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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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26화
은하문에서 하루를 묵은 운호 일행은 소의명의 강권에 못 이겨 소하령을 대동하고 합비로 출발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도 그녀와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운상의 흑심이 노출된 이상 운호와 운여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소의명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동행이 일행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가져다준 것은 겨우 은하문에서 십 리도 떨어지지 않은 노천에서부터였다.
워낙 아름다운 정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운상이 슬며시 다가가 소하령을 향해 말을 붙인 것이 화근의 시작이었다.
말없이 노천 너머에 걸린 구름을 바라보는 소하령의 모습은 한 떨기 이슬처럼 영롱했고 아름다웠다.
그랬기에 운상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저는 원래 그리 말이 없으시오?”
“아뇨.”
“무슨……?”
다가선 운상을 향해 빙긋 웃는 소하령의 모습이 이상했다.
그동안 차갑도록 냉랭했던 표정은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졌고 대신 청아하고도 짓궂은 미소만이 그녀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은 뭔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불쑥 나타나면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데 소하령을 바라보는 운상의 얼굴은 그런 불안감을 고스란히 담은 채 어정쩡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녀가 장난기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이 말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재미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요.”
“내가 해보니까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는 게 힘들 만큼 어려웠어요.”
“그럼 그동안 일부러 말을 안 했다는 겁니까?”
“정확히 일 년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부탁했거든요. 내가 너무 말이 많다면서 어머니는 일 년 동안 말수를 최대한 줄여보라는 부탁을 남기셨어요. 그래서 나는…….”
그녀의 입에서 줄줄이 새어 나온 이야기는 운호 일행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천하에 산재되어 있는 고수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머릿속에 입력시켜 놓고 있었지만 무림십미에 포함된 소하령이 엄청난 떠버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야 그녀에게 다가가 자꾸 말을 붙인 운상과 운호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단영호와 진사월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그들은 운호 일행이 그녀에게 말을 붙일 때마다 마치 화탄을 건드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입은 봇물이 터진 듯 쉬지 않았다.
스님들이나 한다는 묵언 수행을 하면서 겪었던 괴로움에 대해 갖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고 그런 그녀를 놀리던 가족들에 대해서 거품을 물었으며 친구들의 유혹을 끝끝내 참아냈다는 스스로의 대견함에 대해서도 침을 튀겼다.
운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런 그녀의 옆에서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건너편에서 이제 출발하자는 신호를 운호와 운여가 연신 날려대고 있었지만 그녀가 입을 다물지 않으니 말을 끊지 못하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소저.”
“예, 왜요?”
“이제 그만 출발해야 될 것 같소.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듣기로 합시다.”
“좋아요. 그럼 가면서 얘기해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그녀는 길을 가면서도 운상의 곁에 붙어선 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왜 그녀의 어머니가 일 년 동안이나 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 알 것 같았고 번천도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같은 예쁜 딸을 시커먼 도사들한테 떠넘기면서 개운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녀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운호와 운여는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정신없이 앞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운상은 홀로 그녀가 쏟아내는 말들을 들어야 했다.
말도 많지만 이제 보니 성격도 털털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 본 사이처럼 운호 일행 전부에게 오라버니란 호칭을 붙이며 시도 때도 없이 말을 붙여왔다.
“운상 오라버니,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응… 말해봐.”
“호북에서 안휘로 넘어오는 동안 계속해서 나한테 말 걸려고 했잖아요. 그거 내가 좋아서 그랬던 거죠?”
“아니… 그것이. 저…….”
“왜요, 말하기 부끄러워요?”
“후우…….”
빤히 쳐다보는 소하령을 향해 운상이 기어코 얼굴을 붉히며 한숨을 쏟아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꼭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뒤쪽에 쳐져서 이야기를 나누며 따라오는 두 사람을 확인한 운호와 운여의 입에서 쓴웃음이 떠올랐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을 들어봤지만 이렇게 현실에서 확인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소하령의 끊임없는 이야기에 정신줄을 놓아버렸던 운상은 어느새 그녀와 맞장구를 치면서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웃고 떠드는 그들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운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상시 친구들과 있을 때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이 그였고 잡학에도 능통했으니 소하령과의 대화는 온갖 주제를 넘나들며 끝날 줄을 몰랐다.
“꼭 물 만난 고기들 같구나.”
“걱정이네.”
“뭐가?”
“앞으로 감시나 잠복, 이런 건 힘들게 생겼다.”
“하긴 저렇게 떠들어대니 그렇기도 하겠군.”
“이 기회에 쟤들을 떼어놓는 건 어때?”
“뭐, 심산유곡에 들어가서 아들딸 낳고 잘살라는 뜻이냐?”
“그러면 다행이고.”
“운호야.”
“왜?”
“넌 이상하지 않냐?”
“뭐가.”
“내가 쟤를 보면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우리한테는 여복이 있는 것 같아. 당운영 소저, 한설아 소저가 동행했고 그러고 보니 대악검도 여자였잖아. 거기다 하령이까지 감안하면 벌써 네 명이다. 더군다나 하나같이 전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미인들이니 아무래도 우리한테 여복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다.”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거냐?”
“그런 말 있잖아. 보기만 해도 좋은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아름다운 미인이란 말 말이야. 그러니 여복 맞아.”
은하문이 있는 회녕에서 동성까지는 한나절이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번천도가 말한 송정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룬 곳으로 마치 멀리서 바라보면 예쁘게 지어진 정자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송정에 도착한 운호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아직까지 뒤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소하령을 바라봤다.
운상이 대화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의 모든 이야기는 그녀에게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운호는 대뜸 입을 열어 그녀의 이야기를 끊었다.
“하령아.”
“왜요, 오라버니?”
소하령은 운호 일행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고 스스로 위치를 낮추어 동생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게 되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녀의 가벼운 입과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에게도 커다란 장점이 있다.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 만큼 친근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무림을 살아가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이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소하령이 빤한 시선으로 운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어느새 시선이 바뀌어 있다.
말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눈치는 빠른 것을 넘어 귀신의 수준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운호는 그녀의 시선을 확인하고도 안심을 하지 않았다.
“여기 있을래, 같이 갈래? 여기 있겠다면 운상을 남겨주마.”
“같이 가야죠. 나도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여기 있을 수는 없어요.”
“해야 할 일?”
“천이란 조직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오라버니들만의 일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나를 이곳에 보낸 건 단순하게 내 수다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허어…….”
확실히 강호는 웃긴 동네다.
정말 풋내기로 보였고 철없던 수다쟁이 아가씨였던 소하령이 자신의 검을 툭툭 치자 서릿발 같은 기운이 벌 떼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이 정도의 무력이라면 대악검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한 기세였다.
그랬기에 옆에서 붙어 다니던 운상이 입을 벌린 채 탄식을 터뜨렸고 뒤이어 운여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선입감에 젖어 상대의 무력을 경시하고 있었으니 만약 소하령이 나쁜 감정을 가지고 기습이라도 했다면 꼼짝도 못 하고 당했을 정도로 그녀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운호의 반응은 친구들과 달랐다.
그녀가 자신을 내세우려는 듯 기세를 뿜어냈어도 운호는 손을 들어 그녀의 기세를 지워버린 후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령아, 이번 일은 무림 안위가 걸린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네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떻겠느냐.”
소하령은 운호의 말을 들은 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막상 수색에 들어가자 그녀는 유령 같은 신법을 펼쳐서 날아다녔는데 마치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송정의 크기는 의외로 넓어 사방이 천이백 장에 달했기 때문에 나뉘어 수색을 했어도 거의 반시진이 걸렸다.
아무도 없다.
그리고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약속한 장소로 돌아온 일행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은 소하령의 조부인 멸절도가 확인했다는 밀회 장소가 부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비밀 세력의 밀회 장소를 알아야 잠복을 하든가 다른 방법을 동원할 텐데 그걸 모르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운호 일행의 무력이 뛰어나도 이렇게 넓은 송정을 모두 헤집는다는 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었다.
답답했으나 그렇다고 한 번의 수색을 끝으로 포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랬기에 일행은 생각에 잠겨 있는 운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요즘 들어 머리 쓰는 것은 모두 운호의 몫으로 넘겼는데 그만큼 운호의 제안은 언제나 효율적이었다.
운호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의 고민을 거치면 명쾌하게 내놓던 다른 때와는 달리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은 운상이었다.
“방법이 없으면 예전 방법을 쓰자. 교대로 송정을 지켜보는 거야. 며칠 동안 지켜보면 무슨 수가 나지 않겠어?”
“이 넓은 곳을 어떻게 지킨다는 거냐.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운여의 방법에 운상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운호는 입을 다문 채 고민에 빠져 있었고 그렇게 말 많던 소하령도 덩달아 침묵을 지켰다.
뭔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결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언제나 반응은 이렇다.
침묵, 고민, 한숨.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천에 대한 정보 습득은 사문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구룡의 회복이 달린 이상 그들에게는 절대 명제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운상과 운여가 답답함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연신 흘려내고 있을 때 드디어 운호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일단 동정으로 돌아가자.”
“왜?”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놈들이 알게 되면 모든 게 끝이야.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보다 놈들이 유리하단 말이다.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성이 있어. 그러니 시간을 두고 동정에서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 것 같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응?”
소하령이 끼어든 것은 운상과 운여가 묵묵히 이야기를 듣다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운호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으나 소하령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방법은 너무 소극적이에요. 그러니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좋겠어요.”
“어떤 방법 말이냐?”
“천의 인물은 노출되지 않았지만 무풍사와 팔황문의 총사들은 금방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자들을 감시하면 천의 인물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라요.”
당연한 이치였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피하고 싶은 방법이기도 했다.
자칫 천검회 때처럼 추적이라도 당하게 되면 막사검의 행적조차 쫓지 못하고 두 문파의 협공을 받아야 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새삼스럽게 소하령이 그 방법을 꺼내 들자 답답했던 가슴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쉬운 방법을 피하고 어려운 방법을 취하고자 했던 답답함이 그녀의 한마디로 순식간에 풀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