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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15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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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115화

예상대로 운호의 돌파 속도는 처음과는 다르게 현저히 느려졌다.

적들의 수뇌부가 앞에서 길을 트는 운호를 집중 견제했기 때문이었는데 삼로를 비롯해서 비령과 윤환,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화검제의 마지막 제자 사영과 천검십팔영까지 모두 전면에서 운호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랬기에 후방에서 오검이 펼친 오행진을 호위하는 운곡과 운검의 압박은 훨씬 약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륜과 칠현이 후방에 남아 검객들을 지휘하며 맹렬하게 공격해 왔기 때문에 운곡이 이끄는 후방 역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악전(惡戰)이며 고투(苦鬪)였다.

단숨에 뚫어버리고 일행을 이끌려던 운호의 의도는 대뜸 윤환이 나서며 가로막는 바람에 이십 장을 전진하면서부터 느려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날아 기습적으로 펼쳐 온 윤환의 검은 시리도록 푸른 반월검기를 줄기줄기 쏟아냈는데, 얼마나 위력적이었던지 전진을 거듭하던 운호의 검을 주춤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운호는 일행의 전면에 서서 끊임없이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그의 전진을 막기 위해 수많은 고수들이 공격을 해왔으나 운호는 그들의 공격을 격퇴시키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운상과 운여가 좌우를 막아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위 공격이었다면 천하의 운호라도 걸음이 붙잡혔을 텐데 운상과 운여가 빈 곳을 메우며 보조를 맞추자 속도를 낼 수는 없었으나 전진을 거듭할 수 있었다.

무호계의 특수한 지형도 운호 일행의 탈출을 도와주는 데 한몫했다.

포위한 자들의 숫자는 삼백을 훨씬 상회하는 숫자였으나 제한된 숫자만이 공격에 가담할 수 있었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천혜의 방어막을 형성해 주었기 때문에 운호를 비롯한 일행들은 겹겹으로 둘러친 방어막을 뚫고 움직여 나갔다.

끊임없는 전진.

시간이 흐르며 운호의 몸은 적의 피와 자신의 피가 범벅이 되어 혈인으로 변해갔다.

앞을 막는 자, 모두 죽인다!

점창산에서 무위자연을 꿈꾸며 살아왔으나 한없이 사랑하는 친구들과 사형들의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살귀가 될 작정이었다.

반시진이 지나자 천일평으로 들어서는 능선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갈 수만 있다면 일 각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고 저곳만 통과하면 철혈문 한서 지단의 영향권에 들어서기 때문에 일행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공터가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천검회의 고수들은 그곳을 겹겹이 가로막고 운호 일행을 기다렸다.

갑자기 느슨해진 공격은 공터에서 그들을 잡기 위해 전력을 뒤로 뺐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운호가 공터로 빠져나오자 미리 차단한 채 기다리고 있던 윤환이 천검십팔영을 뒤에 둔 채 앞으로 나섰다.

그의 묵검은 완벽한 흑색으로 광택조차 없었는데 그럼에도 놀랄 만큼 선명한 검신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마검, 마검 하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하자. 꽤 움직였더니 힘들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하다. 이제 그만 목을 내놓아라.”

“그놈 참,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다른 데서 만났으면 꼬리를 말고 도망갔을 놈이 뒤에 있는 머릿수가 든든한 모양이구나.”

느물거리는 윤환의 목소리에 운호가 거칠게 반응했다.

그러자 윤환의 표정에 기괴한 웃음이 떠올랐다.

“크큭. 역시 재밌는 놈이야. 하긴, 다른 데서 만났다면 굳이 네놈하고 싸우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겁이 나냐?”

“당연한 거 아니겠어. 백대고수를 둘이나 잡은 마검과 싸운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인데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나. 난 오래오래 멋지게 살고 싶다.”

“내가 팔다리를 잘라줄 테니, 어디 개처럼 오래 살아보거라.”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정신을 덜 차렸군. 포위된 상태에서도 기가 죽지 않은 걸 보니 네 몸속에 아직 넉넉한 피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너는 이제 죽는다. 오늘 너를 비롯해서 네 뒤에서 헐떡이는 저놈들까지 모조리 죽여주마!”

운호가 으르렁대자 윤환이 뒤로 물러서며 검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겨냥한 곳에는 운상과 운여를 비롯해서 점창 제자들이 온몸에 피 칠을 한 채 서 있었다.

서늘하게 피어오르는 검기가 윤환의 검에서 뭉치듯 일어섰다.

그러자 지금까지 포위만 하고 있던 천검회의 수뇌부가 일제히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숲과는 완전히 다른 진형.

공터의 중앙에 사로잡힌 점창 문인들은 인의 장막으로 둘러싼 천검회의 포위망에 완벽하게 갇힌 상태였다.

고립무원.

마치 거대한 바다에서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운호 일행의 위기는 막막해 보였다.

운호는 슬쩍 눈을 돌려 운상과 운여를 훑은 후 빠르게 뒤쪽에서 진형을 갖추고 있는 사형들과 오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모두 상처를 입어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으나 치명적인 부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다.

혼자의 몸이라면 무슨 수를 쓰든 벗어날 수 있겠지만 일행과 함께라면 어렵게 느껴졌다.

앞을 막고 있는 자들은 물론이고 측면과 후면에서 압박해 오는 자들까지 모두 대단한 무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목숨을 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 몰려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끝끝내 적의 목을 물어뜯어 점창의 마검이 얼마나 독종이었는지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늘어뜨렸던 흑룡검을 끌어올려 윤환과 천검십팔영을 한꺼번에 전권에 놓았다.

지금까지는 탈출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내력의 소모를 극소화하면서 방어 위주로 싸웠으나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몸을 사리면 사랑하는 이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능선까지의 거리는 이제 오십 장.

무슨 수를 쓰든 오십 장의 거리만 확보할 수 있다면 슬픈 눈물을 피할 수 있다.

공격을 시작한 것은 윤환이 먼저였으나 타격을 입고 물러난 것도 윤환이 먼저였다.

천룡무상신공을 완벽하게 풀어낸 운호의 검은 그야말로 파괴의 화신으로 변해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

수십 개의 월형검기를 날려 온 윤환을 향해 운호는 마주 공중으로 솟구치며 회풍의 환(環)자결을 퍼부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운호의 강력한 반격에 윤환은 내력을 극도로 끌어올려 맞섰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일 장이나 튕겨 나가 바닥에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몸은 벌써 일곱 군데의 검상을 입어 벌집으로 변해 있었다.

줄줄 흐르는 피가 그의 백의를 붉게 물들였지만 그는 신형을 바로잡으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옆에 섰던 비령과 사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들 역시 사형제.

눈으로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으니 무슨 의미로 윤환이 자신들을 바라봤는지 금방 알아챘다.

그랬기에 그들은 다시 자세를 갖추고 앞으로 나서는 윤환의 좌우로 따라붙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혼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단 일합의 격돌로 증명되었으니 합격을 해서라도 운호를 잡겠다는 심산이었다.

좌, 우측은 천검십팔영과 삼로가 운상과 운여를 공격 중이었고 후미는 여전히 오륜과 칠현의 파괴적인 공격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는 이전보다 훨씬 흉험했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무라는 방해물이 제거되었고 이동이 멈춘 포위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는 양측의 검에 일말의 주저함도 남기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좁은 공간으로 인해 삼로를 비롯해서 천검회의 무인들이 장기인 검진을 펼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고수들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천검회의 전투부대들은 뒤쪽으로 물러나 포위망을 구축한 채 관망을 했다.

하지만 수뇌부가 후퇴하거나 불리해지면 즉시 공격이 가능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였다.

일견 팽팽해 보이지만 힘의 균형은 명백하게 천검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화검제의 제자들을 한꺼번에 셋이나 상대하고 있는 운호부터, 천검십팔영과 삼로에게 공격당하는 운상과 운여까지. 누구 하나 유리한 싸움을 벌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오륜과 칠현에게 공격당하는 운곡과 운검은 이전에 입은 상처가 부담되었는지 충돌할 때마다 손해를 보고 있었는데 중간에 오행진을 펼친 오검으로 인해 그나마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입술이 타들어 간다.

친구들과 사형들의 몸은 상처가 심해져 핏물이 솟구쳤고 고통으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져 갔다.

그들의 고통이 내 것인 양 느껴져 아프고 슬펐다.

도와주고 싶었으나 화검제의 제자들은 교묘한 연수합격을 펼치며 자신의 검을 붙들어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신의 반열에 들어 있는 화검제의 제자들은 지옥귀왕과 패천일도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만나본 어떤 자들보다 강한 무인들이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결국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절대…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불행의 길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짓이었기에 운호는 이를 악물고 좌, 우방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는 비령과 사영을 향해 그동안 아껴두었던 회풍의 멸자결을 전력을 다해 펼쳤다.

단 일격에 놈들을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이 싸움은 무조건 진다.

그런 마음이었고 그런 각오였다.

물론 윤환의 검이 걱정되었으나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펼친 공격이었다.

운호의 검에서 생성된 원형의 검기들이 귀신의 울음소리와 함께 좌, 우측으로 동시에 뻗어 나갔다.

검기들은 큰 원으로 시작되어 작은 원으로 변하며 적들을 노렸는데 각각 세 줄기의 뇌전이 되어 적의 심장을 노렸다.

콰앙… 쾅…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비령과 사영이 동시에 튕겨 나가 꼬꾸라졌고 뒤이어 운호가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다가 허리를 굽혔다.

회풍을 펼쳐 적을 공격한 후 전력을 다해 방어 초식인 비화를 날렸으나 윤환의 검은 비화를 뚫고 가슴과 옆구리를 길게 찢어놓았다.

고통으로 온몸이 뒤틀렸으나 운호는 이를 악물고 흑룡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회풍에 당한 사영은 쓰러진 채 일어서지 못했고, 비령은 간신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있었으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가슴이 붉게 물든 채 연신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훅… 훅!

거친 바람을 뿜어내고 내기를 돌려 상처 부위를 어루만진 후 급히 주변 혈들을 막았다.

내력 운영에 문제가 생기겠지만 워낙 상처가 컸기 때문에 혈을 막지 않으면 막대한 출혈을 막을 수 없었다.

응급조치를 마치고 정면을 바라보자 윤환이 입을 벌린 채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단 일격에 자신과 무력이 비슷한 두 명의 사제가 쓰러져 버리자 그는 운호가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재차 공격을 하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황함으로 보였지만 그 속에 든 것은 두려움이었다.

팽팽하게 맞선 싸움으로 보였으나 사제들과의 치밀한 연수합격에 밀려 놈은 점점 궁지에 몰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

사소취대.

아니다. 이건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한 독한 승부였다.

새삼 마검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무력뿐만 아니라 과감하게 자신의 목숨을 던질 줄 아는 그의 독심에 슬금슬금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는 담대함과 무력이 있었고 상황을 냉철하게 관조할 수 있는 냉정함도 있었다.

그랬기에 잠시 멈칫하던 그는 자신의 묵검을 치켜들고 천천히 운호를 향해 다가왔다.

무인으로 살아오면서 그 누가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언젠가 죽어야 할 삶이라면 한 올의 비겁함도 남기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무인이다.

더군다나 너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구나.

그 목숨, 이제 내가 끊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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