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13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13화
운곡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검을 들어 비령의 미간을 겨냥했다.
사제들을 찾는 게 급한 이상 노닥거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비령은 그런 운곡의 생각과 행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호오, 네가 칠절문과의 전투에서 날아다녔다는 운곡이란 말이지?”
“들어본 모양이구나.”
“크크크… 점점 일이 재밌어지는군. 좋아, 아주 좋아.”
“별로 좋지는 않을 거다.”
비령의 웃음에 반응한 운곡의 검이 순식간에 오 검을 찔러냈다.
그러자 검풍이 먼저 일고 검기가 그 뒤를 따르며 비령의 전신을 노렸다.
순식간에 펼쳐진 일격. 바람의 그림자 풍영이다.
운곡의 무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화되고 있었다.
칠절문과의 싸움을 위해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회풍은 칠 성이었으나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내력과 검초가 깊어졌고, 강자들과의 사투를 통한 경험을 토대로 두문불출하면서 또다시 수련을 거듭하더니 탕마행을 위해 산문을 나섰을 때는 무려 회풍이 구 성을 넘어섰다.
당문의 최종 병기 흑호 당문혁을 잡아낸 것은 그런 밑바탕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곡의 공격은 갑작스러우면서도 강력했지만 비령을 잡아내진 못했다.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비령이 훌쩍 뒤로 물러나 전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무공도 강했지만 누구보다 두뇌 회전이 빠른 자가 바로 비령이다.
운곡의 서두름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파악한 그는 쉽사리 정면 대결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증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랬기에 그는 뒤로 훌쩍 물러나 재차 접근하려는 운곡을 견제하며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이봐, 바쁘더라도 천천히 하자고. 난 말이야, 천하에 소문이 자자한 자네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그러니 잠시 검을 거두게.”
“네가 나를 언제 봤다고 대화를 나눈단 말이냐.”
“사해는 동도라고 했잖아. 너무 서슬 퍼렇게 대하지 마라.”
“그놈 참, 요물이로다. 피한다고 해서 피할 싸움이 아니고, 막는다 해서 막을 수도 없다. 네가 시간을 벌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운곡이 운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오랜 사형제는 시선 하나만으로도 그 의미를 충분히 눈치챌 수 있다.
비령의 검을 운곡이 견제하는 동안 운검과 다섯의 십삼검이 폭발적인 속도로 청마대의 진형을 향해 치고 나갔다.
급작스러운 돌진.
운검은 작정한 듯 처음부터 분광을 꺼내 들고 청마대의 좌측을 뚫었는데 일격 일격에 접근하는 청마대원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강검이기도 했고 패검이기도 하다.
운검의 검에서는 귀신의 울음 같은 검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 속에 담긴 강력함은 청마대의 목숨을 쓸어버리고도 남았다.
그 뒤를 십삼검이 호위하며 마치 한 덩이 불꽃처럼 움직였다.
운곡은 운검과 십삼검이 청마대를 쓸어버리며 돌파하는 장면을 확인하고 천천히 비령에게 시선을 던졌다.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신형을 날려 비령의 좌측방으로 우회했다.
이번에는 운곡이 싸움을 피하며 몸을 날린 것이다.
급작스러운 도주에 놀란 비령이 따라붙으며 운곡의 등을 향해 검기를 난사했다.
검기는 소리 없이 날아와 독사의 혓바닥처럼 은밀하게 운곡의 등판을 노렸다.
하지만 운곡은 등에 눈이 달린 사람처럼 몸을 뒤집으며 비화를 펼쳐 냈다.
격퇴를 위한 발검이 아니라 충돌의 여파를 이용하기 위한 반격이었다.
콰앙!
강력한 굉음이 터졌지만 승패를 위한 격돌이 아니었으니 서로 간의 거리만 멀어졌을 뿐이다.
운곡은 그렇게 비령이 이끄는 청마대의 숲을 돌파해서 무호계의 서편을 향해 돌진했다.
하나 운곡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이 바로 팔방미로진의 사문이라는 것을…
윤환은 운호 일행이 사문을 벗어나 생문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전력으로 이동하다가 천검삼로의 환사진이 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황당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놈들이 생문으로 향했다 해도 천검삼로가 마지막을 지키는 이상 벗어나기 힘들 것이란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천검삼로의 환사진은 막강한 위력을 지닌 절진이었다.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들은 윤환은 어이가 없어 추적을 멈추고 말았다.
생문을 빠져나갔다는 것은 천일평으로 들어섰다는 이야기였고 천일평 너머에는 철혈문의 핵심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는 한서 지단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곳을 맡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혈무도 왕충이었다.
혈무도 왕충은 철혈문주 호패왕의 의동생으로 초절정의 고수였고 그가 이끄는 철혈칠십이도는 천검회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난 지금도 여전히 귀주에서는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전투부대였다.
더군다나 그 밑으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인정할 절정고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이곳 무호계에 집중한 천검회 전력이 모두 나선다 해도 이긴다는 보장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끝장을 본다는 생각이라면 부딪쳐 볼 만은 했다.
무호계에 몰린 천검회 전력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에 명분만 만들어진다면 물러설 이유가 없다.
하지만 상부에서는 한서 지단과의 충돌을 피하라는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수많은 음모와 전략이 난무하는 시기.
행동 하나에 수많은 목숨이 달려 있고, 헛된 작은 판단으로 대계를 망칠 수 있는 상황이 매일처럼 반복되니 먹잇감을 놓친 게 분하고 억울했지만 대계를 망치는 어리석음까지 저지를 윤환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걸음을 멈추고 운호 일행이 빠져나갔을 서쪽 하늘을 향해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마검의 무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천검삼로의 환사진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사부인 화검제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본 검진 중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녔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 말의 의미는 환사진의 위력이 지금 결과로 나타난 것처럼 쉽사리 깨질 만큼 약하지 않다는 뜻이다.
화검제는 무엇을 그리 쉽게 칭찬하거나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윤환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마검의 무력을 감안했을 때 혹시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천하를 쩌렁하게 울린다는 백대고수를 둘이나 잡아냈으니 마검의 무력은 절대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 분명했으나 그렇다 해도 이렇게 쉽사리 깨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최소한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는 막아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팔방미로진을 깨뜨린 마검의 돌파는 상상을 넘어 불가사의한 속도를 보여주었다.
기가 막혀 한숨이 나왔으나 윤환은 서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미 늦은 것을 후회하기에는 그의 심장이 너무 차가웠다.
그는 언제나 과거보다 미래를 보는 사람이었으니 과거에 연연하며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몸을 돌려 벌판으로 걸어 나갔다.
벌판 너머에는 여전히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고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마치 무적의 병사들처럼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 채 당당히 서 있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것은 고목들이 선 숲으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천검십팔영과 함께 뒤쪽에 머물던 화백이 허공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무표정했던 윤환의 얼굴이 의외의 상황으로 인해 슬쩍 변했다.
모든 것이 끝난 마당에 자신의 앞길을 막는 화백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백은 특유의 냉막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를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대주, 무호계로 점창의 운곡이 들어왔소이다.”
“누구?”
“운곡이요. 나는 그가 마검의 사형이라 들었소.”
“그자가 왜?”
“…마검을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되오.”
“크크큭. 재밌군, 재밌어. 혼자라던가?”
“아니오. 모두 합해 일곱이라 하오.”
“일곱?”
“말로만 떠돌던 풍운대인 것 같소.”
“그자의 위치는?”
“청마대주를 제치고 이쪽으로 오는 중이오. 요안께서는 뒤를 쫓는 중이라 하셨소.”
“돌아가 변명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었는데 이제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구나. 이봐, 화백. 오륜과 칠현은 어디 있지?”
“서쪽과 동쪽에서 놈들을 이쪽으로 압박하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일 각이면 충분하오.”
“좋아, 준비해. 여기서 끝장을 보자.”
“흑명대주와 삼로는 어쩌시겠소?”
“마찬가지야. 놈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수단이 있다면 탈출한 놈들까지 이곳으로 다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이쪽으로 모이라고 해. 천운이 우리에게 있으니 놈들은 오늘 반드시 죽는다.”
운곡은 비령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곧장 앞을 보며 전진했다.
무슨 생각으로 추적을 포기했는지 모르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제들을 찾는 것이었다.
지금은 의문을 해소할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의 입에서는 연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삐익… 삐이익!
내공이 담긴 휘파람 소리는 이백 장을 격하고 울려 퍼지기 때문에 사제들이 이곳 무호계에 있다면 분명 비상음을 듣고 찾아올 것이었다.
하나 불현듯 급작스럽게 서쪽 숲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것은 사제들이 아니라 칠십 명의 흑색 전포를 입은 검객이었다.
적들은 그들이 이쪽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기다린 모양이었는지 좌방을 가로막은 채 검을 꺼내 들고 있었는데 운곡 일행이 나타나자마자 독수리처럼 날아들며 공격을 해왔다.
일사불란한 흑객들의 공격은 삼면 포위 공격이었고 삼인합격을 기본으로 하는 삼형진을 이루고 있었다.
강하다. 그리고 빠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곡과 운검이 전면에 서고 오검이 뒤를 받치는 오행진을 뚫지는 못했다.
연환합격의 기본을 적들은 충실히 지키며 쉴 새 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자들이 운곡과 운검의 검격에 충격을 받고 튕겨 나가면 기다렸다는 듯 다른 검객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동안 조용히 뒤쪽에서 지켜보던 다섯의 용포 검객이 전장에 가담하면서부터였다.
뒤늦게 가담한 그들의 무력은 흑객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서 운곡과 운검이 반격했음에도 뒤로 물러나게 만들지 못했다.
천검오륜.
화검제가 용호산에서 수련하고 있던 다섯 형제를 만난 것은 이십 년 전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허름한 장원에서 선부의 유언을 지키며 가전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는데, 화검제는 그 검법을 견식한 후 감탄을 터뜨리며 천검회로 형제들을 초빙했다고 전해진다.
천검오륜이 익힌 것은 유성칠식으로 오십 년 전 산서를 종횡하며 무적의 명성을 날린 천호성의 독문검법이었는데 오륜은 바로 그의 손자들로 알려졌다.
오륜이 나서고 전장이 팽팽한 접전으로 변했다.
오륜이 운곡과 운검을 가로막자 흑객들의 연환진은 더욱 강력하게 오검의 오행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싸움이 어려워진 것은 아니었다.
운곡과 운검의 검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고 오검이 펼친 오행진도 견고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비령이 청마대를 이끌고 남쪽에서 나타난 것은 싸움이 벌어진 후 불과 반각이 지났을 때였다.
여전히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던 비령은 청마대를 이끌고 곧장 전진해 왔는데 그 기세가 처음 조우했을 때와는 달리 무척 살벌했다.
“운검, 뒤로 물러나자.”
“사형, 이상합니다. 놈들이 일부러 비워놓은 것 같아요.”
비워진 동북방을 흘끗 쳐다본 운검이 반론을 제기했지만 운곡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알아, 놈들은 한쪽으로 우릴 몰려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놈들의 의도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뚫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쩌시려고요?”
“동북방으로 물러서다 즉시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어라. 그러면 놈들의 의도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질들을 이끌고 먼저 가라. 곧 따라가마.”
급하게 말을 마친 운곡의 검에서 검기가 물결처럼 파생되면서 오륜의 검을 일거에 격퇴했다.
지금까지 선보이지 않던 분광의 산(散)자결이었다.
비틀.
오륜의 신형이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운곡의 검이 오륜을 노리고 전진했다.
운검과 사질들이 후퇴할 수 있도록 운곡은 단숨에 십삼 검을 펼쳐서 오륜과 합격진을 구성해서 접근해 온 흑객들을 한꺼번에 공격했다.
콰앙… 쾅… 쾅!
연이은 충돌음이 터지고 흑객들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단 일격에 셋이 죽고 다섯이 나가떨어졌다.
굉장한 신위.
운곡은 위기에 처하자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사일검법의 막강한 위력을 주저 없이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