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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24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7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124화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오랜만에 객방에서 숙면을 취한 일행이 아침에 출발을 위해 객잔을 나서자 단영호와 진사월, 소하령이 말을 매어둔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호가 의아함을 나타낸 것은 그들이 자신들과 동행하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오?”

“우리 집은 모두 안휘에 있으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동행하려고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중한 시선.

무언가를 원해서 청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호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제안이었다.

그랬기에 운호의 시선이 운여에게 향했다.

여행에 필요한 모든 살림은 운여가 맡고 있으니 이런 경우에는 그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운여가 웃음을 띠며 입을 연 것은 단영호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였다.

“말이 여섯 필인 걸 보니 우리 것도 있는 모양이오?”

“여기서 안휘까지는 천오백 리가 넘습니다. 대단한 무력을 지니셨으니 개의치 않으시겠지만 말이 있으면 편하게 가실 수 있지요. 그래서 준비했으니 타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마운 말씀이오. 강호가 모두 동도라 했으니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어찌 부담되는 일이겠소. 동행을 해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오.”

운여가 결정을 내리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서로를 향해 예를 갖췄다.

동행을 한다는 것은 이렇듯 어렵고도 쉬운 일이었다.

소하령은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시가 달린 것처럼 날카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입을 굳게 닫고 있자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차가웠다.

더군다나 여인답지 않게 전포를 갖춰 입었고 강한 기세가 새어 나와 더욱 말을 붙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운상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처음 본 순간부터 운명처럼 그녀에게 끌려들어 갔다.

보면 볼수록,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점점 더 그녀는 가슴속으로 들어와 가슴 한구석에 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밀어내려 했으나 밀어낼 수 없었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라서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의 의지를 사정없이 꺾어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말을 붙여보려 했지만 소하령은 일관되게 무반응으로 대응해 왔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관심과 관심이 부딪치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야 진전이 있는 법인데 소하령은 오로지 자신 속에 숨어 사는 사람처럼 누구의 관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유쾌한 성격을 지닌 운상이었으나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고민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운상, 건량이 떨어졌냐?”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안 먹어?”

“먹고 싶지 않아.”

운상이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아무런 의미 없는 낙서를 해댔다.

이제 안휘까지는 불과 백여 리만 남겨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 될 터였다.

입에서 우물거리던 건량을 삼켜 넣은 운호가 나뭇가지를 끄적이는 운상을 향해 또다시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고민 있냐?”

“고민은 무슨.”

“내가 맞춰보랴?”

“까불지 말고 저쪽으로 가 있어. 생각 좀 하게.”

“남 할 때는 마치 도사처럼 나서더니 제 머리는 못 깎고 쩔쩔매는구나. 바보 같은 자식. 쯧쯧.”

자리에서 일어난 운호가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찼다.

친구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대충 짐작을 한 그의 얼굴은 가볍게 굳어져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

그것도 여인으로 인해 아픈 것은 참으로 지랄 맞은 일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서쪽 양지 바른 부분에서 조용히 앉아 쉬고 있던 소하령을 향해 운호가 천천히 다가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하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호가 그녀 옆으로 다가가자 소하령은 그저 눈만 들어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말이 없어도 너무 없는 여인이었다.

당초부터 허락받을 생각이 없었던 사람처럼 운호는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후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마주 대한 채 대화를 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저는 매우 추워 보입니다. 전포 대신 따뜻한 외투를 입지 그러셨소?”

슬쩍 물은 후에야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먼 산을 향해 시선을 던진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운상의 골머리를 싸매게 만들었던 행동이었다.

소하령은 어떤 질문을 하든 이렇게 대답 대신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나 운호는 포기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은 채 계속해서 물었다.

“은하문의 고명이라고 들었소. 그대가 말이 없는 것은 아마도 외롭게 자랐기 때문인 모양이오.”

여전한 무반응.

하지만 운호는 계속해서 다른 질문들을 던졌고 그녀의 반응을 주시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데 이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운호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그 역시 더 이상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저, 오늘 점심 무렵이면 안휘에 도착할 것 같소. 내가 소저에게 와서 이렇게 떠듬거리며 말을 붙인 이유가 뭔지 아마 대충은 알 것이오. 그대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으로 소문이 났으니 많은 사내들이 관심을 받아봤을 것 같구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소저,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거요?”

 

운호가 한숨을 쉬며 돌아오자 운상 대신 운여가 급히 다가왔다.

그는 계속해서 운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라디?”

“사귀는 사람은 없단다.”

“그래서?”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가달래서 그냥 왔다.”

“다행이네. 벙어리는 아니라서.”

“차라리 벙어리라면 다행이지. 저 여자는 남자 사귈 생각이 전혀 없단다. 아무래도 운상이가 어렵게 된 것 같아.”

“왜 안 사귄다는데?”

“낸들 아냐.”

“환장하겠네. 니들 돌아가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좀 연애는 알아서 척척 해봐. 신경 쓰지 않게.”

“환장하겠네.”

신경질을 내는 운여를 향해 운호가 입맛을 다셨다.

뭐라 반박을 하고 싶은데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운상보다 훨씬 더 많이 운여의 속을 썩인 사람이었다.

 

잠산(潛山).

호북에서 안휘로 들어와 처음 만난 도시는 태호를 배경으로 둔 잠산이었다.

잠산은 인구가 삼만에 달할 정도로 커다란 도시였는데 안휘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그 이유는 바로 태호 때문이었다.

호북에 동호가 있다면 안휘에는 태호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가 바로 지척에 있기 때문에 잠산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과 여행자로 항상 북적거렸다.

안휘로 들어온 일행의 경로는 잠산에서 갈라졌다.

단영호와 진사월의 가문인 천룡문은 안휘 남부에 위치한 석태(石台)에 있었고 화월곡은 청양(靑陽)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행과 헤어졌다.

헤어질 때 단영호는 운호를 향해 석별의 정을 이렇게 남겼다.

“천하의 마검과 함께한 열흘이 나에게는 영광이었소. 마검께서는 젊은 나이에 백대고수에 이르셨으니 분명 시간이 흐르면 십제를 넘어 천하제일이 되실 거라 믿습니다. 나는 그런 마검과 함께한 이 여행을 후손들에게 자랑하고 또 자랑할 것입니다. 이렇듯 동행을 허락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떠나는 그들의 등을 향해 운호 일행은 따스한 눈길을 던졌다.

한 올 의심의 여지없이 정성을 다해 대해준 사람들이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말머리를 돌려 회녕(懷寧)으로 향했다.

잠산에 들려 점심을 먹고 건량을 준비했기 때문에 회녕에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일행이 회녕으로 간 것은 소하령의 은하문이 바로 회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함께했던 단영호와 진사월이 이별을 고했음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여 아쉬움을 표했고 그들과 헤어져 회녕까지 올 때에도 한마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시비를 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입을 가지고 말을 하지 않겠다는데 시비를 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놈도 있었다.

바로 운상이었다.

회녕에 들어왔으니 이제 그녀와는 곧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말을 섞지 못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호감조차 알리지 못했다.

이대로 떠나기에는 너무 억울했고 아쉬웠다.

그랬기에 그는 막무가내의 심정으로 그녀를 향해 불퉁거리며 말을 붙였다.

“이보시오, 소저. 그대가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오. 하나 나는 그대와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소.”

“어째서죠?”

“내가… 그대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오.”

예상치 못했던 소여령의 대답에 헛바람을 들이켜던 운상이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입을 연 이 순간마저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단도직입적인 그의 고백에 놀란 것은 그녀가 아니라 운호와 운여였다.

그들은 운상의 말을 듣고 안색이 흑색으로 변했는데, 이건 아니라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소하령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방금… 뭐라 하셨소?”

“어차피 어두워졌으니 묵을 곳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 가서 하루 묵어가요.”

환장하고 펄쩍 뛸 일이란 건 바로 이런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소하령은 오직 그 말만 하고 또다시 입을 꾸욱 닫았기 때문에 운상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운호와 운여를 바라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은 운호 일행을 당황함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역시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운여였다.

성격이 침착한 운여는 당황함을 숨기고 즉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저의 제의에 먼저 감사함을 표하는 바이오. 그렇지 않아도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아 걱정하고 있던 차였는데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심에 감사할 따름이오.”

냉큼 받아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운여가 한 짓이었다.

그는 무슨 짓이냐는 시선을 연신 던지는 운호와 운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소하령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미는 안내하면 따라가겠다는 태도였다.

정확한 판단이고 결단력이었다.

아마 이대로 그녀와 헤어지면 운상은 가슴속에 들어 있는 그녀의 영상을 생각하며 한동안 가슴앓이를 할 것이 분명했다.

 

은하문은 정확하게 회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녕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은하문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소하령의 할아버지인 멸절도 소양기가 개파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회녕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확장해 나갔음에도 변변한 싸움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인들은 은하문을 삼십팔세에 올려놓으면서도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의구심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거에 수그러들었다.

바로 소양기의 아들이자 소하령의 아버지인 번천도 소의명이 당시 백대고수에 꼽히던 사파의 거두 고루마존을 이백 초의 승부 끝에 목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개파의 당사자인 소양기도 아니고 그 아들인 소의명이 벌인 일에 안휘 무림은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의명은 고루마존만 죽인 게 아니라 그가 이끌고 있던 강력한 사파의 세력 독존교(獨尊敎)까지 말살했으니 은하문의 전력에 의심을 가지고 있던 무림사가들은 더 이상 어떠한 이의를 내놓지 못했다.

독존교는 안휘의 절대 강자 남궁세가마저 껄끄러워하던 세력이었다.

더불어 천하인들이 은하문을 호천십문 중에서도 최강자로 꼽고 있는 이유는 소의명의 아버지이자 개파조사인 멸절도 소양기가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멸절도는 무림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백대고수에는 끼어 있지 않으나 사람들은 그를 두고 암제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무력 서열 육십삼 위에 올라 있는 번천도를 가르친 그의 무공이 무림에 노출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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