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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20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3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120화

상청궁의 겨울은 아름다웠으나 다른 어느 곳보다 추웠다.

장문인인 청현자가 머무는 곳이기도 했지만 각종 행사를 주관하는 본관이었으므로 대청의 크기는 다른 도관의 다섯 배에 달한다.

하지만 평소에는 사람이 머물지 않으니 겨울만 되면 바람이 머물다가 갈 정도로 휑한 곳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장문인의 거처는 상청궁의 뒤편에 있었는데 침실과 손님을 맞이하는 다실뿐이라 본관에 비하면 아늑한 편이었다.

오늘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장로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에 장문실에는 다섯 명의 청자배 원로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청자배에서 장로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모두 열 명이었으나 청곡과 청운이 죽고 전대 장문인 청학은 행방불명되었으며 연배가 가장 높은 청허는 노환으로 자리를 보존한 채 일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장로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여섯뿐이었다.

좌장 자리에 앉은 장문인은 참석한 사형들에게 덕담을 건넨 후 조심스럽게 오늘의 주제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현재 무림의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강남은 물론이고 강북마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더군다나 막사검이 안휘에 나타났으니 이제 천하 전체가 피비린내로 진동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사주로 생긴 일이라면 진정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오. 천이라는 조직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무림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음모를 막아야 하지 않겠소?”

“그래야지요. 하나 아직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실체를 알아야 대응할 텐데 암중에서만 움직이고 있으니 대응이 만만치 않습니다.”

불쑥 나선 청명자의 물음에 청현자가 답답한 한숨을 내리쉬었다.

아직 점창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태풍에서 비껴나 있었지만 언제 영향권으로 끌려들어 갈지 모르는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천이란 조직에 대해서 아는 것은 현재로써 점창이 유일했기 때문에 다른 문파와의 협력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호의 보고를 받고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다.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누군가 만들어낸 헛소문을 운호가 전한 것이라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날아온 전서에서 천과 천검회가 연결되어 있고 천검회의 공격을 받아 풍운대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후부터는 잠시도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다.

거기다가 강남의 유력 세력들인 천문과 수라맹이 그들과 한패인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긴장은 한층 깊어만 갔다.

운호의 정보가 충분한 신빙성을 보인 것은 혈검쟁패에서 천문과 수라맹이 천검회와 동맹을 맺은 이후부터였다.

혈검쟁패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 문파는 전혀 연관이 없었으며 조금의 교분조차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청현자가 의견을 듣겠다는 듯 입을 꾹 닫고 침묵을 지키자 이번에는 청문자가 나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는가 하는 것이오.”

“당연한 말씀입니다.”

“정보에 따르면 아무래도 그들은 천하를 일통하겠다는 야망을 가진 것으로 분석되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판을 크게 벌이는 이유는 그것뿐이오.”

의외의 말에 참석했던 장로들의 입이 한꺼번에 떠억 벌어졌다.

가장 이성적인 청문자가 한 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과한 추측이었다.

그랬기에 청명자가 나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제, 너무 크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천검회의 인물들이 운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인의 피가 뜨거워지는 시기가 다가온다. 앞으로의 강호는 재밌어질 거라고 했다더군요.”

“그 말이 천의 음모를 말해주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진행되는 정황이 너무 이상합니다. 완벽하게 짜여진 음모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허어…….”

청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한 얘기는 아니다.

워낙 엄청난 일이었기에 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오랜 시간을 강호에서 뒹굴었으니 천하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청문의 말처럼 천이란 조직의 최종 목적이 무림일통이란 생각은 애써 부정하려 했다.

무림을 하나의 조직이 통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면 엄청난 살육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백이십 년 전 벌어졌던 비천의 혈사는 수많은 무인의 목숨을 아침에 핀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지게 만들었었다.

그럼에도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심상치 않았다.

비천은 거대한 무력으로 당당히 천하를 향해 쟁패를 선언하며 진군해 왔고 그들을 막기 위해 엄청난 무인들이 죽었다.

당대 막강한 무력으로 천하제일의 세력을 자랑하던 점창이 홀로 나서서 그들을 막지 못했다면 아마도 천하는 수많은 무인의 피가 강물이 되어 흘렀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음모는 비천의 통일 전쟁에 비해 훨씬 더 치밀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정말 암중 세력이 모든 음모를 꾸민 것이라면 강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아야 될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의문을 제기했던 청명자는 무거운 탄식을 터뜨리며 입을 닫고 말았다.

만약 청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정 무서운 일이었다.

청명이 신음과 함께 말문을 닫자 청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장문인, 아무래도 소림 방장을 만나 봐야 될 것 같소이다.”

“제가 말입니까?”

“아니오, 장문인께서는 본산을 지키셔야 하니 내가 갔다 오겠소.”

“어쩌시려고요?”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세를 모아야 하오. 아직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세력들이 더 많으니 천이란 자들이 선동하기 전에 대비책을 세울 필요성이 있소. 소림 방장이 나선다면 구룡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만 되면 다행이겠지요. 겨울이라 하남까지 가려면 힘드실 텐데 걱정이군요. 운학과 운일을 데려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소. 여럿이 가면 번잡스러울 테니 둘만 데려가지요.”

장문인의 배려에 청문이 허리를 가볍게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점창은 참으로 훌륭한 장문인을 가진 게 분명하다.

인과 의로 조직을 이끄는 청현은 과감함과 결단력까지 지니고 있어 현재 점창의 세는 거침없이 커져 가는 중이었다.

그동안 조용히 있던 청무자가 나선 것은 둘의 대화가 끝나고 청현이 사형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사제, 어차피 소림에 가는 길이라면 구룡회를 개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어떤가. 어차피 구룡회는 무림에 중요한 환란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만들었으니 적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그렇지요.”

청무의 주장에 청문이 확실한 대답을 피하고 얼버무렸다.

청무자가 왜 이 말을 꺼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구룡의 회복.

현재 점창에서 가장 큰 당면 과제인 구룡의 복원을 그는 이 기회에 앞당기고 싶은 게 분명했다.

구룡회의 개최는 십 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는데 만약 무림에 중요 환란이 생기면 회주인 소림 방장의 주창으로 소집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환란으로 소집된 구룡회에서 구룡 복원을 떠든다면 모든 문파가 점창을 손가락질할 게 뻔했으니 자칫 이익만 따지는 문파로 낙인찍힐 수 있었다.

청문자가 얼버무리며 반대하지 못한 이유는 청무자의 주장이 전혀 일리 없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환란을 사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구룡회를 소집해서 의견을 통일시킨 후 칠대세가와 호천십문, 십이무맹의 연합체에 알려 공동으로 대응하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물론 암중 세력이 그들 중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지만 음모를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의도를 어느 정도 분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문파가 아니라 점창이었다.

만약 구룡회가 열린다면 절대 점창은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구룡의 복원을 걸고 넘어간다.

그것은 여기 있는 청자배 장로들뿐만 아니라 현재 점창을 운영하는 운자 항렬의 생각도 모두 똑같았고 심지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구룡회가 열린다는 것은 곧 점창이 검을 꺼낸다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었다.

예정대로라면 구룡회는 삼 년 후에 열리게 되어 있었다.

모든 점창의 문도가 구룡회의 개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선조들을 향한 죄송함을 씻어내기 위함이었다.

천하제일세를 구가하던 점창이 누군가의 힘에 의해 구룡회에서 탈락하게 된 것을 점창의 전 문도는 수치스러워했고 부끄러워했다.

청문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청무자의 시선이 다른 장로들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청면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예전의 상처를 이겨내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장로 중 가장 연장자였다.

“나는 청무 사제의 생각에 동의하네. 청허 사형이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하실 것 같아 걱정이야. 사형의 마지막 꿈이 구룡 복원인데 아직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청문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만 나는 자꾸 욕심이 드는군.”

“제 생각도 마찬가지올시다. 구룡회를 소집할 명분만 있다면 소집했으면 하오. 할 수 있었다면 벌써 예전에 해야 할 일이었으나 우리 점창은 자격이 없기 때문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소. 하지만 무림 환란이란 명분을 얻었으니 구룡회의 개최를 요구해도 무방하오.”

조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우자까지 나섰다.

그는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구룡회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에서 불꽃이 치솟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장문인인 청현자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사형들 생각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대의를 쫓지 못한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소. 환란은 환란이고 구룡 복원은 다른 문제요. 그자들은 우리가 없는 틈을 이용해서 모산파를 우리 대신 구룡으로 만들었소. 그러니 우리의 주장은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니오. 환란을 모른 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를 찾자는 것뿐이오. 구룡회가 열리지 않는다면 모를까 열리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하오.”

이번에 나선 것은 청명자였다.

그 역시 구룡 복원이란 말이 나오자 눈이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청문은 아까부터 눈을 감고 있었고 나머지 청자배 장로들은 강한 논조로 청현자를 압박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구룡회를 개최해야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청문자의 눈이 떠진 것은 모든 사람들의 주장이 일거에 멈췄을 때였다.

장문인인 청현자가 사형들의 주장을 조용히 듣다가 뭔가를 결정한 듯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청문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장문인,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형들 말씀이 일리가 있소. 무림 환란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다 보니 사문의 염원을 잠시 등한시한 것 같구려. 지금 하나 삼 년 후에 하나 무엇이 다르겠소. 어차피 할 거라면 청허 사형이 살아계실 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청현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사형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봤다.

장문인은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이렇게 사형들의 얼굴을 본다.

그랬기에 장로들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청현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구룡회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열려서는 안 됩니다. 그들 스스로 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요?”

“먼저 청문 사형께서 소림 방장을 만나 현재까지의 정보만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돌아오시면 분명 조만간 그들은 우리를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그건 어째서 그렇소?”

“막사검이 안휘에 나타난 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혈풍이 불어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되면 그들도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고 대응책을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천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정보는 별로 없지 않소?”

“아닙니다.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작은 정보조차 귀중해질 겁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운호가 있지 않습니까. 운호가 막사검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어떤 정보라도 얻게 된다면 우리는 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허어…….”

“그들 스스로 구룡회를 개최하고 우리를 초청한다면 그때 점창의 복원을 당당하게 말할 생각입니다. 점창은 비겁함과 친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아서도 안 되고 언제나 정대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형들께서는 저의 이런 생각을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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