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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87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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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87화

백룡사(白龍寺).

귀주의 남부에는 동서로 길게 횡단하듯 발달한 차령산맥이 위치했고, 사찰은 그 줄기 중의 하나인 용화산에 틀어박혀 있었다.

귀양으로부터 삼십 리 떨어진 용화산은 높이가 삼백 장에 달했는데 대부분 바위로 구성되어 멀리서 봐도 단박에 험산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백룡사가 위치한 것은 그런 험산 속에 드물게 수풀이 우거진 남쪽 사면 삼부능선 부근이었다.

사찰이 있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험한 지형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찰은 간당간당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까치집을 연상시켰다.

험한 지형 탓인지 건물은 대웅전을 포함해서 다섯 동에 지나지 않았고 향화객도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접근하기 무척 어려웠다.

접근로는 오직 하나뿐.

혈번에게 얻은 정보대로 누군가가 경계를 서고 있다면 대낮에 침투한다는 건 불가능할 만큼 어디 하나 숨을 곳 없이 완벽하게 노출된 길이었다.

그랬기에 운호 일행은 밤을 이용해서 산비탈에 몸을 은닉한 채 사찰의 불빛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지?”

“뭘 어째, 혈번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 되잖아.”

“확인되면?”

운여의 되물음에 거침없이 대답하던 운상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막상 의문을 제기하자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혈번의 말처럼 백룡사에 마두들이 있다 해도 무조건 공격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 그들이 백룡사에 온 가장 큰 목적은 신비인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표물을 되찾는 것이니 아무 생각 없이 움직였다가는 성과 없이 벌집만 쑤셔놓을 가능성이 컸다.

턱을 괴고 있던 운호가 슬며시 입을 연 것은 모두가 고민에 빠져들었을 때다.

“일단 가보자. 가서 확인한 후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그러다 걸리면?”

“안 걸려야지. 그러니까 너희 둘이 다녀와. 나는 여기서 한 소저와 같이 있을 테니까.”

“한 소저는 완쾌되지 않아서 위험할 테니 그러는 게 좋겠다.”

운상은 즉시 맞장구를 쳤다.

한설아는 여기까지 오면서 끊임없는 운공요상을 통해 거의 완쾌된 상태였고, 정상적인 신법 구사에도 무리가 없었는데 운상은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배제하려 했다.

재밌는 것은 한설아 역시 운호와 둘이 남게 된 결정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호는 친구들만 보내는 것이 불안한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조심해. 놈들, 정말 무섭다. 상황 봐서 위험하다 싶으면 싸우지 말고 즉시 돌아와.”

“알았어. 걱정 마라.”

대답을 마친 운상과 운여가 비탈면에서 일어나 유일하게 뻗어 있는 산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몸은 마치 환영처럼 보였는데 최대의 내력으로 유운신법을 펼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들 역시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단서를 놓치게 되면 그야말로 끝장이기 때문에 운상과 운여는 극도로 조심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상은 사찰이 가까워 오자 최대한의 은폐와 엄폐를 통해 천천히 접근했다.

운여는 외길이 끝나는 곳에서 반대쪽으로 사라져 지금은 혼자 담을 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슬쩍 건들기만 해도 담이 부서져 내렸다. 때문에 운상은 아예 신법을 펼쳐 통으로 건너뛴 후 급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백룡사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몇 개의 전각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스님의 불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확실히 뭔가 이상한 사찰이다.

스님이 사는 사찰에 스님이 보이지 않는 다는 건 거주하던 스님들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다는 뜻이다.

내력을 운용해서 기척을 살피자 다섯 개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숨소리는 모두 선방 쪽에서 들려왔는데, 셋은 한 방에 있고 나머지는 하나씩 나뉘어 있었다.

기세를 틀어막고 천천히 접근해서 한 명씩 들어 있는 방을 확인했다.

운여가 셋이 들어 있는 방의 지붕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좌측 선방으로 다가가 오감을 펼치자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들었을 때 나타나는 숨소리다.

그랬기에 운상은 두 번째 선방으로 움직여 기척을 살폈다.

숨을 멈추고 검을 슬그머니 부여잡으며 천천히 물러났다.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기파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선방에는 한 명만이 들어 있었는데 그자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난폭한 기세를 풀어놓고 있었다.

절정 무인에게서만 흘러나오는 기세.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으나 대단한 무력을 가진 자임이 분명했고, 정제되지 않은 난폭한 기세는 그가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흉악한 자라는 걸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한 놈은 잠들었고 또 다른 한 놈은 홀로 방에 틀어박혀 독을 뿜어내고 있으니 정보를 취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운상은 천천히 담장 쪽으로 물러났다.

이젠 이곳의 정보는 운여에게 달렸다.

세 놈이 모인 방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괜찮은 정보가 새어 나올 가능성이 컸다.

 

운호는 친구들이 사라진 곳을 향해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설아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계속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오?”

“그냥요. 어두운 데서 보니까 오라버니 얼굴 윤곽이 훨씬 선명하게 보여서요.”

“소저 역시 그렇소.”

“설아라고 부르라니까요. 한번 해봐요. 설아라고.”

“그게… 아직은…….”

“여긴 우리 둘뿐이잖아요. 그러니까 해봐요!”

“…설아.”

“호호, 듣기 좋아요. 거봐요. 불러보니까 편하고 좋죠?”

“그럼 우리 둘이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르겠소. 아무래도 친구들 앞에서는 그러니까. 이해해 주시오.”

“알았어요.”

오늘따라 별이 참 많았다.

수많은 별이 박혀 있는 하늘은 밝게 뜬 달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하늘을 보며 소곤소곤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자라왔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성격은 어떤지 등 그동안 같이 있으면서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밤하늘의 별과 함께 서로에게 소중히 기억되어 저장되었다.

운상과 운여가 떠난 지 벌써 반 시진이 지났지만 그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설아가 슬며시 운호의 어께에 머리를 기대어온 것은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시작되었을 때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운호의 몸은 순식간에 굳었다.

절대고수의 경지에 들어선 그였으나 그녀의 기습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추워져요. 안아줘요.”

처음에는 어깨였으나 그녀의 머리는 슬그머니 미끄러져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막으려야 막을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운호는 놀란 눈으로 그녀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꼼짝하지 못했다.

“난 아팠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그때는 오라버니가 밥도 먹여주고 자주 안아주기도 해서 행복했어요.”

“그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나 이렇게 있으니까 불편해요. 그냥 안아주면 안 돼요?”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늘어뜨리고 있던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상체를 감쌌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눈이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반짝이며 빛나고 있다.

그녀의 말대로 십 일이 넘도록 수시로 그녀를 안았기 때문에 어색하지는 않았다.

안긴 그녀도 안은 그도.

그저 안고 있기만 했는데도 좋았다.

그녀의 따스함이 좋았고, 그녀에게서 나오는 향기로운 냄새도 좋았다.

상처 입은 그녀를 안았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고 다른 느낌이었다.

너무 좋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운호가 그랬다.

그녀를 안고 소곤거리며 이야기한 시간이 마치 멈춘 것처럼 느껴졌기에 그는 친구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운호가 그녀를 슬며시 밀어내자마자 운상이 먼저 떨어져 내렸고, 그 뒤를 따라 운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 분위기가 수상하다?”

“수상은 무슨.”

“아냐. 뭔가 있어.”

운상이 눈을 오므리고 두 사람을 살폈다.

두 사람이 떨어진 것은 그들이 오기 전이었는데, 운상은 이상한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아마도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난다는 사랑의 기운 때문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것의 정체를 몰랐기에 운호는 시치미를 뗐고, 운상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백룡사에는 스님들이 없었다. 대신 다섯 놈이 있었는데, 혈번의 말처럼 사파 쪽 놈들인 것 같았어.”

“그자들은?”

“신비인들은 없었지만 곧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놈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놈들을 인수하러 내일 천에서 누군가가 온다고 했다.”

“그래? 잘됐구나.”

“운이 좋았어. 놈들은 백룡사에 온 지 벌써 사 일이나 지났단다. 일정 기간 동안 모아서 데리고 나가는 모양이야. 우리가 조금만 늦었다면 한없이 기다릴 뻔했다.”

“거기 있는 놈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어?”

“전부 문을 닫고 있어서 보지 못했다. 한데 그중 한 놈은 다른 자들과 다르게 엄청 강해 보였다.”

“얼마나?”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 절정은 뛰어넘은 자야.”

“도대체 이놈들 무슨 짓을 하는 걸까?”

“그나저나 여기서 밤을 새워야겠지?”

“어쩔 수 없잖아.”

운호가 한설아를 잠깐 바라본 후 얼굴을 찡그렸다.

내일이나 되어야 놈들을 만날 수 있다면 노숙을 해야 한다는 뜻인데, 여자의 몸으로는 엄청난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인가가 없기 때문에 노숙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시 귀양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 되면 놈들을 놓칠 수도 있었다.

만약 놓친다면 언제 다시 놈들을 만날지 기약할 수 없으니 한설아는 꼼짝없이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다.

 

적색 전포의 사내들이 나타난 것은 그다음 날 오시 무렵이었다.

간밤의 이슬로 젖었던 옷이 체온으로 말라갈 때 나타난 그들은 백룡사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다섯 사내를 대동한 채 용화산 기슭을 기쾌하게 빠져나왔다.

다섯 사내의 용모는 음습하고 유별났는데 모두 중년인이었다.

운상이 말한 절정무인은 가장 끝에 마땅치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흑의 무복을 입은 마른 사내임이 분명했다.

그는 기세를 조절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 상황에 대한 불만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운호 일행은 둘씩 나뉘어 추적했다.

지금은 속도를 올리지 않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바람처럼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에 운호는 친구들로 한 조를 만들어 좌측에서 따르게 하고 자신은 한설아와 함께 우측에서 움직여 나갔다.

용화산을 빠져나온 그들은 끝없이 남서쪽으로 움직여 나갔다.

잠시도 쉬지 않는 강행군.

거의 반나절 동안 끊임없이 움직이던 그들에게서 한 명의 적색전포 사내가 떨어져 나온 것은 도균(都勻)에 도착하고 난 후였다.

도균은 귀주 오대도시에 속할 만큼 커다란 도시로 인구가 이십만을 헤아렸다.

도균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합류한 운호 일행은 적색전포 사내의 움직임에 따라 또다시 분류됐다.

“난 저놈을 따라갈 테니 너희는 저쪽을 맡아. 일이 끝나면 저기 보이는 풍월루에서 만난다.”

놈이 신형을 날리는 걸 확인한 운호가 급하게 말을 끝내고 한설아의 손을 잡았다.

워낙 급한 상황이라 친구들의 눈도 무섭지 않았던 모양이다.

적색전포 사내는 일행과 떨어져 나와 도균을 지나 계속해서 남서진을 했다.

그러나 그의 목적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처럼 펼쳐진 고루거각의 향연.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전각들이 기묘한 방위를 형성한 채 줄지어 서 있었다. 그게 몇 챈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적색전포 사내는 거대한 전각 사이를 지나 거침없이 신형을 날렸지만 운호는 그를 따르지 못하고 한설아의 손을 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전각들을 지키고 있는 강렬한 기세의 무인들이 사방을 주시하며 물 샐 틈 없는 경계를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운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전각들의 중심에 자리 잡은 장원의 거대한 현판은 이곳이 신주십강 중의 하나인 천검회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주십강.

천하 삼십팔무맥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열 개의 세력을 세인들은 신주십강이라고 불렀다.

각 성에 분포한 세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자들.

신주십강에는 기본적으로 무림백대고수에 속하는 절대고수들이 세 명 이상 포진했고, 기라성 같은 절정무인도 대거 포진해서 다른 세력에 비해 월등히 강력한 무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검회(天劍會).

그중 천검회는 검귀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한 귀주의 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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