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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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6화
살육의 현장은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미처 치우지 못한 시신들은 방치된 채 썩어갔다.
사천은 지옥이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욕심과 분노란 괴물 앞에서 이슬처럼 사라지고 있었으니 진정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청당전은 벌써 아홉 개의 문파가 참전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한 지역을 장악하는 패주들이며 강자들이었고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문파들이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천은 온통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였다.
피가 피를 불렀고 전쟁은 사천을 넘어 섬서까지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운호 일행은 청성으로 향하며 도처에 방치된 전쟁의 잔재를 확인한 후 점점 무거워져 가는 마음을 멈추지 못했다.
사천이 이런 지경이니 강남에서 벌어지는 혈검쟁투는 오죽할까.
사천은 아홉 개의 거대 문파가 참여했으나 혈검쟁투는 그보다 훨씬 많은 열세 개의 문파가 집단전을 벌이고 있었다.
청성으로 다가갈수록, 그리고 시신들이 더욱 많이 보일수록 그녀에 대한 걱정이 점점 커져 갔다.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그녀가 무사할 거란 확신을 하기엔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공동파와 황보세가의 접전이 벌어지는 망산을 지나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거의 오십에 달하는 양측의 무인들은 망산의 전역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며 피를 흘렸는데, 그 모습이 악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청당전에 참전한 것은 공식적으로 아홉 개 거대 문파였지만 실질적으로 파고들어 가면 무려 사십삼 개의 문파에 이를 정도의 엄청난 규모였다.
지역의 패주란 자리는 은연중 주변 문파의 수장 역할을 하게 마련이고 패주의 전쟁은 그들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쟁의 불씨가 옮겨 붙는다.
미산(眉山)까지 오는 동안 운호 일행은 거의 이십여 차례에 달하는 전투를 확인했다.
미산은 사천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였으니 아직도 청성산까지는 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전쟁은 피를 먹는 괴물답게 수많은 피를 대지에 젖게 만들고 있었다.
이긴 자도, 진 자도 절대 웃을 수 없는 전쟁의 참화가 징그럽게 머릿속을 헤집으며 운호 일행의 발길을 무겁게 만들었다.
미산에서 잠시 멈춰 휴식을 취한 일행은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비한 후 곧바로 청성산을 향해 출발했다.
시간이 없었다.
천(天)의 근거지인 천왕산의 위치를 최대한 빨리 알아내는 길만이 지옥 같은 이 전쟁을 하루라도 일찍 끝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첫 번째 목적지로 삼은 천왕산은 청성에서도 오백 리를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삼각형을 이루며 형성된 금천(金川), 흑수(黑水), 송반(松潘)은 모두 천왕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도시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예상과 예측에서 가장 좋은 입지에 위치한 후보지가 바로 사천의 천왕산이었다.
막사검만 전해주고 곧장 천왕산으로 간다는 것이 운호 일행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운상과 운여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서 어떻게 금방 길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사람은 정한 길이 있어도 상황에 따라 조금은 돌아가고 쉬어가기도 하는데, 그것이 마음이 시켜 그렇게 한 거라면 분명 후회를 하더라도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걸 또다시 확인하게 된 것은 쌍류(雙流)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쌍류는 백마강의 줄기가 문호산에서 두 개로 갈라져 흘렀다가 다시 합해지는 곳에 위치한 넓은 평야 지대를 말한다.
운호 일행은 집단전이 벌어지는 평야를 바라보다가 억눌린 한숨을 무겁게 흘려냈다.
지금까지 벌어진 어떤 전투보다 험악했고 치열했다.
그러나 운호 일행의 입에서 신음 소리를 만들어낸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청성과 당문.
쌍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청당전의 핵심 세력인 청성과 당문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운호 일행은 멀찍이 떨어져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타 문파의 집단전에 참견한다는 것은 자칫 점창을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게 된다.
그랬기에 지금까지는 그저 잠시 지켜보다 자리를 피하곤 했다.
본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수많은 목숨을 끊으며 손에 피를 묻혀왔으나 한 번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면서 희열을 느낀 적은 없었다.
죽어간 자에 대한 연민을 느꼈고 생명을 죽인 검을 바라보며 언제나 회한에 젖어왔으니 전쟁을 흥미로 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번 전투에는 시선이 갔다.
두 문파가 워낙 그에게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전투의 치열함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지독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능선에 올라 전투를 지켜보던 운호의 안색이 하얗게 변한 것은 운상과 운여가 싸움의 양상을 분석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전투 외곽에서 분전하고 있는 여인은 그가 꿈속에서조차 그리워하던 한설아가 분명했다.
피에 젖은 모습.
어디를 다쳤는지 조금은 불편해 보였음에도 그녀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당문 무인들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운호의 몸이 경직되자 운상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공이 삼화취정에 오른 그는 공기의 파장이 조금만 변해도 금방 알아차릴 만큼 극한의 경지까지 오른 상태였다.
“운호, 왜 그러냐?”
“저기, 설아가 있다.”
“뭐라고!”
운호의 손짓에 운상과 운여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그런 후 금방 한설아를 확인하고 몸을 경직시켰다.
상황이 좋지 않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분전하고 있지만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전투의 양상은 팽팽했지만 점점 당문 쪽으로 승기가 기울어지고 있었으니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언제 어느 때 불행한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운호, 어쩔래?”
“어쩌긴. 가서 구해야지.”
“…음, 그래, 가자.”
“아니, 너희들은 여기 있어. 나 혼자 갈 테니까.”
무슨 소린지 금방 알아들었다.
운여와 운상이 가볍게 한숨을 몰아쉰 것은 그들이 참전하면 청당전에 점창이 발을 들여놓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걸 운호는 금방 눈치챈 모양이었다.
운상과 운여가 걸어가는 운호를 바짝 따라붙은 것은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너는 점창 제자 아니냐? 하나가 가든 셋이 가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같이 가자.”
운호 일행은 소하령을 언덕에서 기다리게 만든 후 곧장 평야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능선에서 한설아가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집단전이 벌어지는 종심을 뚫고 가는 것이 지름길이었으나 그리되면 싸움을 피할 방법이 없다.
검에는 눈이 없었고 적을 죽이기 위해 이성을 상실한 전쟁터에서는 아군이 아니면 모두 적이기 때문이다.
크게 원을 돌아 빠져나가면 가급적 싸움에서 벗어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판단은 금방 바뀔 수밖에 없었다.
한설아가 있던 외곽이 전장이 이동하면서 오히려 중심으로 변했던 것이다.
뒤로 돌았던 운호의 얼굴색이 슬며시 변했다.
가급적 그녀만 빼오고 싶었지만 이리된 이상 그냥 쉽게 넘어가기는 틀린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는 옆에 선 운상과 운여를 향해 고갯짓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한 후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어차피 은밀하게 그녀를 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백에 달하는 무인들의 숲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림자처럼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한설아가 그들을 따라 도주할 거란 확신도 할 수 없었다.
이리된 이상 싸움을 멈출 생각이다.
그녀의 목숨만 안전하게 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좋다는 게 운호의 생각이었다.
청성이든 당문이든 가리지 않고 운호 일행은 폭풍처럼 그녀가 있는 중앙을 향해 달려 나갔다.
수많은 무인들이 검과 암기를 날려왔으나 그들은 검과 몸통을 한꺼번에 튕겨내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히 폭풍과 같은 진격이다.
대적불가의 무력으로 전장의 축을 관통하는 그들의 모습은 전신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한설아의 모습을 확인한 운호의 눈이 급격하게 변했다.
그녀는 다섯 명의 청성 무인들과 함께 있었는데, 복면을 한 당문 무인들의 협공을 받는 중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았다.
그녀의 몸은 피로 물들었고 검을 든 손과 왼발은 어떤 병기에 당했는지 찢어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운호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그녀를 향해 날아가는 비접을 단숨에 잘라냈고 뒤이어 전장에 뛰어든 운상과 운여가 허공에 난무하는 창과 암기들을 한꺼번에 박살 내버렸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
양쪽으로 대치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무인들이 운호 일행의 출현으로 순식간에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지닌 무력으로 봤을 때 이곳에 몰려 있는 무인들은 청성과 당문의 수뇌부다.
그것은 무인들의 반응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중앙의 싸움이 멈추자 마치 잔물결이 퍼져 나가 멈추는 것처럼 외곽의 싸움마저 금방 정지되었다.
누가 먼저 봤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동시에 서로를 확인했다.
운호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한설아의 얼굴은 놀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놀람은 금방 반가움과 기쁨으로 변했고 곧이어 안심으로 바뀌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 전장이었다.
적의 암기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고 계속 밀리다 보니 죽음마저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 운호.
이렇게 죽는다면 그가 무척 슬퍼하겠지.
보고 싶었다.
죽는다 해도 사랑하는 그 사람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적들의 무서운 공격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마치 거짓말처럼 나타난 님은 언제나 보고 싶었던 은은한 웃음을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설아야, 잘 있었지?”
“여긴…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보고 싶어서. 전해줄 것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안아주고 싶었지만 양측의 무인들은 아직도 거친 숨을 몰아쉰 채 적들을 향해 강한 적의를 나타내는 중이었다.
전쟁터에 나타난 이방인.
불리한 싸움을 벌이던 청성 무인들은 운호 일행의 출현으로 싸움이 멈춰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고 있었다.
나타난 자들은 셋에 불과했으나 전장을 가로지른 그들의 막강한 신위는 일당백을 넘어서는 전신의 신위를 보여주었고 더군다나 문주의 딸인 한설아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며 아군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운호가 한설아와의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자 예전 성도에서 보았던 만수자와 광검 백건, 호풍검 유혁을 비롯해서 안면 있는 무인들이 여럿 보였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눈인사를 해왔는데 운호는 그들의 인사를 모른 체하며 당문 무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차피 정황상 지금은 청성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설아가 여기 있으니 그녀의 죽음을 모른 체하지 않는 이상 운호 일행은 청성을 도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운호는 이 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인 운상과 운여의 생각처럼 그 역시 사문인 점창이 자신 때문에 난처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돌아섰다.
당문의 무인들을 설득해서 이 싸움을 끝내고자.
그러나 그는 몸을 돌린 순간 얼어붙어 버린 석상처럼 몸을 멈추고 말았다.
아…!
눈앞으로 다가온 여인.
나비 가면을 쓴 그녀. 당운영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