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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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23화
정말 오랜만에 맞이한 진수성찬이었다.
그랬으니 처음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나중에 가서는 허리띠를 풀러놓고 정말 배 터지게 먹었다.
안주가 좋으니 술이 들어갔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흥취도 생겨났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수였고 고수는 언제나 주변에서 발생되는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다.
의자가 밀리고 사람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용봉들이 있던 곳에서 생긴 일이다.
멋들어진 백색 장삼에 홍건을 두른 자가 천천히 운호 일행 쪽으로 걸어 오기 시작한 것은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울 때였다.
삼 장에 불과한 거리였으니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몇 번 깜짝할 시간이었다.
기세를 숨겨놓은 잠룡.
칼날처럼 예리한 기세가 그의 등 뒤에서 순간순간 삐죽거리며 튀어나왔다.
그랬기에 술잔을 주고받던 운호 일행은 자세를 고치며 다가오는 그를 바라봤다.
“우리한테 볼일이 있는 모양이오?”
“오른쪽 어깨에 매달린 매가 참으로 붉소. 그대들은 점창 사람들인가 보오?”
“그렇소.”
“점창의 매는 살모사도 잡아먹는다 들었는데 정말 그렇소?”
“어떤 매는 호랑이를 잡기도 하지요.”
“푸하하… 재미있는 농담이오.”
“사실을 알면 재미없을 수도 있을 것이오. 왔으면 먼저 소개를 하는 게 예의인 것 같소만?”
운여가 슬쩍 얼굴을 굳혔다.
예의를 차리지 않고 접근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생각이다.
이제 누구든 점창의 제자들을 예전처럼 무시하거나 경원시한다면 참고 넘기지 않는다.
무인은 마음이 가면 몸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것의 정도가 어느 만큼인가는 지닌 무력으로 결정되는데 운여가 눈을 지그시 오므리자 일부러 터뜨리지 않았음에도 무시무시한 기세가 슬금슬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다가온 백의 사내가 빠르게 자신의 실수를 자인한 것은 아마도 그런 운여의 기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면에 실례를 했소이다. 나는 천룡문의 단영호라 하오.”
“호북과 안휘에는 구룡이 산다던데 그중 천룡문의 황룡은 성격이 호방하고 사람 사귀길 좋아해서 친구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소. 얼굴마저 잘생겼으니 그대가 바로 황룡인 모양이구려.”
“과찬이시오.”
단영호가 허리를 숙이자 말을 섞었던 운여가 그때서야 일어나 마주 인사를 했다.
삼십팔세의 하나이자 호천십문의 주역인 천룡문의 소문주 황룡은 절대 쉽게 대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호북과 안휘에서 웅크리고 있는 호안구룡은 차세대를 이끌어갈 젊은 무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개인적인 무력과 더불어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은 그들의 행보는 언제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나는 점창의 운여라 하오. 천하에 소문이 자자한 황룡을 만났으니 참으로 영광이오.”
“진정으로 그대가 팔비검 운여 공이시오?”
운여가 자기소개를 하자 단영호가 놀란 눈으로 펄쩍 뛰었다. 그는 운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랬기에 운여는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시킨 후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팔비검이란 명호는 처음이지만 내 도호가 운여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황수전투에 이어 천검회와의 태강전투, 그리고 무호계전투는 세상 사람이 다 알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소. 팔비검이란 명호는 검을 한 번 떨치면 여덟 개로 변해 날아다닌다 해서 붙여진 명호라 하더이다.”
“허어…….”
단영호의 설명에 운여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명호가 붙었다. 그것도 너무 과장되어 만들어진 명호다 보니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단영호는 운여의 반응과 상관없이 즉시 눈을 돌려 앉아 있는 운호와 운상을 바라보았다.
그런 후 주저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머지 분들은 마검과 무풍검이시겠구려.”
“강호에서 나를 마검이라고 하더이다.”
그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운호가 단영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영호가 자신에게 눈을 맞추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운호의 눈은 부드럽고 맑았는데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영호가 그 모습을 보며 슬쩍 침을 삼킨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천하의 마검을 뵈었으니 삼생의 영광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자리로 모셔 술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소?”
“나는 저들이 누군지 모르오.”
“저들은 호천십문의 후계자들이오. 호천십문은 우의를 다지기 위해 후계자들이 일 년에 두 번씩 회합을 갖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오. 그런데 오늘 마검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그냥 보내 드릴 수 있겠소. 부디 부탁이니 우리와 합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고맙겠소.”
“정 그러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합석을 하겠소.”
운호가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어 단영호의 초대에 응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옆에 앉아 있던 운상의 노력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운상은 단영호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는데 운호를 향해 초대에 응하라는 신호를 마구 보냈던 것이다.
그의 눈초리는 거의 협박에 가까웠기 때문에 운호는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사태가 두려워 할 수 없이 초대에 응하고 말았다.
운호 일행이 천천히 일어나 단영호의 뒤를 따르자 호천십문의 후계자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과 삼 장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작은 음성으로 대화했어도 그들은 운호 일행의 정체를 파악했기에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점창의 마검과 팔비검, 그리고 무풍검은 혈검쟁패와 함께 강남을 휩쓰는 소문의 진원지였다.
무적의 검사들.
칠절문을 쓰러뜨린 황수전투를 시작으로 그들의 일보 일보는 신화가 되어 무림을 휩쓸고 있었다.
신주십강에 속하는 천검회의 정예들을 연속으로 박살 내며 귀주를 횡단했고 천하백대고수에 속하는 지옥귀왕과 패천일도까지 때려잡았으니 마검 일행의 위명은 중천에 뜬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중이었다.
그랬기에 아무리 호천십영의 배경이 대단하다 해도 마검 일행을 앉아서 마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점창의 신성들을 뵙게 되니 영광이오.”
“어서오세요. 환영해요.”
사내들은 경의를 담은 시선이었고 여자들은 흠모를 담은 눈빛이었다.
한 명씩 자신의 소개를 마친 그들을 향해 운여는 초대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은원이 난무하고 언제 칼부림이 일어날지 모르는 냉엄한 강호의 세계에서 이토록 호의를 가지고 초대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요즘의 강호는 세력 간의 전쟁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기였고 막사검으로 인해 인심이 흉흉해져 언제 어느 때 시비가 벌어질지 모르는 때였다.
사내들과 여자들의 정체는 단영호 못지않았다.
사내들은 구룡 중 셋이 있었고 여자들 중에는 중원십대미녀에 속하는 은하문의 소하령이 자리를 함께했으며 강남오봉 중 둘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어쩐지 눈이 부시도록 예쁘더라 했더니 대단한 신분을 지닌 여인들이었다.
모두 소개가 끝나고 잔에 술이 따라지자 단영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오늘의 모임은 마검 일행분으로 인해 더욱 특별해진 것 같소. 우리 모두 오늘의 만남을 위해 건배를 합시다.”
단영호가 먼저 잔을 들자 나머지 사람들이 한꺼번에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그때부터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모두 뛰어난 무력을 지닌 자들이었으나 그들은 아직 젊었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청춘들이었다.
화제가 화제를 낳았고 화제는 또 다른 화제를 낳았지만 모든 화제는 결국 막사검으로 향했다.
“그럼 마검께서도 막사검을 찾기 위해 안휘로 가는 것이오?”
“아니오. 우린 마창을 잡기 위해 오다 보니 이곳까지 왔소. 마창이 강서에 있으니 우린 그곳으로 가서 마창을 잡을 예정이오.”
운호는 이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천검회를 비롯해서 천문과 수라맹 등 막강한 세력들이 천의 예하 조직으로 판명 난 이상 함부로 비밀을 발설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이 중 어느 누가 천과 끈이 닿아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천십영은 운호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직 마창이란 단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구룡에 포함된 단영호와 금사련의 천화승, 화월곡의 진사월은 두 눈을 부릅뜬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 정말 마창을 잡겠다는 겁니까?”
“우린 탕마행을 위해 세상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금마혈번과 능외쌍마, 지옥귀왕을 잡은 것도 그 일환이었소.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악독한 심성을 가진 마창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래도 어찌… 마창을…….”
분명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해서는 안 될 말이기도 했기에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마검의 위명이 하늘을 찌르는 것은 신성의 출현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지옥귀왕과 패천일도를 해치운 운호의 무력이 경이적이었기 때문에 소문은 들불처럼 천하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검이 마창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십오천강의 일인이자 무력의 정점에 선 극강의 화신 마창은 십제를 제외하곤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무력을 지닌 무인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운호와의 시선을 피한 후 직접적인 질문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시선이 부딪치면 자신도 모르게 해선 안 될 질문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검 일행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그들과 격이 다른 무인들이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묻고 싶은 것에 대한 질문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색함이 분명했다.
운호가 술잔을 비운 후 천천히 입을 연 것은 그런 어색함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런 어색함은 당사자가 해결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믿기 어려워하는 것 같구려. 하지만 사실이오. 그대들은 위험한 승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 역시 사실이오. 마창은 천하를 휩쓸 정도로 대단한 고수인데 어찌 위험이 따르지 않겠소. 하나 우리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마창을 잡을 것이오. 이것은 마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천하 정의를 바로잡고자 하는 점창의 뜻이기 때문이오.”
굳건한 운호의 음성에 시선을 피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에 감탄이 깃들기 시작한 것은 추호의 두려움도 들어 있지 않은 운호 일행의 당당함을 확인한 후부터였다.
“무림 정의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점창의 탕마행을 진심으로 응원하겠소. 하지만 마검께서는 강서로 갈 필요가 없으니 행선지를 바꿔야 될 것 같소.”
“무슨 말씀이오?”
“마창이 안휘에 들어갔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소.”
“정말이오?”
“그렇소. 지금 안휘는 완전한 복마전으로 변해 피가 지천으로 흐르고 있소. 그곳에는 사파의 고수들과 마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막사검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라 하오. 마창뿐만 아니라 백대고수에 들어 있는 사파의 고수들마저 모두 모였으니 안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으로 변한 상태요.”
진사월의 설명에 운호가 인상을 슬쩍 긁었다.
화월곡은 안휘 남부를 장악한 세력이었으니 그들의 정보는 매우 신빙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운여는 운호 대신 나서며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혹시 막사검의 행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소?”
“소문으로는 요마왕이 가지고 도주 중이라 하오. 요마왕은 가로막는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고 있다는데 어제까지는 화천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소.”
“그럼 막사검이 출현했다는 게 정말이오?”
“그렇소.”
“본 사람은?”
“막사검을 보유했던 사람들은 벌써 아홉이나 되오. 그들은 모두 죽었지만 그들이 검을 꺼내는 순간 오색영롱한 광채가 하늘을 향해 뻗어 나왔다고 하더이다. 그러니 사실이지 않겠소?”
“그렇구려. 요마왕이 막사검을 가졌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 얼마나 죽었소?”
“벌써 오십이 넘는다고 하오.”
“음…….”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하지만 오 일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지 알 수 없었다.
요마왕.
무림십왕 중의 하나로 무림백대고수 서열 구십 위에 기록되어 있는 절대고수였다.
그가 펼치는 마령십팔도는 사람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만큼 잔인한 도법이었는데 요마왕은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귀를 잘라 가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운여가 작은 신음을 흘린 후 바라보자 대신 운호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진사월이 아니라 단영호를 향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리다.”
“안휘에는 삼십팔세 중 다섯 개가 있소. 그 어떤 곳보다 막강한 세력들이 자리 잡은 곳인데 어찌 피가 흐르는 작금의 현실을 방치하는 것이오?”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오. 누군가 먼저 나선다면 다른 세력들도 일어서게 되오. 막사검은 누구나 탐내는 보물인데 어찌 욕심이 나지 않겠소. 자칫 막사검을 제어했을 경우 먼저 나선 세력이 다른 세력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이오.”
“그것이 천룡문의 생각이오?”
“그렇소.”
“그렇다면 화월곡의 생각도 같소?”
“우리도 마찬가지요.”
단영호에 이어 진사월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룡문과 화월곡은 안휘에 있는 삼십팔세였으니 그들 둘의 대답이라면 정확하진 않더라도 비슷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고 상황이 변하면 그에 따른 대응이 달라진다.
막사검이 안휘를 벗어나지 않고 빙빙 돌고 있는 한 그들은 곧 막사검이 뿌려놓은 무저갱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게 운호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