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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11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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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111화

서두르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을 알고 있으니 천천히 움직여 적들의 진형을 확인하고 약점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도는 무호계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숲은 온통 살기로 덮여 있었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검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분산이 아닌 집중이었고 그로써 약점을 완전히 없앴으니 적의 수장은 진법에 일가견이 있는 자가 분명했다.

포위망을 뚫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약한 부분을 깨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야가 완벽하게 가린 지형에서는 그런 전술적인 시도가 불가능해진다.

그랬기에 운상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쯧쯧… 머리 아프게 생겼네.”

“넓고도 길다. 무슨 계곡이 분지처럼 커. 더군다나 온통 나무로 덮여 있으니 꽤나 힘든 길이 되겠다.”

“운호, 어쩔래?”

운여가 무호계를 바라보며 눈을 지그시 오므리자 운상의 시선이 운호에게 넘어갔다.

무호계가 어떤 지형인지 미리 알고 오지 못했기 때문에 의외의 상황과 마주치자 판단이 어려워졌다.

뒤로는 못 가고 앞으로만 가야 하는 상황.

그런데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마치 철벽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렵다.

운상이 물은 것은 돌파의 시기를 말한 것이었다.

철벽이 가로막았어도 돌파하지 않으면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질문에 운호가 대답을 내놓은 것은 송계와 파둔 쪽을 흘끔 바라본 후였다.

여기서 적의 주력에게 진로를 차단당하면 송계와 파둔뿐만 아니라 다른 곳을 가로막고 있던 자들까지 포위망에 가담하게 될 것이 뻔했다.

정말 그리되면 자칫 지독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자신 혼자라면 어떤 수를 쓰든 도주할 수 있겠지만 친구들과 한설아가 걱정되었다.

그랬기에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목구멍에서 잘게 울려 나왔다.

“가려고 했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 썩 기분은 좋지 않아. 꼭 입을 벌리고 있는 맹수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 같구나.”

“이 시점에 꼭 그런 말을 해야겠냐!”

“신경질 내지 마. 네 눈에도 쉬워 보이지는 않잖아.”

“아무리 봐도 저건 팔방미로진이다. 무사히 빠져나가긴 어려울 것 같긴 하다.”

“그럼 돌아갈까?”

운상의 굳어진 눈을 본 운호가 슬쩍 운을 띄웠다.

천검회에서 청무강을 완벽히 틀어막아 놓았겠지만 무호계를 뚫고 나가는 것보다는 덜 위험할 것이다.

물론 청무강을 건너고 난 후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해도 뒤로 후퇴하면 당장의 위험은 피할 수 있다.

팔방미로진은 삼십 년 전 진법의 대가인 천기자에 의해 창안되었는데 다수의 병력으로 절대고수를 잡을 때 탁월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록 무력이 떨어지더라도 끊임없는 공격을 통해 고수의 내력을 갉아먹고 끝내 명줄을 끊어놓는 차륜전의 정화가 바로 팔방미로진이었다.

돌파가 난해한 진법을 펼쳐 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적들은 아주 작정을 한 것으로 보였다.

워낙 유명한 진법이었기 때문에 운호 역시 한눈에 알아봤다.

돌아가자는 말을 꺼낸 것은 팔방미로진의 돌파가 그만큼 힘들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동시에 피식거리며 웃었을 뿐이다.

그들은 운호가 농담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너 따라다니면서 여기저기 찢어진 게 한두 번이냐. 걱정하지 말고 가자.”

“역시 운상이가 말 하나는 정말 잘해.”

“말뿐이 아냐. 행동도 진실해서 여자를 사귀면 정말 잘해줄 거다. 난 한 소저가 이런 내 장점을 잘 알아줬으면 좋겠어.”

“운상 오라버니, 전 예전부터 알아보고 있었어요. 여기서 벗어나면 책임지고 아름답고 현숙한 사람을 소개시켜 줄게요.”

농담으로 한 말에 한설아가 곧바로 반응을 보이자 운상의 얼굴에서 유쾌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운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들었냐, 운호!”

“들었다.”

“그러니까 인마, 앞에서 길 잘 터. 나 크게 다치면 당분간 소개도 받지 못하니까. 알아서 해.”

“미치겠네.”

흑룡검을 꺼내 든 운호는 정중앙을 향해 방향을 잡은 후 신법을 펼쳐 날아갔다.

언뜻 생각에는 좌측이나 우측이 진세의 약점일 것이란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진형에서 그곳은 사문(死門)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거대한 숲을 이용한 팔방미로진(八方迷路陳)은 이백에 가까운 병력과 하나가 되어 운호 일행의 전진을 촘촘히 가로막았다. 시전자에 따라 생문과 사문이 복잡하게 변하는 팔방미로진의 특성은 몸으로 직접 겪어봐야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 죽음인지 삶인지 알 수 있다.

 

전방을 운호가 서고 운상과 운여는 양 측방을 막는 형태였고 무력이 떨어지는 한설아는 중앙에서 그들을 따랐다.

적과의 조우가 시작된 것은 숲으로 들어선 지 불과 오 장 정도였다.

무호계를 가로막은 천검회의 병력은 윤환의 직속부대인 팔십 명의 상무대와 천검삼로가 이끌고 온 오십 명의 흑철단, 천검십팔영까지 모두 합해 이백에 조금 모자란 숫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에 불과한 인원이었고 운호 일행이 무호계에 나타나는 순간 전서가 날았기 때문에 반시진도 되지 않아 무송과 병천, 송계와 파둔에 배치된 이백여 명의 병력이 추가로 도달할 것이다.

단순한 병력의 합류라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어려운 것은 그들을 이끌고 있는 강력한 고수들이 한꺼번에 이곳 무호계로 몰리는 것이 문제다.

화검제의 적전제자인 비영과 사영은 윤환의 사제였으나 그 무력이 고하를 가리기 어려울 만큼 강했고 송계와 파둔을 차단하고 있는 오륜과 칠현은 천검회가 자랑하는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운호는 천라지망에 가담한 자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삼필사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천검회가 자신을 잡기 위해 엄청난 고수들을 대거 파견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이곳 무호계를 지키는 자는 그중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녔을 것이고 다른 곳을 차단한 자들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시간에 무호계를 돌파해야 한다.

천라지망을 형성했던 추가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무호계에 펼쳐진 팔방미로진을 돌파하지 못한다면 일행은 커다란 위험에 직면할 게 뻔했다.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무령의 눈길에 불안감과 초조함이 점점 진해졌다.

불현듯 나타난 운호 일행은 지체 없이 무호계로 뛰어들었는데 마치 거대한 올가미로 들어가는 미련한 동물들을 보는 것 같았다.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전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운호 일행의 무력으로 봤을 때 막는 자들은 부상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을 텐데도 숲에서는 아무런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무호계의 전투를 살벌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전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는 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수련과 담력, 그리고 무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랬기에 무령은 움찔거리는 몸을 참지 못하고 무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이번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저들을 도와줘요.”

“안 된다.”

“제발요.”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저자가 대체 너에게 뭐란 말이냐!”

“오라버니…….”

뭐라고 대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 있는 걱정과 고민은 급했고 간절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무상은 길게 숨을 내쉬며 검을 붙잡았다.

강제하지 않는다면 무령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혼자라도 무호계에 들어간다.

이십오 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무령이 저런 눈을 하고 있을 때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착하고 더없이 순수한 동생이었지만 한번 뜻을 세우면 절대 꺾는 법이 없었다.

고개를 흔들어 부정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는 검을 잡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그는 동생을 위해서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곤 했다.

은신처에서 먼저 몸을 일으키는 동생의 어깨를 무상이 급하게 잡은 것은 남쪽에서 나타나 바람처럼 무호계로 들어서는 일단의 무인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오십에 달했는데 똑같이 청색 무복을 갖춰 입은 검사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본 무상의 이마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청마대는 화검제의 여덟 번째 제자인 비령의 수족들이었고 이틀간 그들을 집요하게 추격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무령아, 청마대가 왔다. 저들이 왔다면 곧 흑명대도 온다는 뜻이다. 우리를 쫓던 놈들이 왔으니 상황이 더 어렵게 되었다.”

“그런 것 같아요.”

“아마, 저들 외에도 천검회의 핵심 전력들이 이곳으로 몰릴 것이다. 그래도 가겠느냐?”

마지막으로 물어본 말이었다,

그의 간절한 만류를 우회해서 꺼낸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령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가야 해요, 오라버니. 안 가면 전 아주 오랜 시간을 후회하며 지낼 것 같아요.”

 

운호는 친구들에게 한 약속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숲에 은폐했던 수많은 적들이 앞을 가로막아 왔으나 운호의 검은 그들을 추풍낙엽처럼 베며 오직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강간이 뚫린 그의 검에서는 거의 일 척에 달하는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적들의 진형을 헤집었다.

하지만 점점 중앙에서 벗어나 우측으로 방향이 틀어지고 있었다.

팔방미로진의 기본은 합격진이 아니라 연환진이었다.

그것의 의미는 다수로 공격을 해오는 것이 아니라 지형을 이용해서 소수가 공격한단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포위된 자의 방향을 더욱 강력한 포위망 속으로 조금씩 틀어버려 결국 내력이 고갈되게 만드는데, 운호의 돌파 방향이 중앙에서 벗어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운호야, 뭔가 이상해. 방향이 우측으로 벗어난 것 같아!”

뒤를 따르던 운여가 소리치자 검을 휘두르던 운호가 신형을 멈췄다.

나무로 가려져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없었으나 운여의 말대로 방향이 틀어진 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에는 병력의 움직임이 없었으나 반대쪽은 날카로운 살기와 함께 흑의 검사들이 쌍을 이루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운여의 목소리가 올라간 것은 그런 일이 일다경 동안 계속되었을 때였다.

“운호, 방향을 틀어. 아무래도 이놈들이 우리를 사문으로 모는 것 같다.”

“그런 것 같지?”

“시간 끌면 불리해. 빨리 가자.”

재촉하는 목소리에 운호의 검이 막 공격해 온 흑객들의 검을 부서뜨리며 방향을 바꿨다.

그러자 둘 셋씩 공격해 오던 인원이 증가되며 오행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다섯이 하나가 되어 가로막은 검객들은 완벽한 합격진을 이루며 촘촘한 검기들을 날려왔다.

압력은 더욱 거세졌고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고수들이 나타나 검객들을 지휘했는데, 일검으로 가차 없이 튕겨 나가며 길을 내주던 처음과는 달리 사생결단의 자세로 완강하게 버텼기 때문에 점점 돌파 속도가 느려졌다.

그럼에도 운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처럼 무풍지대를 지나는 것과 같은 속도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운호의 강력한 검은 적들의 오행진을 격파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세 개의 오행진을 격파하고 나무가 자라지 않은 둔덕을 넘자 세 명의 노인이 이십여 명의 검객과 함께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키. 노인 같지 않은 곧게 펴진 허리, 그리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붉은 홍안.

얼굴에 주름마저 없었다면 절대 노인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신체를 지닌 자들이었다.

천검삼로.

화검제의 오랜 친구들로 귀주를 석권하기 위해 질풍처럼 질주할 때 언제나 선봉에 섰던 검사들이었다.

그들의 무력은 귀주무림에서 숨 쉬고 살던 자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사신으로 통했던 삼십 년 전.

그들은 환사진이라는 절세의 합격진으로 수많은 적들을 참살하며 무적으로 군림한 무인들이었다.

삼품.

셋의 자세가 모두 다르다.

운호를 겨냥한 그들의 검은 땅과 하늘, 그리고 몸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람의 소용돌이가 그들의 중앙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소용돌이는 느리게 회전하더니 그들이 내기를 뿜어내자 미친 듯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환사진.

단 일 초의 승부로 적의 숨통을 끊어버린다는 천검삼로의 절세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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