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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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89화
검객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하고 신속해서 열일곱의 사내가 광장으로 나온 것은 불과 반각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파무인들이 광장으로 나온 것과 동시에 청색전포검객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미리 언질이 있었던 모양인지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검객들이 먼저 신형을 날리자 사파무인들은 지체 없이 그들을 따라 신법을 펼쳐 광릉을 벗어났다.
그 모습이 마치 어미를 따르는 기러기 떼 같았다.
운호가 은신처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다.
아무리 빠른 신법을 가진 자들이라 해도 추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운호는 그들의 희미한 흔적을 따라 여유 있게 움직여 나갔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이제 손바닥 위에 놓인 거나 다름없었다.
이십여 명의 사내가 한떼가 되어 쾌속하게 움직이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기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거의 두 시진을 달렸는데 방향은 북서쪽이었다.
인적이 끊긴 지는 오래였고 주변은 온통 산이다.
놈들은 미로처럼 펼쳐진 산자락을 계속해서 타고 넘은 후 한참을 더 달려 기암괴석이 줄줄이 이어진 괴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악산이자 험산이다.
수직으로 보이는 절벽이 곳곳에 자리해 수많은 사람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을 거란 추측이 들 정도로 험악한 산이었다.
운호는 산비탈에 도착한 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워낙 험산이라 조금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후방을 경계한다면 아무리 운호라도 발각될 위험이 컸다.
추적자에게 불리한 지형이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놈들 역시 지형 특성상 빠져나갈 틈이 없으니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운호가 다시 움직인 것은 일각이 지난 후였다.
이전과는 다르게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쳤다.
은폐가 불가능한 지형이라면 차라리 전력으로 움직여 빠른 시간 내에 이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상에 도착한 운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오르는 길은 분명 악산이었지만 정상에 도착하자 엄청난 규모의 분지가 나타났다.
그 분지에는 대규모 막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추적해 온 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대신 오십에 달하는 청색전포무인이 분지를 지키는 게 보였다.
병력의 집결이다.
막사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있으나 분지에는 상당수의 무인이 모여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더군다나 탁한 기운이다.
분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어둡고 칙칙했으며 진득했다.
모인 자들이 사마외도에 속한 자란 뜻이다.
도대체 뭘까?
천검회는 무슨 이유로 사마외도의 무리를 이렇게 모아놓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던 운호의 눈이 분지 외곽을 훑어나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주할 수 있는 지형으로 보였다.
청색전포무인들의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나 막사에 들어 있는 자들이 떠나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절대 막을 수 없는 지형이다.
하긴 지형뿐만이 아니다.
여기로 오던 흑의사내나 구유사귀 같은 고수들이 막사에 더 들어 있다면 청색전포무인들은 무력으로도 그들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로 아주 단순한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첫째, 사마외도 무인들은 자발적으로 오지 않았지만 탈출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흉포한 기운을 뿜어내던 흑의사내와 구유사귀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마디로 꺼내지 않았고, 오직 분노의 눈으로 청색전포무인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행동이고, 무엇인가에 의해 억류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
둘째, 천검회는 이들을 병력으로 활용하려는 게 분명했다.
분지에 설치되어 있는 수많은 전막은 전쟁을 수행하는 병력을 수용할 때 사용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병력으로 활용할 생각이 없다면 이렇게 끌어모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셋째, 이자들은 천검회가 나서기 어려운 곳에 쓰기 위한 소모용이다.
단순하게 전투력만 가지고 따진다면 지금 분지를 차지하고 있는 사파무인들은 천검회와 전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처럼 모아놓은 것은 다른 데 요긴히 쓸 일이 있다는 뜻이다.
일례를 든다면 사천에서 표행을 털 때처럼 말이다.
“나와!”
분지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운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숨어 있던 바위 틈에서 일어났다.
좌측 바위 군을 타고 세 명의 청색전포무인들이 나타나 그가 있는 곳으로 똑바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는 음성.
낮지만 강했고, 사람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묘한 압박감이 있는 목소리였다.
운호는 다가오는 자들을 지켜보다 그들이 나타난 능선을 비롯해서 산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자신이 이쪽으로 올라왔다는 걸 미리 알지 못했다면 지형상 절대 자신이 숨은 곳을 알고 접근할 수는 없었다.
이미 한참 전에 산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누군가가 봤다는 뜻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경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지금에 와서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자들의 선두에는 광릉에서 본 곰보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무력에 대해 한 번도 의심을 가진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거침없는 발걸음. 기습에 대한 염려는 아예 생각조차 안 하는지 그는 가슴을 활짝 열어놓은 채 접근해 왔다.
가소로운 짓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너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도대체 니들 뭐냐?”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왔단 말이지?”
“대충은 아니까 감출 생각 하지 마. 천검회까지는 안다. 어디 소속인지나 말해.”
“하루살이 같은 놈이로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이 산에 미친놈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건 귀주 전체가 다 아는 사실이다. 난 단지 확인하러 왔을 뿐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구나.”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지 궁금해 죽겠다. 그러니 나한테 조곤조곤 예쁘게 설명해 봐.”
“네 정체는?”
“궁금증을 못 참는 사람 정도로 하자.”
“죽음에도 종류가 있지. 순순히 정체를 밝히면 단박에 숨통을 끊어주마. 하지만 계속 꼴통 짓을 한다면 그땐 살점을 하나씩 뜯어내어 죽인다.”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네 실력을 너무 과신하지 마라.”
“너 정도는 충분하고도 남아!”
곰보사내의 검이 저절로 뽑히는 것처럼 검갑에서 빠져나오더니 곧장 운호에게 폭사되어 왔다.
과연 큰소리칠 만큼 빠르고 강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마검 운호였다.
기세의 갈무리가 숨 쉬듯 편해진 건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적이 눈앞에 있어도 조금의 기세조차 흘러나오지 않으니 곰보 사내는 운호의 무력이 어느 정돈지 예측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검(殺劍).
운호의 검은 사천을 종횡하던 칠절문과의 격전에서 이미 수많은 피를 묻힌 살검이다.
살검에는 인정도 없고 자비도 없으며 한 올의 망설임도 없다.
단숨에 적의 명줄을 끊어놓는 검, 그것이 바로 살검이다.
곰보사내의 빠른 일격을 섬전으로 비틀어 튕겨낸 운호는 곧장 따라 들어가며 풍영(風影)을 펼쳤다.
이미 정해진 순서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고 연환이다.
그러나 부드러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이었다.
운호의 일검, 일검에는 미증유의 압력이 담겨 있었는데 마치 벼락이 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으나 곰보사내는 운호의 검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방을 휩쓸며 다가온 무형의 검기를 향해 십이검을 연속으로 찔러냈다.
굳은 눈동자, 악물린 이빨.
그의 눈에 담긴 것은 경악이고 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풀어지지 않는 의문이었으나 그의 검에 담긴 것은 혼신을 다한 최후의 투지였다.
운호가 검을 꺼내어 자신의 검을 밀어낸 순간부터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연한 태도에서 한 수 가지고 있는 자란 건 예상했지만 상대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고 그 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자신의 검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무림에는 자신보다 강한 자가 많다는 걸 알지만 자신의 검에 대한 자부심은 잊지 않고 살아왔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무인으로 태어난 이상 죽음은 항상 옆에 있는 것이니 자부심을 가진 채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정도로 그의 무력은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큼 강했다.
하지만 적의 검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운호에게 향한 자신의 최후 공격은 철벽을 찌른 것처럼 튕겨져 손아귀를 찢어냈다. 곧이어 시린 검기의 물결이 새하얀 빛으로 변하며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운호는 세 사내를 해치운 후 곧장 몸을 날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적들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자신의 추적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최대한 빨리 자리를 피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썼지만 천검회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원하지 않은 일들이 문득문득 일어나곤 하는데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백색 무복으로 통일한 열두 명의 도객이 퇴로를 차단한 채 무심한 눈으로 운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줄기 바람조차 통과하지 못할 진공을 만들고 있는 자들.
그들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침잠되어 있었고,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하나의 칼이 되어 시퍼런 예기를 뿜어내었다.
하나하나의 무력을 논한다는 건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개인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인 자들이었다.
피할 수 있는 방위를 완벽하게 차단한 진형.
그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는 오로지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운호는 산으로 되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대들은 누군가?”
“천검십이도.”
중앙에 선 자에게서 묵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저음의 목소리는 상대를 위압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겠지만 듣는 자는 그렇지 않았다.
‘쯧쯧, 어쩐지…….’
대답을 들은 운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천검십이도의 명성은 중원에 나오기 전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다.
천검회가 자랑하는 무적 특수타격대 중의 하나로서 적들의 수장을 때려잡기 위해 구성되었다. 그들이 익힌 천뢰마도는 중원백대도법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절학 중의 절학이다.
다시 말해 강적 중의 강적이란 뜻이다.
하지만 운호의 얼굴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를 막은 이유는 뭔가?”
“그거야 당연히 죽이기 위해서 아니겠느냐. 천검회는 쥐새끼를 키우지 않는다.”
“말 조심해. 혓바닥을 잘라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배포가 큰 자로군. 위에서 만난 자들은 죽였느냐?”
“나를 막는 자는 그냥 두지 않는다.”
“죽였다는 뜻이냐?”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너의 정체가 뭐냐? 감히 천검회의 행사에 관여하다니.”
“구린내가 진동해서 잠시 들렀을 뿐이다. 그러니 그냥 가면 안 되겠나?”
“이름을 대라. 이름을 말하면 약소하나마 목비를 세워주겠다.”
변하지 않은 차가운 눈.
그런 눈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 그의 말은 사실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자신의 손에 죽은 자를 묻어줄 만큼 아량이 있다는 뜻인데, 한편으로는 강자의 여유로도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이었고 운호의 생각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나는 너희와 싸울 생각이 없다. 지금이라도 길을 열어주면 그냥 가겠다.”
“넌 이제 네 마음대로 갈 수 없다. 무슨 목적으로 여길 온 건지, 네 정체가 뭔지 자세하게 말한다면 살려줄 수도 있다. 어쩌겠느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뽑아라! 상대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