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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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19화
점창 본산에서 풍운대의 귀환령이 떨어진 것은 막사검이 안휘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 무림에 진동하고 있을 때였다.
신응은 첫눈이 하얗게 내리던 날 불쑥 의방에 나타나 서신만 전해주고 떠났는데 삼 일 만의 방문이었다.
서신을 읽은 운곡의 얼굴이 더없이 굳어졌기 때문에 옆에 앉아 있던 운검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사형, 무슨 내용이 적혀 있습니까?”
“이 시간부로 탕마행을 중지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이다.”
“우리만 말입니까?”
“아니다. 운몽, 운천, 운극도 마찬가지다. 단, 운호와 운여, 운상은 안휘로 가라는 지시다.”
“별일이군요. 그럼 운호는 탕마행을 계속하라는 뜻인가요?”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릴 복귀시키는 이유는 뭡니까?”
“천하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장문인께서는 우리가 거기에 휘말리는 걸 걱정하시는 모양이다.”
“그건 사제들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갑자기 막사검이 안휘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 소저의 말에 따르면 막사검은 천(天)이라는 비밀 세력이 가져갔다. 천은 천검회와 연관이 되어 있고, 그로 인해 운호뿐만 아니라 우리까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런데 막사검이 갑자기 안휘에 나타났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겠느냐. 장문인께서는 운호가 그 연유를 파악하길 바라신다.”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다. 우연찮게 알게 된 비밀이 천하의 안위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구나. 엄청난 위험이 따르겠지만 장문인께서는 그마저 모른 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신 게 분명하다. 만약 장문인의 걱정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력 간의 전쟁과 막사검의 출현이 누군가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면 정말 큰일이지 않겠느냐.”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준비가 끝나면 즉시 본산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운호!”
운검이 고개를 흔들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운곡이 말을 끊으며 운호를 불렀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걱정이 담겨 있었다.
운호는 옆에 앉아서 사형들의 대화를 듣다가 갑자기 운곡이 자신을 부르자 급히 대답을 했다.
그는 아직도 운곡을 어렵게 대하고 있었다.
“들었겠지만 너희들은 우리가 떠나는 대로 안휘로 가거라.”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냐.”
“대사형을 비롯해서 여기 있는 모두가 천검회가 겨눈 검날에 수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런데도 안휘로 갑니까?”
“복수를 말하는 것이냐?”
“저는 어릴 때부터 점창은 받은 건 반드시 돌려준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점창의 기백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점창은 반드시 그리한다.”
“그런데 왜 안휘로 가라 하십니까?”
“놈들은 전쟁 중이다. 그런 놈들에게 복수하겠다고 한다면 점창 역시 전쟁에 가담해야 된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안다. 명분이 있으니 충분히 천검회를 압박할 수도 있으나 지금은 아니다. 아마 장문인께서도 그리 생각하셨을 게다. 네 말대로 점창은 받은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그것이 피 값이라면 더욱 그렇다. 전쟁이 끝나고 천검회가 살아남는다면 햇살이 따뜻한 어느 봄날 그들이 우리한테 한 짓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내 말을 믿고 안휘로 가거라.”
“그리하겠습니다.”
“가서 사태의 추이를 잘 지켜보아라. 누군가의 음모라면 안휘는 수많은 무인들의 피로 물들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서 막사검의 행방을 추적하라.”
운곡의 지시는 굳건한 음성과 함께 지엄하게 흘러나왔다.
그랬기에 운호는 머리를 숙인 채 명령을 듣다가 운곡의 말이 끝나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대사형, 만약에 막사검을 발견하면 어찌하오리까?”
“…음.”
예상치 못했던 운호의 질문에 운곡은 대답 대신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막상 운호의 질문처럼 그런 일이 벌어지면 참으로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막사검은 모든 무림인들이 노리는 천고의 보물이었다.
그 자체로도 무인이라면 꿈에라도 갖고 싶은 보검이었는데 전설은 막사검에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전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비밀을 두고 갑론을박했지만 언제나 결론에 도달한 것은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천고의 비학이 막사검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은 다른 이유들에 비해서 그나마 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보물을 취득한다는 것은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강한 무력을 지닌 무인이라도 천하의 기라성 같은 무인들이 벌 떼처럼 덤벼든다면 당할 재간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눈앞으로 다가온 보검을 팽개치고 다른 사람이 가져가도록 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랬기에 운곡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나, 막사검 같은 보검은 스스로 주인을 찾아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막사검이 너를 찾아온다면 상황에 맞춰서 신중히 판단하거라.”
“알겠사옵니다.”
운곡과 운검, 그리고 오검은 왔던 때처럼 그렇게 바람처럼 떠났다.
사제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 하나로 그 먼 길을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와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 죽을 고비를 넘겼다.
두 달이 넘도록 같이 있었으나 중상은 입은 운상과 운여는 사형들과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운호만은 치료가 일찍 끝났기 때문에 운곡과 운검의 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고 자신이 겪었던 일들도 상세히 전해줄 수 있었지만 사형들의 상처가 중해서 많은 시간을 같이할 수는 없었다.
북적이던 의방에 사형들과 오검이 떠나자 갑자기 허전함과 서운함이 밀려와 운호와 일행들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기약조차 하지 못하니 떠나는 사형들의 뒷모습이 그립고 그리웠다.
사형들이 먼저 출발했을 뿐 그들 역시 출발을 미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문의 지엄한 명령이 있으니 촌각이라도 서둘러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해결할 과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한설아였다.
무호계에서 사경을 헤매던 운호를 들쳐 업고 옹안으로 들어온 한설아는 갖은 정성을 다해 일행을 간호했다.
두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많은 고민을 하면서도 의방을 떠나지 않았다.
사문인 청성이 당문과 목숨을 건 전쟁을 하고 있으니 복귀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그녀는 결국 떠나지 못하고 운호의 곁을 지켰다.
처음에는 운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떠날 생각이었다.
옹안은 전쟁에서 한 발짝 물러난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없어도 운호만 일어나면 점창 무인들은 위험 없이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운호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운호의 회복 속도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운호는 보름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지 못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운호의 따스한 눈길과 손길이 그녀가 떠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운호는 몸이 회복되어 일어난 후 사형들을 간호하는 시간 외에는 그녀와 같이 있으려 노력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후에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운호는 일부러 피하려 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운영과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말했고, 시간이 흐르면 잊을 수 있을 거란 약속을 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운호만의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한설아는 출발을 미루며 하루 이틀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으며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가야 된다는 것도 안다.
그녀가 태어난 곳이었고 부모가 계신 청성이 전란에 휩싸였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막사검을 찾아 당문 공격의 명분을 봉쇄하겠다던 것도 천검회가 끼어든 이상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단순히 뒤를 캤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막사검을 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천검회를 찾아가는 건 목숨을 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는 결심을 굳히고 하루 종일 운호 곁에 붙어 앉아 그의 얼굴을 가슴에 새겼다.
시간이 흐른다 해도 그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운호의 눈이 오늘따라 아련해서 스르륵 눈물이 나왔다.
아마도… 아마, 이 사람도 자신이 내일이면 떠난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이별에 대한 아픔을 홀로 가슴에 새겼다.
그녀가 울면 그도 아플 것이다.
그러니 울음 대신 웃음으로 그를 향해 바라볼 생각이었다.
밤은 짧았고 아침의 햇살이 밝아왔다.
야속한 시간들은 어찌 그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그녀의 마음을 애태우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침상을 마주한 운호는 그녀의 마음과는 다르게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저, 막사검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막사검이 안휘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천하에 자자하오. 이제 막사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소.”
그 한마디에 한설아는 떠나겠다는 결심을 미뤘다.
전쟁의 암운이 드리워진 상황에서도 사문에서 그녀를 운호 일행과 떠나게 만든 명분은 막사검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랬으니 운호의 말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게 그녀가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었다.
명분을 잃어버렸던 그녀에게 다시 명분이 생긴 이상 그녀는 운호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게 해준 명분이 생긴 것은 분명 기꺼운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담긴 걱정과 근심마저 떨어진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막사검의 행방이 천하에 자자하게 소문이 난 이상 검을 찾게 될 확률은 희박하다고 봐야 했다.
그저 명분에 불과할 뿐 사문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핑계라는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그렇게 두 달이란 시간을 보내고 한 번의 이별이 이루어졌다.
사형들을 떠나보낸 운호의 눈은 붉게 젖어 있었다.
그런 운호를 보며 그녀의 눈도 젖어갔다.
그녀가 떠나면 그는 붉게 젖은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릴지 몰랐다.
보름이 넘도록 그녀는 불면의 밤을 보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떠나야 한다는 아프고 괴로운 결정을 내렸다.
그와 같이 있고 싶었으나 가지 않으면 그녀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야 될지 몰랐다.
“오라버니, 나… 이제 갈게요.”
“소저, 정말 가는 거요?”
“사문이 전란에 빠져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형제가 죽어가고 있어요. 그러니 돌아가야 해요.”
“위험하오.”
“알아요. 그래도 가야 되는 거 아시잖아요.”
“이제… 겨우, 그대를 가슴에 받아들였는데 이리 떠난단 말이오.”
운호의 가슴이 들썩였다.
떠나지 못하게 막을 명분을 찾고자 맹렬히 노력했으나 결국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자신 역시 점창이 청성과 같은 처지에 빠졌다면 반드시 돌아갔을 테니 말이다.
운상과 운여는 한설아가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자리를 피한 상태였다.
두 사람이 이별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들 역시 그녀가 떠나면 같이해 왔던 시간들이 서운함으로 남겠지만 두 사람의 이별을 방해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계속 생각하고 결심했던 것처럼 눈물 대신 운호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세상 그 어떤 눈물보다 슬퍼 보이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대하며 운호는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의 가녀린 몸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지만 보내야 한다.
가슴이 미치도록 아파왔다.
같이 있는 동안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이제야 너무 후회되었다.
“언젠가 나보고 설아라고 불러달라 했지. 내가 낯 간지러운 걸 잘 못해서 지금까지 못했어.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 설아라고 부를게. 설아, 살아만 있어줘. 내가 사문의 명이 끝나는 대로 꼭 찾아갈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