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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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12화
침묵.
검을 겨냥한 삼로의 눈은 그저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두려울 정도의 패기가 뭉텅거리며 흘러나와 운호 일행을 압박해 들어왔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부딪히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아니, 꼭 위험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막히면 그들을 추적하는 적들에게 금방 등을 내줘야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천검삼로는 환사진을 펼친 채 유일한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뚫지 못하면 팔방미로진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리되는 순간 생문은 사문으로 변하고 그들은 여기서 적들의 주력에게 포위되어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른다.
팔방미로진의 특성상 그들의 진로는 생문이 분명했다. 갈수록 적의 저항이 강력하게 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저항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후위에서 나타난 천검삼로.
분명 이들은 생문의 마지막을 지키는 사자들일 것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이를 지그시 깨물며 친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노인네들이라고 봐주지 말자. 저기만 통과하면 벗어날 것 같으니까.”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춥다, 인마.”
“농담은 무슨…….”
“저 노인네들 기세를 보니까 우리가 봐달라고 해야 될 판이다. 정말 강한 자들이야. 복장을 보니까 천검삼로가 분명해.”
“저자들이 천검삼로란 말이지… 그럼 저건 환사진이겠군.”
“맞을 거다.”
“천검회가 확실히 날 잡으려고 작정한 모양이구나.”
“저자들만 왔을 리 없다. 분명 다른 자들도 같이 왔겠지. 운호…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 끌면 불리해. 죽든 살든 일단 가자.”
“보이냐, 좌측 능선?”
“저긴 왜?”
“저자들의 한 수는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너희들과 한 소저는 뒤쪽에 포위하고 있는 검객들을 뚫고 무조건 저곳으로 움직여. 저기가 미로진의 생문으로 보인다.”
“괜찮겠어?”
“성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잖아.”
“그냥 괜찮다고 말하면 오죽 좋아. 꼭 부담가게 말한다니까.”
긴장한 눈으로 운여가 운호의 말을 받았다.
환사진.
무림일절로 유명한 환사진의 기세가 삼 장이나 떨어져 있는 그들의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들었기에 운여는 농담을 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 엄청난 기세다.
하지만 운호는 그런 천검삼로의 기세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며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목소리로 운여의 농담을 받아쳤다.
“어려운 일 할 때는 생색내라고 가르쳐 주더라.”
“누가?”
“운학 사형.”
“참, 좋은 거 배웠다.”
“크크… 이제 가자. 저자들 번들거리는 눈깔, 정말 맘에 안 들어. 꼭 뱀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
적정의 원리를 가동하지 않았다.
적정의 원리는 강한 적과 마주했을 때 적의 무력을 측정하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가는 기본 무리였으나 운호는 흑룡검을 꺼내 들고 환사진을 향해 곧장 진격하며 분광을 꺼내 들었다.
환사진이 일 초에 승부를 보는 검진이란 사실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니 적정의 원리를 사용했다가는 낭패를 당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산(天山).
분광팔절 중의 하나이자 적과의 단초 승부를 위해 창안 되었던 천산이 하늘에서 거대한 검으로 변하여 환산진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검의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삼로의 냉정을 무너뜨린 건 거대하게 변한 검의 울음소리였다.
검기와 검명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기현상.
이런 현상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들은 찰나의 시간 동안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 천지인의 자세를 풀고 자신들을 향해 떨어지는 거검을 향해 일제히 검을 조준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던 돌풍이 검을 향해 날아갔고 곧이어 그들의 신형이 방위를 바꾸며 운호를 향해 돌진했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뿌연 먼지와 나뭇가지들이 비산하며 오 장 범위의 시야를 완전하게 가로막았다.
잠시 동안 승패를 확인할 수 없게 만든 회오리가 가라앉은 후에야 일 장이나 뒤로 밀려났던 천검삼로가 둔덕을 향해 날아가는 운호 일행을 미친 듯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는 충돌로 인해 난발이 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검상을 입어 피가 흐르는 중이었다.
피가 흐른 것은 천산검로뿐만이 아니었다.
일행의 마지막에서 신법을 펼치고 있는 운호는 환사진을 돌파하면서 옆구리와 어깨에 검상을 입어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비록 중상은 아니었지만 분광의 천산을 펼치고도 완벽하게 잡아내지 못했으니 환사진의 위력은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목적은 달성했다.
그가 환사진을 막는 순간을 이용해서 친구들이 뒤쪽의 검객들을 물리치고 능선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적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뒤쪽에서 천검삼로가 맹렬한 속도로 추적하고 있었지만 추적자가 그들뿐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목적했던 능선에 도착하자 훤하게 터진 평야가 나타났다. 무호계를 넘으면 나타난다는 천일평이 분명했다.
천일평부터는 철혈문의 핵심 고수들이 상주하는 한서 지단의 관할이었으니 천검회는 더 이상 일행을 추적하지 못할 것이다.
친구들과 한설아가 능선을 타넘어 천일평으로 달리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운호가 능선을 가로막았다.
천검삼로를 여기서 한 번 더 제지하면 친구들은 완벽하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을 들어 달려오는 천검삼로를 향해 겨냥했다.
그의 검은 어느새 백색 검기를 뿜어내며 적들의 몸통을 노렸다.
역시 고수들.
천검삼로의 신형이 능선에 오르지 않고 운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를 피해 유연하게 회전하며 비탈면에 섰다.
환사진을 펼치고도 제압하지 못한 운호와 무작정 부딪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걸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일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환사진이 파훼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운호가 중간에서 공격을 멈추고 달아났기 때문에 마지막 초식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환사진이 무적으로 군림한 것은 최후의 초식 환사의 위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선조들은 진의 이름도 환사로 지었다.
최상의 조건에서 전력으로 싸운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그들은 숨을 고른 채 운호를 노려봤다.
하지만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놈은 능선의 정점에 서서 견제했고 자신들은 비탈면에 있었으니 진형을 갖추기가 힘들었다.
섣불리 덤비면 죽는다.
백색 검기를 내뿜고 있는 운호의 검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운호는 검을 앞으로 내민 채 천검삼로를 견제만 했다.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다.
일행의 안전만 확보된다면 억지로 생목숨을 끊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삼로는 비탈면에 서서 망설이는 중이었다.
당연한 행동으로 보였다.
환사진을 펼치기 어려운 지형이었으니 삼로는 분노로 가득 찬 눈을 희번덕거리면서도 쉽게 공격을 해오지 못했다.
일 각만 견제할 생각이었다.
일 각이면 친구들은 천일평에 도착할 것이고 삼로가 아무리 대단한 고수들이라 해도 자신 역시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을 금방 바꿀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익숙한 휘파람 소리가 무호계 쪽에서 급하게 울려와 그의 귀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삐익… 삐이익!
부릅뜬 운호의 눈이 삼로를 넘어 무호계의 울창한 숲으로 향했다.
사형제들의 비음.
점창산에 있을 때 풍운대는 언제나 휘파람으로 중요한 연락을 취하고는 했다.
휘파람은 날카로운 주파음으로 내공을 실으면 능히 이백 장을 날아가기 때문에 사형제는 고유한 신호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들린 신호음은 대사형인 운곡이 사제들을 찾을 때 내는 비상음이었다.
너무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워 운호의 시선이 친구들 쪽으로 향했다.
거의 오십 장 이상 달려 나갔던 친구들도 휘파람 소리를 들었던지 신법을 멈춘 채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운곡은 동굴에서 나와 사제들의 흔적을 찾으며 전력으로 질주해 나갔다.
풍운대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들의 행적을 알리는 비표를 일정 간격으로 남기도록 훈련받아 왔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습관적으로 비표를 남기는 것은 무려 이십 년 가까이 훈련받아 오며 생긴 익숙함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위급함 중에서도 사제들은 일정 간격으로 비표를 남겼다.
아직 비표가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부상이나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기에 운곡과 운검은 십삼검을 이끌고 사제들의 뒤를 쫓았다.
적들과의 조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표의 흔적은 점점 급해지고 있었으나 이상하리만치 적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운곡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비표가 급해지고 적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제들이 점점 더 위험해진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진형을 갖추었던 적들은 분명 급격 돌파를 강행하고 있는 사제들을 추격하느라 포위를 풀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더욱 속도를 끌어올렸다.
적은 숫자로 적들에게 포위되어 고전을 면치 못할 사제들을 생각하자 온몸에 난 솜털마저 뻣뻣하게 일어섰다.
적과의 조우가 시작된 것은 무호계로 들어온 지 반시진이 흐른 후부터였다.
워낙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 보니 추격진의 끝머리를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운곡은 그들 사이를 통과하며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지금의 목적은 사제들을 조우하는 것이었기에 막아오는 적들을 일일이 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을 해온 적마저 그냥 둔 것은 아니었다.
운곡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는 절제를 거둔 상태였기 때문에 막강 그 자체였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튕겨져 나갔는데 그 뒤를 따르는 운검과 다섯의 십삼검이 후위를 받쳐 마치 하나의 거대한 구체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어딜 그렇게 열심히 가는 거냐. 멈춰라!”
맹렬하게 날아가는 운곡을 향해 고함 소리와 함께 푸른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번개는 반월처럼 휘어져 운곡의 전신을 한꺼번에 노렸는데, 그 기세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소리도 없고 기세도 없다.
그럼에도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 사이를 뚫고 운곡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급격하게 몸을 회전시킨 운곡의 검에서 사일검법의 방어 초식 비화(飛花)가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으나 비화는 푸른 번개를 격파하고 공격자의 미간을 겨냥했다.
공격자는 노송들로 가득 찬 숲의 중앙에 당당히 서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청건, 그리고 우측 상단에 비마가 새겨진 청색 전포를 입고 있는 사내.
사내의 얼굴은 하얗고 가늘어 마치 여인처럼 보일 정도였으나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아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비령.
화검제의 여덟 번째 제자이며 청마대의 수장이기도 한 사내였다.
청마대는 비령의 수족들로 화령검진을 익힌 일급 검객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비령의 뒤에 서서 오방을 장악한 채 운곡 일행의 진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비령은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노송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와 운곡과 삼 장 거리에 멈춰 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볼수록 어색한 웃음이었다.
재밌는 건 목소리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터무니없이 굵다는 것이었다.
“흑색의 전도복에 독수리라… 너희들은 점창 사람이냐?”
“그렇다.”
“참 별일도 다 있군. 잡으려는 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른 놈들이 죽여달라고 들어왔구나.”
비령이 여전한 웃음을 매달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웃음은 버릇이었지만 고개를 갸우뚱한 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생겼기 때문에 한 행동이다.
표정이 변한 것은 비령뿐만이 아니었다.
운곡 역시 비령의 말을 들은 후 급격하게 표정이 바뀌었다.
비령의 말에 따르면 사제들은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랬기에 운곡의 행동이 빨라졌다.
“넌 누구냐?”
“파한검.”
“네가 화검제의 여덟 번째 제자인 비령?”
“맞아. 바로 내가 요안의 도살자로 불리는 그 비령이다.”
“그 별명이 자랑스러우냐?”
“멋있잖아. 위압적이기도 하고. 난 파한검보다 요안의 도살자가 더 마음에 들어.”
“크크큭. 그렇구나. 하지만 안타깝다. 오늘 부로 네 목숨이 끊어질 테니 앞으로 그 별명을 다시는 듣지 못할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지옥에 가면 정확히 고하거라. 도살자를 때려잡는 게 전문인 점창의 운곡이 보내서 왔다면 아마 염왕께서도 불쌍하게 여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