으로 달려간 지 얼마 안 돼서 거의 칠 척에 달하는 장한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황패도 장학이라고 소개했는데 풍뢰단의 부단주를 맡고 있는 무인이었다.
과묵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나타난 후 가볍게 고개만 숙여 예를 갖추었을 뿐, 안채로 안내할 때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으니 절대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장학은 운호 일행을 데리고 중앙에 있는 전각으로 들어섰는데 풍뢰단이 손님을 접견할 때 쓰는 방으로 보였다.
이미 그곳에는 장학과 비슷한 체구의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운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바로 풍뢰단주 방패도 장황으로 부단주인 장학의 친형이기도 했다.
극패를 지향하는 천강도법을 극성으로 익혀 십오 년 전부터 귀주와 감숙에서 쟁쟁한 명성을 떨쳐온 무인이 바로 그였다.
그는 운호 일행을 자리에 앉도록 권한 후 자신도 따라 앉으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누가 마검이시오?”
“내가 마검이오.”
운호의 대답에 장황의 눈이 좌우에 있는 운상과 운여를 훑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는데 장황의 눈으로는 들어오는 자들 중 누가 마검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그 말은 운상과 운여 역시 자신이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로 엄청난 고수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최근 들어 점창의 기세가 대단해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의 무인들을 한꺼번에 보게 되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이 급박했고 점창이 알려주겠다는 정보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찾아온 이유가 이번 공격에 대해서 알려줄 게 있다 들었소.”
“그렇습니다.”
“말해주시오. 귀를 씻고 들으리다.”
“여기만 공격당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소. 접경지대의 지부들이 태반 당했다는 전서가 지금도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중이오.”
“우리는 줄곧 그들을 따라왔소.”
“기습한 자들 말이오?”
“접경지대의 지부들을 괴멸시킨 건 모두 그들 짓이오. 그들은 도균에서 출발했고 철혈문 지부들을 공격하며 여기까지 와서 소멸된 거요.”
“천검회!”
“정확하게 말하면 불곡산이오. 그자들은 천검회에 의해 금제를 당한 사파의 고수들이오.”
장황은 운호의 말을 듣고 눈을 지그시 오므렸다.
철혈문의 정보망도 만만치 않았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삼십팔 세의 일원이니 오죽할까.
침입자들의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그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놈들은 운호의 말처럼 사마외도의 인물이었고, 그중에는 이름만 꺼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정절고수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자들이 왜 철혈문을 공격했냐는 것이었다. 불시에 들이닥친 마검 일행은 그 배후로 천검회를 지목하고 있다.
믿지 못할 일이었으나 운호의 입에서 사천에서 있던 일부터 최근 백룡사와 불곡산의 일에 대한 설명이 지속되자 그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검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남부로 밀려난 철혈문의 분노가 그의 눈에 그대로 담겨 활활 타올랐다.
정말 이것이 사실이라면 도발이고 침략이었다.
공생을 깬다면 죽음을 건 전쟁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혈문의 맹장이었다.
운호 일행은 철혈문에서 빠져나와 도균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은 풍뢰단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상의 끝에 다시 도균으로 향했다.
그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운호였다.
천검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 위해서는 호랑이의 소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일행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삼 일 동안의 여독을 풀기 위해 반나절 동안 여화에서 머물던 그들이 길을 떠난 것은 해가 중천으로 떠오른 오시 무렵이었다.
그들이 추적하던 만마당은 동에서 서로 횡단하며 철혈문의 지부들을 공격했다. 그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렸을 뿐, 막상 여화에서 도균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빨리 돌아간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천검회를 감시하는 것이 전부이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운호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아서 추적자가 없다는 것이었으나 그 다행스러움은 태강(台江)을 넘어서자마자 금방 깨지고 말았다.
이백의 적색검객.
선두에 선 막여와 파혼당의 이백 검객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적막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화에서 도균으로 들어가는 길은 큰 길만 따져도 다섯 갈래가 넘는데 파혼당이 태강을 점유하고 기다렸다는 것은 운호 일행의 이동 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랬기에 운호의 얼굴은 슬그머니 굳어져 갔다.
그들의 행동에서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태강에서 철혈문의 영역까지는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곳 태강에서 그들을 기다렸다는 것은 그 시간 안에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들은 누군가?”
“천검회, 파혼당.”
“우리를 기다렸나?”
“그럼 누굴 기다렸을까.”
“나를 알고 있단 말이지?”
“당연한 말을 하고 그래. 천하의 마검이 어떤 놈인가 무척 궁금했는데 아직 새파랗구나.”
“우릴 기다린 이유는?”
“네가 더 잘 알면서 그런 걸 왜 묻나. 그렇게 물으면 우리만 이상해지잖아.”
빙글거리며 웃는 막여의 얼굴에서 여유가 흘러나왔다.
천하의 마검을 눈앞에 두고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운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따라왔지?”
“너희가 그자들을 따라붙었을 때부터.”
“그럼 도균에서부터였단 말인데, 이제야 나타난 이유는 뭔가?”
“나도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기다린다는 건 참 더럽게 힘든 일이거든.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었어. 너희 일이 끝나길 기다려야 했으니까.”
“일? 무슨 일?”
“쯧쯧, 우리가 너희에게 시킨 심부름.”
“알아듣게 말해. 빙빙 돌리지 말고.”
“철혈문. 가서 본 대로 잘 말했겠지?”
“뭐라!”
막여의 대답에 운호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전혀 예상 밖의 대답.
그의 대답을 듣자 운호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놈들은 자신이 꼭두각시가 되어 철혈문에 사실을 알려줄 거라는 예상까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암계이면서 귀계다.
스스로 해놓고 상대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경로를 통해 알게 만든다는 건 또 다른 암계가 숨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랬기에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복잡해지며 어지러웠으나 운호는 슬며시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고 막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릉거리며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부러지듯 한 자씩 끊어져 나왔는데 유부의 귀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천검회, 참 재밌는 놈들이구나. 그동안 망설였는데 이젠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어디 니들이 깨지나 우리가 깨지나 한번 해보자. 얼마나 숨길 수 있는지 한번 숨겨봐. 내가 끝까지 찾아내서 하나씩 까뒤집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