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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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4화
우중충했던 날씨는 기어코 바람이 거세지더니 시꺼먼 구름을 몰고 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아름답게 펼쳐졌던 수호의 갈대밭은 바람에 흔들려 좌우로 휘날렸고 그 속에 서 있는 무인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수호 속으로 잠겨들었다.
운호는 흑룡검을 빼 들고 조용히 서서 혈염공의 반검, 명혈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이미 운상과 운여는 진무칠절진 속으로 들어가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이동해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십오천강의 일인, 혈염공.
두 자루 반검으로 천하 무력 서열 삼십 위에 오른 절대 강자. 이미 운호의 손에 죽음을 당한 십오천강의 마창보다 오히려 더 강한 것으로 알려진 무인이다.
반검이 뜨면 달이 솟고 검은 달의 그림자에 숨어 적의 목을 자른다.
수대 전부터 무림일절로 명명된 월영검법의 소유자이며 살막을 이끌고 한 세대를 풍미한 열혈의 사내.
비록 살귀들을 이끌며 청부 살인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무림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했으나 살막에서의 그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운호는 침잠된 눈으로 혈염공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선공과 반공의 차이는 이제 그에겐 의미가 없지만 혈염공의 월영검법이 은밀하고 독날(毒辣) 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니 반공을 택하는 것이 조금 더 유리하단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무력이 무섭게 진화되어 마창과 상대할 때보다 훨씬 강해졌으나 그럼에도 혈염공을 상대한다는 건 엄청난 부담이다.
절대고수들의 대결은 언제 어느 때 상황이 변할지 알 수 없었고 사소한 실수 하나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오히려 당할 가능성이 컸다.
운호가 기다리자 혈염공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양손에 하나씩 쥐어진 반검이 기묘하게 꺾이며 그의 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네가 나마저 꺾는다면 아마 천하인들은 너를 무천의 반열에 올려놓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것에 의미를 두지 않소이다.”
“명예를 원하지 않느냐?”
“명예는 원하오. 하나 허명을 바라는 건 아니오.”
“그건 무슨 뜻이냐?”
“십제를 꺾지 못한 무천의 지위는 허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오.”
“크큭… 큭큭큭. 역시 마검이로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새어 나오던 혈염공의 웃음이 점점 커지더니 통쾌하게 변하며 수호의 갈대밭을 휩쓸었다.
운호의 말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직접 십제를 꺾겠다는 웅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내공이 담긴 그의 웃음은 진정한 즐거움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십제(十帝)를 꺾는다.
지금 마검의 나이대에서 그 누가 십제를 꺾겠다는 투지를 나타낸단 말인가.
그의 웃음은 크고 강렬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검, 너의 웅지가 진정 마음에 든다. 만약 여기서 나를 꺾는다면 경로를 육하로 잡아서 빠져나가라.”
“왜 그렇게 해야 하오?”
“놈들이 너의 위치를 물어오기에 산하에서 마지막 대결을 한다고 알려줬다. 아마 지금쯤 놈들은 너희들을 잡기 위해 산하 일대에 천라지망을 깔고 있을 것이다. 네가 강한 것은 알지만 놈들의 힘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무섭기 때문에 지금은 피하는 게 현명하다. 내가 비록 살막을 이끌며 청부로 살아왔으나 무림이 도탄에 빠지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
혈염공의 말을 들은 운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눈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하라면 이곳에서 서쪽으로 오십 리 떨어진 지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하를 댔다는 것은 의뢰인에게 살막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은폐하기 어려웠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과연 살막은 돈 때문에 이런 의뢰를 받게 된 것일까?
아무리 돈이 중요하더라도 살막 전체를 움직여야 될 정도라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야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혈염공은 살귀들을 자식같이 아끼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림이 도탄에 빠지는 걸 바라지 않는 청부 살수의 수장 혈염공.
과연 그는 악인인가, 선인인가.
복잡해진 머리가 그의 눈에 담긴 진실을 확인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유라도 명확히 알고 싶었으나 그는 자신의 질문에 입을 꾹 닫고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사라졌던 반검은 혈염공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황색의 검기가 만들어낸 반월이 허공을 수놓으며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뚫고 운호를 향해 날아갔다.
한둘이 아니라 수십 개가 넘는 반월은 한 치의 빈틈도 허용치 않고 빽빽하게 공간을 채운 채 운호를 향해 쇄도해 왔다.
피하기엔 늦었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느리게 움직이며 흑룡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진정한 강함은 빠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사일검법의 최후 초식 후예사일을 연마하면서 점점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후예사일을 연마할수록 분광과 회풍에 대한 해석도 기존에 지녔던 것과 달라져 갔는데, 그가 지닌 천룡무상심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운상과 운여는 현천기공을 익혔기 때문에 극에 달한 분광과 회풍이 쾌, 중, 속의 원리 속에서 움직였지만 운호는 달랐다.
검에는 길이 있고 무인에 따라 그 길의 극에 달하는 방법이 제각각 다른데, 운호가 추구하는 것은 심검이었다.
마음으로 움직이는 검.
만천자가 일검으로 태양을 베었다는 사실은 분명 환상이었을 것이다.
어찌 인간의 힘으로 태양을 벨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만천자의 심검이 사람들의 눈을 놀라움에 젖게 만들면서 태양이 잘라진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경이롭다.
태양을 벨 정도의 심검이라면 어떤 무인이 상대할 수 있을까.
만천자가 고금제일무인으로 칭송받은 것은 당대를 휩쓸었던 비천혈사를 후예사일이라는 천고의 검으로 중단했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심검 경지의 위력. 그것은 바로 고금제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운호의 검에서 흘러나온 빛의 물결이 셀 수 없이 날아오던 반월들을 하나씩 격파하고 허공에 떠 있던 혈염공을 향해 날아갔다.
혈염공의 반검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채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것은 그때부터였다.
충돌이 생길 때마다 바위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있었던 싸움과는 다르고, 지금 한쪽에서 연속으로 화탄 터지는 소리를 생성시키는 운상과 운여의 싸움과도 달랐다.
퍼석퍼석!
소리는 작았으나 여운은 강했고 파생되어 흩어지는 기세는 파편이 되어 갈대밭을 휩쓸었다.
공간이 응축되면서 사방이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진무칠절진의 집단전은 운호와 혈염공이 뿜어낸 기세와 충돌하며 점점 거리를 이격시켜 나갔는데, 그쪽의 공간이 움직일 때마다 모든 생물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무서운 접전.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의 싸움.
혈염공과 백귀들이 살막 전력의 오 할이 넘는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만큼 팽팽한 접전이다.
운호는 분광과 회풍을 쓰면서 간혹 후예사일을 섞어 공격을 감행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실전을 통해 미비점을 보완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혈염공은 수시로 휘청이며 뒤로 물러섰다.
분광과 회풍에 대해서는 곧추세우고 버티던 그의 반검은 후예사일이 펼쳐질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호의 갈대밭처럼 비칠거리며 물러섰던 것이다.
혈염공의 얼굴이 점점 허옇게 변해갔다.
가뜩이나 극에 달한 분광과 회풍을 막아내며 계속되는 손해를 보고 있었는데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는 후예사일의 공격은 그의 심신을 조금씩 갉아먹어 한 시진이 지나자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일 장이나 뒤로 훌쩍 물러선 혈염공이 반검을 내린 채 헐떡거리는 숨을 참으며 운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틀어놓았던 상투가 잘리면서 머리가 산발되었기 때문에 마치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이리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헉헉, 그게 무엇이냐?”
“뭘 말이오?”
“중간중간에 나를 공격한 그게 뭐냔 말이다!”
“사일검법의 최후 초식이오. 이름은 후예사일이라 부르오.”
“헉헉, 커억!”
운호의 대답을 들은 혈염공이 급격하게 호흡을 멈추더니 왈칵 피를 토해냈다.
아마도 그는 심각한 내상을 입은 채 싸움을 계속했던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피를 토해낸 그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양손에 든 반검을 추슬렀다.
그의 눈은 운상과 운여에게 죽어간 백귀들을 향하고 있었는데 아련하게 젖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얼마나 굉렬한 격전을 벌였는지 운상과 운여의 몸에도 피가 뚝뚝 떨어져 혈인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굳건하게 서 있는 그들의 몸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손을 들어 피 묻은 입술을 닦아낸 혈염공의 젖은 눈이 운호를 향했다.
“역시 생각대로 안 되는군. 하나라면 충분히 해볼 만했을 텐데 둘이다 보니 부족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어차피 안 되는 거였어. 이보게, 마검.”
“말하시오.”
“내가 비록 살수로 살아왔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살막을 이끌지는 않았다. 물론 청부가 잘한 짓이란 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없는 자들을 도왔고 살막의 식구들을 먹여 살렸으니 그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약속은 했으나 나는 두렵다. 청귀들에게 살막을 해체하라고 부탁했지만 어쩌면 놈들에게 납치되었던 아들놈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헉헉, 마검… 하나만 부탁을 하자. 만약 세상에 살막이란 말이 흘러나오고 그들을 제거해야 된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내 아들만 죽여다오. 아들놈 때문에 아까운 목숨들이 서른이 넘게 죽어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귀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마검, 내 아들만 죽이면 나머지는 세상에 흩어져 살아갈 테니 그리해 주게. 그리만 해주면 내 원이 없겠네.”
“그렇게 하리다.”
“고맙군. 사내로 태어나 명성을 얻었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한평생 같이 살았으니 뭐가 아쉬울까. 헉헉, 커억! 자, 이제 끝내지. 이왕 죽는 거 나를 이렇게 만든 걸로 보내주게. 그런 검법에 죽는다면 저승에 가서도 큰소리칠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이거였나.
아들 때문에 의뢰를 받았고 아들 때문에 사랑하는 살귀들을 저세상으로 보냈다는 말이다.
혈염공의 아쉬움과 후회가 스며들듯 가슴으로 들어왔다.
마창도 손자로 인해 그들의 주구가 되었다고 했는데, 혈염공마저 혈육으로 인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불쌍하고 또 불쌍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자 전투에서 생성되었던 살기가 자신도 모르게 수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살기가 사라지자 반검에 당한 가슴과 팔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혈염공이 공격을 멈춘다면 여기서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혈염공의 눈은 아련함에서 벗어나 또다시 전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혈인으로 변한 그가 허공을 향해 날아오른 것은 운호가 그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는 걸 확인했을 때였다.
“괜찮냐?”
“안 괜찮아. 엄청 아파.”
“엄살떨지 마. 저번에 비하면 그건 부상도 아닌데 뭘 그래.”
“건드리지 마. 아프다니까!”
운호가 상처 입은 부위를 슬쩍 때리자 운상이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전투를 할 때는 왕성하게 피가 돌아 고통을 모르게 만들지만 운혈이 가라앉으면 상처는 본격적인 고통을 신체에 전달하게 되는데, 지금이 꼭 그런 시점이었기 때문에 운상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소하령이 붕대를 들고 다가오다가 운상이 고통에 겨운 소리를 지르자 운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세상에, 아픈 사람을 때리는 게 어디 있어요!”
“내가 뭘 때렸다고. 그냥 만진 거야.”
“운상 오라버니가 그냥 만졌는데 저렇게 아파해요?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허어, 정말 이게 뭔 일이야. 너무 일방적으로 편드는 거 아니냐?”
“흥, 오라버니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거죠.”
“알았다. 알았어. 얼른 가서 치료나 해줘. 금방 떠나야 되니까.”
“왜요?”
“너희들은 못 들었겠지만 놈들이 산하를 중심으로 천라지망을 펼쳤다고 한다. 아마 지금쯤 혈염공이 속였다는 걸 알게 되었을 테니 이쪽으로 오고 있을지 몰라. 놈들과 부딪치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떠나야 해.”
“그럼 어디로 가요?”
“우린 육하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