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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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88화
천검회가 귀주에 나타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삼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까지 귀주는 철혈문이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천검회는 불과 삼 년 만에 철혈문을 북부로 밀어내고 성도인 귀양을 비롯해서 삼대도시를 완전 장악하는 최대 세력으로 부상했다.
회주는 십제의 일인으로 불리는 화검제 육철승이었고, 그 밑으로 무림백대고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두 명의 절대고수 파우신검 단극, 패천일도 성사일이 뒤를 받치며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삼전 팔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투부대는 중원 어느 문파의 정예들과 싸워도 밀리지 않을 만큼 강력할 뿐만 아니라 외부로 나타난 것만 헤아려도 삼화, 오룡, 칠수, 구혈객, 십이도, 십팔영, 이십삼객, 삼십이파 등 전천후 특수타격대를 보유하고 있어 무시무시한 전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천검회의 진정한 무서움은 삼노, 오륜, 칠현, 섬전도, 선풍검 등 자유롭게 움직이는 극강의 무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일정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채 일이 있을 때마다 개별적으로 움직였는데 그 숫자가 삼십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인들은 천검회가 세상에 내놓지 않은 채 숨겨놓은 비밀병기들이 별도로 있을 것이란 생각하고 있었다.
노출되지 않았을 뿐 천검회 정도의 문파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게 천하인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운호는 손짓으로 한설아를 뒤로 물러나게 만든 후 자신도 천천히 움직여 천검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발각이라도 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천검회는 절대 쉽사리 건드릴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운호와 한설아는 그길로 도균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풍월루로 들어갔다.
풍월루는 귀양의 객잔만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손님도 꽤 많은 편이었다.
아직 운상과 운여는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호는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시켰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설아가 입을 뗀 것은 점소이가 주문을 받고 돌아간 후였다.
“천검회가 관련되어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나도 그렇소. 일이 점점 커지는구려.”
“오라버니, 어쩌실 생각이죠?”
“일단 친구들을 기다려야 할 것 같소. 그들이 다른 정보를 가져올 테니 종합해 봐야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할 수 있을 거요.”
“표물을 가져간 게 천검회일까요?”
“지금 정황으로 봐서는 혈번의 얘기가 틀리지 않으니 일단 의심하는 게 맞소. 하나 증거를 잡지 못하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잡는다 해도 추궁하지는 못할 것 같소.”
“그럼 어떡하죠?”
“은밀히 따르면서 기회를 봐야 하오. 천검회가 신비인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먼저 알아내야만 표물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소.”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대답을 하는 운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점점 일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문의 명을 받고 사파의 무리를 척결하는 탕마행에 나섰으나 나선 지 두 달 만에 거대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한설아를 도와 표물을 찾으려 한 건 청성을 도와준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명부에 적힌 사마외도의 무리를 손쉽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검회라니.
겨우 잡은 꼬리가 천검회를 향해 들어가자 운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기서 천검회와 분쟁이 생기게 된다면 자칫 사문인 점창에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칠절문과의 전쟁에서 얻은 상처를 이제 간신히 치유하기 시작한 점창에게 천검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말문을 닫은 채 운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한설아도 똑같이 시선을 식탁에 고정시킨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침묵이 깨진 것은 점소이가 소면과 만두를 들고 와 식탁에 놨을 때였다. 마침 운상과 운여가 객잔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손을 들자 좌에서 우로 시선을 돌리던 친구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운호는 돌아서는 점소이에게 추가로 음식을 시킨 후 자리에 앉는 그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디였어?”
“광릉.”
광릉은 수십 개에 달하는 고대제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제왕의 무덤이 있다는 것은 사당이 있다는 뜻이고, 그 주변으로 촌락이 형성된 곳이라는 걸 의미했기에 운호는 검미를 찡그렸다.
외딴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면 감시하기가 쉽지 않다.
“놈들은 광릉 미현문으로 들어갔는데 다른 놈들도 있었다.”
“먼저 온 놈들이 있었다는 거야?”
“네 명의 백발검객.”
“구유사귀!”
“맞아, 우리 명부에 있는 놈들. 그리고 둘이 더 있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더라.”
구유사귀는 운호의 가슴속 명부에 들어 있는 자들이다.
사실 겉모습만 봐서는 누군지 쉽게 알 수 없었지만 몇몇은 특색 있는 외모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구유사귀였다.
호남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살인마들로서 넷이 합공하면 절정무인도 퍽퍽 나가떨어질 만큼 강한 무력을 가졌고 언제나 백발을 휘날리며 사람을 죽인다 해서 지옥의 귀신 구유사귀라 불렸다.
아직까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백룡사에서 나온 자들 중 칼 같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던 자 역시 분명 명부에 있는 자일 것이다.
추적을 하면서도 그의 기세가 너무나 대단해서 거리를 한참이나 떨어뜨려야 할 정도였으니 분명 구유사귀보다 더 지독한 자일 터였다.
모두 합해 열하나.
단순한 숫자는 의미가 없지만 흑의무복 사내나 구유사귀가 천검회에 의해 조정된다는 것은 그 이면에 엄청 복잡한 일들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너는?”
“놈은 천검회로 들어갔다.”
“뭐라고?”
운호의 말에 운상과 운여가 너무 놀랐는지 고함을 질렀다.
그런 친구들을 급히 수습한 운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며 운호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놈들은 천검회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면 표물도 그자들 짓이라는 거잖아.”
“그럴 가능성이 커.”
“미치겠네.”
“어쩔 테냐? 여기서 더 진행되면 분명 천검회의 시선에 걸려들 거다. 그리 되면 상황이 무척 복잡해지지. 천검회가 진짜 흉수라면 당연히 표물은 회수하지 못할 거다. 정말 천검회 수중에 떨어졌다면 표물이 천하를 살 수 있는 보물이라도 찾긴 어려울 거야.”
“답답하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첫째는 깨끗이 포기한 후 귀주를 벗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광릉에 있는 놈들을 따라다니며 놈들의 목적이 뭔지 알아보는 거다.”
운호가 제안하자 운상과 운여의 표정이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변했다.
두 가지 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가자니 억울하고 놈들을 추적하자니 천검회에 대한 부담이 크다.
만약 충돌이라도 벌어지게 되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
그렇다고 다른 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운호가 제시한 두 가지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운호만 쳐다볼 뿐이었다.
결국 다시 입을 연 사람은 운호였다.
“너희가 오기 전에 심사숙고해 봤는데 난 놈들을 추적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천검회가 관여되어 있다 해도 내 가슴에 명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부에 있는 자들, 그자들을 잡는 것이 사문에서 우리에게 내린 명인데 어찌 그냥 돌아간단 말이냐.”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부담이 커. 그러니까 망설여지는구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천검회는 그대로 있겠지만 놈들은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바로 광릉으로 가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어.”
“애초에 널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이상하게 너만 따라다니면 피 볼 일이 생긴단 말이야.”
“그러게 말이다. 네 말을 안 믿었는데 이젠 확실히 믿어야겠다. 어쩔 수 없지. 얼른 밥 먹고 일어서자고.”
운호가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 일행의 행동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길이 아무리 위험한 길이라 해도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고 커온 점창의 풍운대였으니 운호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운상이 먼저 엄살을 부렸고, 뒤이어 운여가 맞장구를 쳤다.
이 와중에도 그들은 이 상황에 대해 농담하는 걸 잊지 않았다.
운호 일행은 식사를 하고 곧장 광릉으로 향했다.
미현문은 광릉 중앙을 가로막듯 선 대문인데, 그 안으로 들어서면 사당과 능이 줄지어 나타난다. 마을과 광릉의 경계를 나타내는 문으로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문이라 불린다.
천검회가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일행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옷을 갈아입는 일이었다.
운호 일행은 점창의 상징과도 같은 흑색 전도복을 벗었고 한설아도 간편한 경장으로 바꿔 입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번에도 둘씩 갈라졌다.
은밀하게 감시하고 추적하기 위해서는 적의 이목에서 조금이라도 더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운상과 운여는 미현문을 통해 광릉으로 들어갔으나 운호와 한설아는 광릉이 한눈에 보이는 근처 야산에 올라 전체를 관망했다.
원, 근을 한꺼번에 감시함으로써 행적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마을 쪽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으나 광릉 쪽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놈들이 마을 사람들과 섞이는 것을 우려했으나 마을과 광릉은 완벽하게 다른 세상이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그림처럼 보일 정도로 광릉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한동안은 긴장감에 젖어 침묵 속에서 광릉을 주시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점점 긴장이 누그러들었다.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자들을 지켜본다는 건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 짓이었기에 운호와 한설아는 한 시진이 지나자 슬금슬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들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차피 놈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여기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묻는 것뿐이었다.
운상이 그들 쪽으로 기쾌하게 날아온 것은 어둠이 몰려와 사람의 얼굴이 흐릿해졌을 때다.
“왜 왔어?”
“이 새끼들, 사당에 모여서 꼼짝도 안 해. 그 마른 놈 때문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지켜봤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이동하지 않을 모양이다. 한 소저를 빼고 너와 나, 운여까지 셋이 돌아가면서 감시하는 게 어때?”
“놈들이 움직이면?”
“그사이에 두 놈 더 늘었더라. 아무래도 여기는 놈들을 집합시키는 장소 같아. 인원수가 차면 조만간 어딘가로 이동할 것 같으니 그때 맡은 사람이 목적지까지 따라갔다 오는 걸로 하자고.”
“다른 사람은 객잔에 머물면서 기다리자는 거냐? 좋은 방법이다. 어차피 싸우지 않을 바에는 전부 몰려다닐 필요 없겠지. 운여한테는 말하고 왔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그렇게 하는 걸로 알라고 했다.”
“교대는?”
“두 시진.”
운호는 검을 챙겨 객잔을 나섰다.
지난 이틀 동안 돌아가며 감시했으나 변한 것은 정체불명의 다섯 놈이 더 들어왔다는 것 외엔 변한 것이 없었다.
지루한 시간은 지속해서 지나갔고, 괴로운 교대 시간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두 시진마다 교대하기로 했기 때문에 운호가 객잔을 나선 것은 여명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다.
신법을 펼쳐 광릉으로 향했다.
일어나기 싫었으나 막상 나와 신법을 펼치자 시원한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치며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었다.
은닉한 곳에 도착하자 운상이 귀신같이 나타났다.
“왔냐?”
“수고했다. 가서 쉬어라.”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네. 생각 같아서는 저 새끼들 한꺼번에 모아서 박살 내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크크, 가서 실컷 잠이나 자.”
“당연하지. 고생해라. 난 간다.”
밤을 꼬박 새웠으니 힘들었을 것이다.
운상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몸을 날려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사당의 숫자는 열셋.
놈들이 들어 있는 것은 그중 다섯이었는데 지금은 잠이 들었는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자리를 깔고 은닉한 채 최대한 편하게 몸을 기댔다.
새벽인 지금은 상황이 변동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판단에 운호는 기감을 열어놓은 채 눈을 감았다.
가면 상태에 들어간다 해도 놈들이 움직인다면 즉각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호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그토록 바라던 상황 변화였고, 그 변화는 청색 전포를 입은 다섯 명의 검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서늘한 기운.
그들 중앙에 선 자로부터 생성된 기세다.
한마디로 고수란 뜻인데, 이 정도 기세라면 사당에 들어 있던 마른 체구의 사내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절정을 훨씬 넘어선 자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