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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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09화
옹안(甕安)까지의 거리는 백 리.
철혈문의 서쪽을 방어하는 한서 지단이 자리한 곳으로 인구가 오만에 달하는 제법 큰 도시다.
한서 지단은 천검회와 접경을 이루는 지리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기 때문에 철혈문의 핵심 전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운호 일행이 도주로를 옹안으로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옹안까지만 갈 수 있다면 천라지망은 자연스럽게 벗겨진다.
아무리 천검회가 많은 무인들을 풀었다 해도 철혈문의 핵심 전력이 웅크리고 있는 옹안까지 따라오기는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아직 옹안까지는 백 리가 남아 있었고 일행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무려 이십여 번의 전투와 돌파를 병행했고 한 번도 쉬지 못했기 때문에 부상을 당한 채 움직인 운상과 운여는 거의 녹초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운호가 선두에 서서 그들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운호는 신법을 펼쳐 움직이면서 강한 기운이 가로막으면 즉시 방향을 틀었고 기운이 약할 때만 돌파를 시도했다.
그랬기에 강적과는 거의 부딪친 적이 없었다.
만약 천라지망을 지휘하고 있는 수뇌부와 만났다면 이렇듯 멀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헉헉… 운호야, 잠시 쉬자.”
운여의 지친 음성에 앞장서 달리던 운호의 신형이 유려하게 회전하며 착지했다.
그러고는 번뜩이는 시선으로 주변을 확인한 후 신형을 고정시켰다.
“힘든 모양이구나.”
“다친 데가 아파 죽을 지경이다.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좋겠어.”
“움직이기 힘드냐?”
“솔직히 아까부터 힘들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가고 싶은데 이제 도저히 안 되겠어.”
“너희들 상태를 보니 어쩔 수가 없겠다. 할 수 없지. 점점 어려워지겠지만 일단 치료부터 하자.”
운호의 행동은 빨랐다.
그는 지체 없이 친구들에게 다가와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는데 그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이대로 옹안까지 내달렸다면 두세 번의 돌파로 천라지망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워낙 빠르게 전진했기 때문에 천검회의 핵심 고수들은 상당수 뒤쪽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물론 꽤 많은 자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을 테지만 나머지 삼방을 가로막고 있던 자들까지 합류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무서운 용담호혈을 뚫어야 한다.
그럼에도 운호는 친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아무 말 없이 치료하기 시작했다.
앞에 닥칠 일이 어떠하든 친구들이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걸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무인들을 합쳐 천하인들은 십제라는 명호를 붙여주었다.
무천십제(武天十帝).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무림백대고수는 절대고수를 상징하는 이름이었고 무림인들의 우상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무천십제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모든 무인의 이름 앞에 자신들의 병기를 올려놓았다.
새롭게 나타난 절대고수들에 의해 백대고수들의 면면이 수시로 바뀌었지만 무천십제만은 이십 년 동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만큼 그들의 무력은 압도적이었고 경이적이었다.
화검제가 무천십제에 포함된 것은 이십일 년 전 남궁세가의 전대가주이자 검성으로 불리던 남궁청을 칠백 초 만에 꺾고 난 후부터였다.
당시 화검제의 나이는 마흔셋이었으니 무림은 신성의 탄생을 바라보며 경이에 찬 환호성을 터뜨렸다.
어느 날 문득 혜성처럼 나타나 십제의 일인이었던 검성을 격파한 그는 신진무인들의 우상이었고 무림의 일각을 단숨에 휘어잡은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의 독문무공은 월광검법(月光劍法).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상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설의 검법이라 했고, 은밀하게 떠도는 소문에는 소림에서 달마검법과 함께 소장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분실된 후 이백 년간 사라졌다가 화검제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인 화검제가 검법의 기원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월광검법은 신비 속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은 월광검법의 기원에 대해 굳이 알려 안달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그 위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강호에 출도해서 천하를 종횡하며 수없이 많은 강자와 대결을 했고 마지막에 검성을 꺾는 순간까지 월광검법은 한 번도 패배를 기록하지 않은 무적의 검초였다.
검이 날면 달이 뜨고, 달이 떠서 빛무리를 흘리면 상대는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날카로운 월형을 바라보며 쓰러지곤 했다.
무적의 검세.
소리도 없고 기세도 없다.
차갑고 은밀했으며 고요 속에서 적을 벤다.
무형검(無形劍).
그렇다. 월광검법의 요체는 무형검이었고, 암검이었으며, 분광검이기도 했다.
화검제는 무천십제(武天十帝)에 포함되면서부터 열한 명의 제자를 키웠다.
혹자는 삼화, 오룡, 칠수, 구혈객, 십이도, 십팔영, 이십삼객, 삼십이파 등 천검회의 특수부대들도 화검제가 직접 훈련시켰으니 제자나 다름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의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특수부대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것은 날카롭게 병기를 벼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잘 죽일 수 있도록 살인 기계를 양성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건 무리가 따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제자를 키운다는 것은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과연 얼마나 다를 것인가.
살인 기계를 만드는 것과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는 것.
분명 거기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화검제가 직접 키웠다는 천검구혈객을 비롯해서 특수부대들의 능력이 막강한 것은 사실이나 적전제자들의 무력은 그들 전부가 덤벼도 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만큼 화검제의 적전제자들은 무서운 무력을 지녔다.
천검회의 암천십일비검(十一飛劍)은 바로 화검제가 분신처럼 키운 적전제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간이로 쳐 놓은 천막에 앉아 섭선을 흔들고 있는 자는 삼십 후반의 백의 사내였다.
그는 청옥이 박힌 영웅건을 이마에 두르고 있었는데 옷차림과는 다르게 얼굴에 검상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징그럽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사내다움을 나타내는 야성이 줄줄이 새어 나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을 하게 만든다.
청백(淸白), 윤환.
화검제의 다섯 번째 제자로 언제나 백의에 청옥이 박힌 영웅건을 두른다 해서 청백이라 불리는 사내다.
그러나 천검회의 무인들은 대부분 그를 염라(閻羅)라고 불렀다.
적으로 마주 선 자들에 대해서는 일검에 목숨을 끊어버리는 냉혹한 심성과 잔인함을 함께 가졌기 때문이었다.
윤환은 섭선을 휘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막에는 흑색 무복을 입은 삼십 중반의 사내가 서 있었는데 천검십팔영의 수장 화백이다.
그는 검을 등에 매단 채 미동도 하지 않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천검십팔영은 사방에 흩어져 요충지를 경계하는 중이었고 오직 그만이 천막으로 들어와 있었다.
마검을 잡기 위해 천검십팔영은 윤환의 휘하에 배속되어 상무대와 함께 옹안(甕安)으로 들어가는 무호계를 장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먼 곳을 바라본 채 섭선만 휘젓던 윤환의 입이 열린 것은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릿결을 휘날리게 만들 때였다.
“이봐, 화백.”
“예, 대주.”
“비령과 사영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무송과 병천에 병력을 깔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오륜께서 이끄는 진천당은 송계에 배치되었고 칠현께서 이끄는 무현당은 파둔을 차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삼로만 남았군.”
“아무래도 그분들은 조금 늦으실 것 같습니다. 가장 후미를 차단하고 계셨기 때문에 전력으로 오신다 해도 한 시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할 수 없지. 늙은 나이에 고생 좀 하겠어. 놈들은 아직도 그 자리인가?”
“충분히 쉴 생각인 모양입니다. 강한 무력을 가졌다 해서 긴장을 했는데 하는 짓을 보니 애송이들이군요.”
“어린놈들이 오죽하겠나. 뭐, 원래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 어린놈이 여우처럼 행동하면 그것처럼 보기 싫은 것도 없는 거야.”
“하긴 그렇기도 하지요.”
고개를 끄덕여 대꾸를 하면서도 화백의 얼굴에는 전혀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가 웃는 것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예상이 들 만큼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윤환은 달랐다.
검상이 가로지른 그의 얼굴은 입을 열면서부터 푸근한 웃음이 담겨 있었는데 전혀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웃음은 습관이 되어 있어야만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놈들이 혈객과 삼필사를 무력화시켰다. 어린놈들이 독을 가진 모양이니 방심해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삼로에게 전서구를 날려 이쪽으로 오라고 해. 분명 놈들은 이쪽으로 온다.”
윤환의 말에 화백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가 슬그머니 가라앉혔다. 윤환은 삼로를 어디 산기슭 헤매는 승냥이처럼 부르고 있었으나 막상 그들이 나타나면 윤환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삼로의 정식 이름은 천검삼로다.
화검제가 한참 귀주에서 세력을 넓혀갈 때 그의 옆에서 든든히 좌우를 받쳐준 친우들로 그 당시 그들의 패력은 적들에게 사신으로 통했을 정도였다.
지금은 호법전에서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나 천검회에서 그들을 면전에 두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군다나 그들이 펼치는 환사진은 무림일절로 알려질 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닌 절기였다.
따라서 그들이 나타나면 천하의 윤환이라도 고개를 조아리며 등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윤환은 눈앞에만 없으면 그들을 함부로 불렀다.
아마 그리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화백의 머리는 맹렬하게 돌아갔다.
윤환에 비해 모자람이 있지만 그 역시 천검십팔영의 수장으로 함부로 대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천검십팔영이 모두 움직이면 윤환 정도 되는 고수가 최소한 셋은 모여야 상대가 가능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물론 다른 자들은 윤환이 화검제의 적전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높은 평가를 하고 있으나 그는 내심 그런 평가를 믿지 않았다.
천검십팔영은 백대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부대로 제대로 된 합격진이 펼쳐지면 윤환 정도는 언제든 도륙할 수 있다.
그만큼 천검십팔영은 천검회의 핵심 전력이었다.
지금도 그는 윤환을 도와주기 위해서 왔을 뿐이지 수하로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스스로 판단하고 잘잘못을 가릴 필요가 있었다.
만약 윤환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언제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게 그의 위치였다.
하지만 윤환의 판단은 정확했고 빨랐다.
그의 판단대로 마검 일행은 이곳 무호계로 올 가능성이 칠 할 이상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작지만 명확한 음성으로 알겠다는 말을 했는데 윤환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에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화백의 마음을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명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 담긴 웃음이었다.
윤환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으나 그의 심계만은 겪을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음성은 외모와는 다르게 부드러워 마치 연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총사는 이번이 마검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하셨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반드시 마검을 잡는다. 화백,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조금만 더 참아. 일 끝나면 내가 술 한 잔 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