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10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10화
무호계는 산을 타고 내려와 넓게 퍼진 분지였다.
그럼에도 계곡이라 표현된 것은 그 모양새가 호리병처럼 끝부분이 움푹 파였고 산과 산을 연결하기 때문이었다.
넓이는 백여 장이 넘고 길이는 삼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분지였으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막상 앞에서면 시야가 채 일 장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옹안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이용하는 것은 다른 쪽이 모두 산으로 길게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송계와 파둔으로 넘어가는 방법도 있으나 그곳은 지형이 험악했고 누군가가 미리 차단하고 지킨다면 꼼짝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무호계를 지키는 주력이 뒤를 가로막고 친다면 천하의 어떤 고수가 온다 해도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랬기에 윤환은 천검회의 주력을 무호계에 배치시킨 채 운호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들의 경로로 봤을 때 목적지는 옹안이 분명했으니 이곳 무호계만 지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내려졌다.
먹잇감을 기다리는 무호계는 슬금슬금 피어나는 살기로 인해 온 숲이 하나의 거대한 무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천검회 무인들은 기세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는데 애초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윤환의 기세다.
비록 천라지망을 깔아놓고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윤환은 처음부터 대놓고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비겁하게 숨어서 뒤를 치는 것은 치욕으로 여기는 냉혹한 승부사였다.
“아예 저놈들은 자기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러게요.”
“피할까?”
“아뇨, 피하지 않을 거예요.”
“어찌 그리 잘 아느냐?”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면 칠백 리를 돌아가야 해요. 아니, 청무강이 막혔으니 돌아가지도 못하겠군요. 어쨌든 그의 목적지는 강서니까 절대 피하지 않을 거예요.”
“강서는 왜?”
“마창을 잡으러 간다고 했어요.”
“미친… 마창이 누군데, 마창을 잡아. 더군다나 마창은 주로 강북에서 움직이는 자다. 강서에 있을 리가 없는데 거기는 왜 가?”
“그는 지옥귀왕이 죽으면서 한 말을 믿고 있어요.”
“참으로 어리석은 자구나. 그런 허황된 말을 믿다니 …….”
무상이 억눌린 한숨을 지으며 혀를 찼다.
동생의 말대로 정말 마검이 강서로 마창을 잡으러 간다면 반드시 이곳으로 온다.
운호가 한심하다는 뜻에서 혀를 찼지만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벌써 백대고수 중 둘이나 마검에게 당했다.
지옥귀왕이나 패천일도가 비록 백대고수 중 하위권에 속하는 자들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마검의 무력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백대고수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원하거나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무인들의 세계에서 언제나 존경과 존중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둘이나 잡아낸 마검이 이제는 마창을 잡겠다고 강서로 향한다고 한다.
마창은 무림 서열 이십구 위에 오른 자였다.
비록 갖은 악행으로 삼대마두에 속하는 불명예를 얻고 있었으나 무력만으로 놓고 본다면 마창은 경천동지할 위력을 지닌 절대고수였다.
태극혜검의 극의를 연마하면서부터 누군가에 대한 두려움을 버렸다.
어떤 무인을 상대하든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절대 지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을 가졌다.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근간에 둔 태극혜검의 오의를 익힌 이상 목숨이 위협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게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였다.
하지만 상대가 백대고수에 속한 고수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아무리 태극혜검이라도 절대고수와의 대결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이 담보 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마창이 속해 있는 천강십오성 이상의 고수들이라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몸을 피해야 한다.
그들은 태극혜검을 대성하고 나서야 간신히 상대할 수 있는 강자 중의 강자들이었다.
무상의 마음이 무거워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조차 피하고 싶어 하는 마창을 잡겠다고 강서로 향한다는 마검의 행동이 그의 마음에 돌덩이를 올려놓았다.
하지만 동생인 무령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를 쫓던 자들까지 모두 이곳으로 모였어요. 마검 일행이 위험할 것 같아요.”
“그래서?”
“내버려 두면 그들은 살아남기 힘들 거예요.”
“무령아… 그건 그들의 일이다.”
“그래도…….”
“그만하거라. 너는 마검과 더 이상 엮이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느냐. 더 이상 마검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다. 대신… 너도 그를 잊어야 한다.”
무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틀 동안 그들을 쫓던 천검회의 무인들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진 것은 분명 마검 일행을 잡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천검회의 추적은 집요하고 날카로워 수많은 난관을 뚫어내야 했다.
그런데 동생은 다시 마검 일행을 도와 싸움에 가담하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는 사문에서 내린 명이 있었기에 가야 할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자칫 천검회와 계속해서 각을 세우게 되면 사문에 부담을 지울 수도 있기 때문에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생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그리하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동생의 눈은 마검에 대한 걱정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는 동생이 원하는 것을 모른 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동생의 아픔은 자신에게는 고통이었고 동생의 괴로움은 언제나 그의 가슴을 옥죄게 만드는 통증을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동생의 아련한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순간은 동생에 대한 사랑이 식거나 자신의 목숨이 끊어졌을 때뿐이니 매몰차게 거부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사숙, 여기서 비표가 끊어졌습니다.”
명호가 사방을 휘둘러 본 후 운곡의 정면으로 날아와 보고를 했다.
그러자 운곡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은 후 천천히 정면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나무숲에 은밀하게 가려진 동굴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운검!”
“예, 사형.”
“너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라. 내가 들어가 보겠다.”
“조심하십시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전투의 흔적을 보면서 운검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다섯 방향으로 나뉘어 탕마행에 올랐던 풍운대 중 운곡과 운검이 다시 만난 것은 오 일 전이었다.
중경을 거쳐 호북으로 이동하던 운곡과 광서를 거쳐 호남으로 이동하던 운검은 운호 일행이 천검회와 시비가 붙어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과 추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곧장 강서로 이동해 왔다.
아마도 다른 풍운대 역시 소문을 들었다면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지만 지금까지 합류한 것은 둘뿐이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곧장 운호 일행의 행적을 추적해 왔는데 비표가 끝난 곳은 바로 이 동굴이었고 사방은 격렬한 전투로 인해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운곡은 운검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는 명자배 십삼검 다섯을 지휘해서 사방을 통제하는 걸 확인하고 곧장 동굴로 날아들었다.
동굴의 입구 역시 싸움이 벌어져 병장기의 흔적이 여기저기 나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싸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동굴의 끝 부분까지 조사한 운곡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피로 젖은 붕대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무더기를 이룬 붕대들과 피의 양으로 봤을 때 부상당한 사람의 상처는 목숨이 위험할 정도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다친 사람은 운호가 분명할 것이다.
지옥귀왕에 이어 마검이 패천일도와 일전을 벌였다는 소문은 이곳으로 오기 전 영양에서 천검회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의 은밀한 대화에서 알게 되었다.
정말로 패천일도와 싸움을 벌였다면 운호 역시 성하지 못했을 테니 이 피는 운호의 것일 가능성이 컸다.
운곡의 마음은 저절로 급해지기 시작했다.
운호와 사제들은 여기서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다 적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유운신법을 최대로 펼쳐 동굴을 빠져나간 운곡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검을 향해 소리를 쳤다.
“운검, 급하다.”
“왜 그러십니까?”
“사제들이 위험하다. 아무래도 여기 있다가 탈출한 것 같다.”
“어쩐지 싸운 흔적이 밖으로 났다 했습니다.”
“운호가 다친 것 같다. 급해!”
“어째서요?”
“동굴 안에 피 묻은 붕대가 쌓여 있었다. 패천일도와 싸웠다더니 아무래도 운호인 것 같다.”
“으…….”
운곡의 말을 들은 운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역시 사제가 패천일도와 싸웠다는 소문을 들은 후 줄곧 운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곡은 그의 반응을 뒤로하고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는 풍운대의 대사형답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움직인다. 내가 흔적을 찾겠다.”
운호는 운상과 운여의 상처를 치료하고도 쉽게 일어서지 않았다.
운상은 괜찮았지만 운여의 상처가 생각보다 조금 깊었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쉬지 않고 전력으로 신법을 운용하는 것은 평소보다 많은 내력을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천검회의 공격은 없었다.
그토록 극렬하게 따라붙던 추격 병력이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지금까지 한 번의 공격조차 해오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더 커다란 위험이 닥쳐 올 것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청무강을 건넌 순간부터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미 청무강은 천검회의 무인들로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을 게 뻔했다.
이곳 상현은 철혈문의 영역에서 벗어난 곳으로 천검회의 전위부대인 숭천 지단의 앞마당이다.
더군다나 청무강은 마천 지단과도 인접되어 있어 수많은 병력으로 완벽한 차단이 언제든지 가능했다.
이미 천검회는 운호 일행이 상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퇴로를 틀어막은 채 핵심 전력을 끌어모아 그물망을 치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이리된 이상 충분히 내력을 회복한 후 일어서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었다.
“그만 가자.”
“더 쉬어도 된다. 시간은 많으니까.”
“여기서 살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서둘 필요도 없어.”
운여가 운공을 풀고 눈을 뜬 후 천천히 입을 열자 운호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운여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면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운상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배를 문지르며 눈꼬리를 치켜떴는데 천하태평인 운호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서둘 필요가 왜 없어. 배고파 죽겠는데. 먹을 거 떨어진 게 언제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그러고 보니 배고프네.”
갑자기 생각난 사람처럼 운호가 자신의 배를 문지르자 운상이 혀를 찼다.
그러고는 곧장 운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쯧쯧… 하여간 무신경하기는. 운여야, 상처는 괜찮냐?”
“거의 다 나았다. 조금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야.”
“다행이네. 그렇다면 이제 가자. 어차피 싸울 거 뒤로 미룬다고 좋아지는 건 아니잖아. 배고파 죽으나 싸우다가 죽으나 죽는 건 똑같으니까 일단 가자.”
“맞는 말이다.”
운여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자 운상이 운호를 바라봤다.
둘은 합의 봤으니 어쩔 거냐는 시선이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운호의 시선이 한설아를 향해 옮겨졌다.
“소저도 배가 고프오?”
“네.”
“그럼 가야겠구려. 대신 소저는 내 등을 놓치지 마시오.”
“알았어요.”
“아마 힘든 싸움이 될 거요. 이번에는 내가 소저를 지켜주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지 모르오.”
“저 역시 무인입니다. 저를 부끄럽게 만들지 마세요.”
한설아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고 목소리가 비장하게 흘러나왔다.
그동안 자신으로 인해 운호 일행은 많은 부상을 입은 것은 그녀가 스스로 그들의 보호막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무인의 혼을 숨기고 다른 사람의 보호를 자청했으니 청성의 명예와 자신의 자존심을 훼손시키는 짓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런 경우가 거듭되면서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를 악물었다.
청성이 키워낸 차세대 무인의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운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후 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검을 어깨에 올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장을 보자는 싸움이 아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알아.”
“선두는 내가 선다. 무조건 적진을 돌파해서 무호계를 넘을 거니까 너희들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 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