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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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91화
거대한 전각.
정갈하게 꾸며진 방에 원형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셋.
그중 정면에 앉은 흰 수염을 멋지게 기른 홍안의 노인이 바로 무림십제에 손꼽히는 화검제 육철승이었다.
무림십강 중의 하나인 천검회의 주인.
한 자루 장검을 들면 무적이 된다는 절대고수로서 대소 삼백여 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끈 전신이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의 옆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천검회의 총사인 천기수사 화문탁이었고, 좌측의 마른 노인은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중안(中眼)의 수장 주령이었다.
실질적으로 천검회를 이끄는 주역들.
물론 서열상으로는 주력 전투부대를 이끌고 있는 염라단주 파우신검 단극과 수혼단주 패천일도 성사일이 더 높았다. 그러나 그들은 외단의 주인들로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천검회의 대소사는 대부분 내단을 이끄는 총사 화문탁에 의해 직접 육철승에게 보고되는 체제였다.
그리고 그 수족이 되는 자가 바로 중안을 맡고 있는 주령이었다.
천하에 산재되어 있는 모든 정보망을 총괄하는 자.
그의 탁월한 정보 분석 능력은 중원에서 손꼽힐 정도로 뛰어났고, 거미줄 같은 정보망 운영 능력도 최고 중의 최고였다.
심각한 보고를 했는지 화문탁과 주령의 얼굴은 밝지 못했으나 화검제의 붉은 얼굴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불과 서른도 안 된 자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자네 생각은 그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지금 당장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며칠만 말미를 주시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화검제의 물음에 주령이 말꼬리를 뺐다.
그러자 화검제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 이 사람. 자넨 너무 신중한 게 탈이야. 머릿속에 있는 놈들 있을 거 아닌가. 대뜸 떠오른 자들!”
“나이와 무력만 가지고 추정한다면 대상이 되는 자들은 저희가 분석한 것으로 서른둘입니다. 모두 신진 중에서 절대의 경지까지 오른 자이지요. 그중 강호에 나오지 않은 자들과 현재 위치가 확인된 자들을 빼면 열셋 정도가 남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
“그들을 모두 분석해 봤을 때 마검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황수의 그 마검. 점창의 신성이라는 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점창에서 탕마행을 나선 지 두 달이 넘고 있습니다. 다른 자들은 행로가 추적되고 있는데 마검 일행의 행적이 보름 전부터 끊겼습니다.”
“그것만이라면 마검이라 볼 수 없겠군.”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화검제가 눈을 오므리자 그동안 잠자코 있던 총사 화문탁이 나섰다.
그는 무림사현에 꼽힐 만큼 대단한 천재로서 천검회가 추진하고 있는 전략전술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다.
“그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통령께서 성으로 돌아가실 때 사천에서 마검을 만났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통령이?”
“급하게 떠나셨기 때문에 자세한 건 들을 수 없었으나 통령께서 마검을 만났다면 만마당도 같이 부딪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혈번이나 같이 간 놈들 중 누군가가 백룡사를 노출시켰다는 뜻이군?”
“여기까지 찾아온 게 그자들이 맞는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란 추정이 되는군요. 그들이 시행하는 탕마행이란 목적과 일치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자네 생각은?”
“조금 일찍 판을 벌여야 할 것 같습니다. 계획을 당겨서 만마당 전체를 출진시키고 불곡산은 폐쇄시키겠습니다.”
“마검은?”
“파혼당에 철패와 혈룡, 그리고 무정도를 붙여서 잡을 생각입니다.”
“과한 거 아냐?”
“마검의 무력이 예상외로 대단합니다. 더군다나 그자에게는 조력자가 있으니 그 정도는 보내야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렇게 해.”
“존명!”
자신의 지시에 화문탁과 주령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자 화검제의 손가락이 탁자 위를 노닐었다.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파혼당.
염라전에 속한 네 개의 전투부대 중 하나로서 소속 무인의 숫자는 이백이고 세 명의 대주가 병력을 이끄는 천검회의 최정예 부대였다.
당주는 백야검 막여로서 이십 년간 패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초절정 고수였다.
저녁 무렵 총사로부터 명령을 전달받은 그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은 앞에 앉아 있는 부당주 홍무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총사가 나를 완전히 물로 본 모양이구나.”
“최근 들어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니 파혼당이 어떤 단체인지 총사가 잊은 모양입니다.”
“이거 창피해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란 말이냐. 그까짓 애송이를 잡는데 뭐, 철패와 혈룡, 그리고 무정도까지 데려가라고?”
“참으시죠. 혈압 올라가십니다.”
“너, 나 약 올리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파혼당의 부당주로서 저 역시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회주님의 명령이라 하잖습니까. 냉정하게 행동해야만 책잡히지 않을 테니 참으셔야 합니다.”
“끙!”
홍무의 말에 막여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화를 낼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선 자는 전신을 붉은 옷으로 감싸 입은 반면 창백한 얼굴을 지닌 자였다.
혈패, 자홍.
파혼당주 막여의 둘도 없는 친구로서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혈패라는 별칭을 가질 만큼 불같은 성격을 가진 무인이다.
“야, 막여. 네가 총사한테 꼰질렀냐?”
“꼰지르긴 뭘 꼰질러?”
“그럼 총사가 어떻게 알고 혼망으로 사람을 보낸 거냐? 추월이랑 있을 테니 비밀로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친구란 놈이 그걸 일러바쳐?”
“인마, 내가 안 그랬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거기 있는 건 너밖에 모르는데!”
“아니라니까!”
“네가 안 일렀다고? 그럼 누가… 했을까?”
씩씩거리던 혈패가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를 들은 후에야 우그러져 있는 막여의 얼굴을 확인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막여는 오히려 자신보다 더 열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혈패가 훨씬 더 다혈질이지만 한번 열 받으면 막여 역시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다.
그랬기에 혈패는 슬며시 말꼬리를 흐리며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 혈패를 향해 막여가 혀를 찼다.
“총사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서 그래? 중안을 동원하면 귀주 전체의 개미 숫자까지 알 수 있는 게 그 사람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되는데 당최 머리 쓸 생각을 안 하는 이유가 뭐냐?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녀?”
“허어, 너 뭐 잘못 먹었어? 야 부당주, 너네 당주 왜 저러냐?”
“그게…….”
“넌 나가 있어.”
혈패의 질문에 홍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자 막여가 연이어 신경질을 냈다.
그 소리에 마침 잘됐다는 듯 홍무가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러자 막여가 그가 사라진 방문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한 대 때릴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담긴 시선이다.
“아, 정말 더러워서.”
“너 아까부터 왜 그러는데? 말을 해야 알지. 자꾸 답답하게 만들래?”
“어린애 하나 잡는 데 파혼당 전체를 동원시켰다. 그것도 너와 혈룡, 무정도까지 데려가란다.”
“나만 가는 게 아니었어?”
“혈룡 그 새끼가 이죽거릴 걸 생각하니까 온몸이 다 떨려오네. 아, 씨발.”
“열 받을 만하구먼.”
혈패가 둘도 없는 친구라면 혈룡은 막여와 둘도 없는 앙숙 간이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상하게 악연과 악연이 지속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막여에게는 혈룡이 그런 인물이었다.
막여가 지금까지 인상을 박박 긁고 있던 이유는 총사가 자신을 우습게 생각한다는 것보다 혈룡에게 조소당할 게 너무나 억울했던 모양이다.
결국 같이 다니는 것으로 결정한 운호 일행은 다시 둘씩 나뉘었다.
무더기로 다니면 훨씬 의심받을 수 있고 유사시에 대응이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다시 도균으로 돌아간 운상과 운여가 여행에 필요한 건량과 물을 준비해 온 저녁이 돼서야 운호 일행은 불곡산을 향해 출발했다.
모든 근원은 불곡산에 있으니 설혹 감시망에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가야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운호는 한설아와 함께 어둠을 헤치고 천천히 움직여 불곡산이 시작되는 능선에서 삼백 장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자리를 잡았다.
산을 오르든 내리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지이기 때문에 이곳만 지키면 병력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운상과 운여는 반대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어둠에 가려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오늘따라 달마저 짙은 구름에 숨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또다시 하염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혼자라면 불곡산을 등반해서 직접 눈으로 감시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한설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말이라도 했는데 지금은 말조차 하지 못한다. 천검회가 불곡산을 철저히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소음이라도 내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저 귀를 기울이고 적의 움직임이 들려오길 기다리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운호의 마음은 한설아의 움직임으로 인해 금방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작은 손길.
어둠을 뚫고 다가온 그녀의 손길이 가슴에서 머물다 천천히 목으로 올라왔다.
그런 후 얼굴을 만졌다.
눈, 코, 입을 차례대로 소중하게.
마치 금방이라도 깨지는 소중한 물건을 만지듯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안타까웠다.
그녀의 머리가 가슴으로 다가온 것은 손길이 거둬지는 게 아쉽다고 여겨졌을 때다.
숨이 막혀왔다.
머릿결의 부드러움과 향기가 그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억제시켜 숨 쉬기가 불편하도록 만들었다.
운호가 꿈틀거릴수록 그녀는 더욱 밀착해 들어왔다.
엄마 품을 파고드는 갓난아이처럼.
그랬기에 운호는 팔을 들어 그녀를 감쌀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머리가, 그녀의 가슴이 자꾸 미끄러져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정지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무료함과 싸워야 할지 걱정하던 마음은 이미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오직 운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그녀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산에서 살며 청정한 마음을 키웠고 수련을 통해 극기를 익혔으나 그녀는 충분히 그런 것들을 깨뜨릴 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
천검회의 총사가 만마군으로 부르던 사마외도의 무리가 불곡산을 내려온 것은 인시 무렵이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청색 전포의 검객들이었는데 운호가 산 정상에서 마주친 자들이었다.
인시라면 날도 밝지 않은 새벽이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움직인다는 건 은밀하게 뭔가를 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놈들은 산을 내려온 후 신법을 펼쳐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 속도 또한 매우 빨랐다.
거의 두 시진이 넘도록 한 번도 쉬지 않았는데 이동 거리로 따진다면 백오십 리가 넘었다.
문제는 놈들이 이동한 곳이 삼도(三都)라는 것이다.
귀주의 양대 강자 천검회와 철혈문.
삼도는 그 두 문파의 경계선을 이루는 도시로 철혈문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지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비록 천검회의 막강한 전력에 의해 조금씩 밀려 귀주의 북부에 터전을 마련했지만 철혈문은 아직까지 무림삼십팔세에 포함될 만큼 강력한 세력을 가진 문파였다.
천검회가 지금까지 귀주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이유는 그만큼 철혈문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끝장을 본다면 천검회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수밖에 없으니 눈엣가시 같은 존재임에도 공생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운호는 운상과 운여가 좌방 오십 장에 위치해 있는 걸 확인하고 거대한 전각을 포위하는 만마당의 움직임에 눈살을 찌푸렸다.
공격 진형이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기 때문에 장원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경계병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운호는 이곳이 철혈문의 삼도지부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경계병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의아함을 느꼈다.
새벽에 무인들이 경계를 선다는 것은 이 전각이 평범한 전각이 아니란 걸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외로 만마당의 공격은 금방 시작되었다.
청색 전포의 무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만마당만이 전각을 타고 넘어 공격을 시작했는데 놈들이 담장을 타고 넘는 순간부터 장원에서 애끓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구슬픈 비명 소리에 운호의 신형이 움찔거렸다.
공격하는 자들의 존재를 알기에 당하는 자들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마음보다 도와줘야 된다는 마음이 앞섰다.
음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새벽의 진입.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나 만마당의 무력과 공격 시간을 감안한다면 장원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나 버티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운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있는 거대한 적의 정체를 확실히 벗겨내지 못한 지금 작은 움직임으로 대계를 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