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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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3화
운호의 사자후는 대답을 듣기 위해 지른 것이 아니었다.
공허한 메아리.
아무런 대꾸가 없으니 운호의 사자후는 하릴없는 외침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운호 일행은 안다.
저쪽 어딘가에 그들을 기다리는 살막의 주력들이 있다는 것을.
삐익… 삐익.
예전에 경험했던 살막의 비령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자 강에서 붉은 눈으로 운호 일행을 지켜보던 청귀들의 신형이 물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놓쳐 버린 물고기를 아쉬워하듯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짓말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산 쪽에서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온 것은 운호 일행이 길을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크크크. 수호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거기서 기다리겠다!”
수호는 지명과 어울리지 않는 갈대숲이었다.
사방 일 리에 달할 정도로 빽빽하게 자라난 갈대는 마치 바다처럼 장관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고 중간을 가로지르는 개천이 수호를 반으로 자른 채 선이 되어 횡단했다.
꿈결처럼 아름다운 곳.
갈대가 안개로 변해 사람들의 마음을 선계로 이끄는 정경은 수호가 과연 인간세계에 있는 곳이 맞을까란 의심마저 갖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운호와 일행이 수호에 도착한 것은 오시경이었다.
형탄강에서 지체 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수호까지는 불과 반시진이 걸렸을 뿐이니 아직 점심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수호에 도착한 그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압도적인 자연의 광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운상이었는데 그는 수호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터뜨리던 소하령의 손가락질로 인해 한참 동안 사방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운호를 바라봤다.
“환장하겠군, 운호!”
“응?”
“왜 하필 여기지. 이런 지형이면 우리가 너무 불리한 거 아냐?”
“그래서 이곳으로 정한 거다. 놈들이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해야 올 것 아니냐. 어차피 막사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살막과 끝장을 봐야 해결이 돼. 우리는 시간이 없다. 살막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으니까 이곳에서 끝장을 보자.”
“맞는 말인데 놈들이 정말 올까?”
“벌써 와 있을 거야. 무림을 공포로 만들어놓은 진무칠절진(眞武七絶陳)을 펼쳐야 될 테니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음… 진무칠절진이라. 또 피 보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운호의 설명에 운여를 비롯한 일행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살막에는 절대고수를 척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극강의 진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진무칠절진이었다.
일곱 개의 병기와 일곱 명의 초절정고수, 그리고 마흔아홉 번의 변공.
잠시도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진무칠절진으로 살막은 전대의 백대고수를 둘이나 척살했다고 알려졌으니 얼마나 강한 위력을 지녔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그런 막강한 진법을 가지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암습을 펼친 것은 그것이 살막이 지닌 최후의 패였기 때문이었다.
혈염공과 일곱 명의 백귀로 구성된 진무칠절진은 도저히 상대가 어려운 절대고수들을 잡아내기 위한 마지막 승부수였다.
문제는 과연 살막이 그렇게까지 하느냐였다.
살막을 천하인들이 삼십팔세 중의 하나로 꼽은 이유는 지닌 고수들의 무력이 일반 방파의 당주급에 버금갈 만큼 고강한 것도 있었지만 신출귀몰한 그들의 살인 능력에 기인한 것이 더욱 컸다.
전면전으로 붙는다면 살막은 삼십팔세 중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지만 암습이라면 충분히 승부를 볼 수 있을 만큼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그런 살귀들이 운호와 일행들에게 서른 명이나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으니 살막은 삼 할에 달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이제 남은 선택은 하나.
막사검을 위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무력을 선보이는 운호 일행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것과 깨끗이 의뢰인의 청부를 포기하고 물러서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살막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둘 중 어느 경우라도 살막은 더 이상 강호에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를 잃어버린 청부사는 목숨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죽은 것과 다름없으니 어찌 더 이상 살막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혈염공의 성격 때문이었다.
살수 집단인 살막이 이렇게까지 무림의 공포로 자리 잡은 것은 친자식처럼 살귀들을 아끼는 혈염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운호 일행의 무력으로 봤을 때 갈대밭인 수호는 더 이상 암습의 장소가 될 수 없었다.
그 말은 전면전과 다름없는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쩌면 이곳에서 살막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틀렸다.
설마 하는 바람은 여지없이 어긋났고 운호 일행의 귀에선 찬바람이 돌았다.
수호의 아름다움은 압도적이었으나 날씨마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대낮인데도 태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을씨년스러웠으니 삭풍의 바람 소리와 함께 들려온 기괴한 소음은 일행의 얼굴을 저절로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어미 잃은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구슬펐고 유부에서 들려오는 원한 맺힌 귀곡성처럼 섬뜩하기도 한 소리였다.
하지만 점창의 전검들이 그런 소음에 위축될 리 있겠는가.
소하령이 본능적으로 운상의 뒤로 돌아갈 때 운호의 얼굴에서 서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혈염공, 왔으면 나서시오. 그런 장난은 그대와 어울리지 않소.”
갈대밭을 바라보며 운호가 말을 꺼냈어도 섬뜩한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소음은 마치 운호 일행을 압박하듯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했는데 그때마다 갈대숲이 심하게 흔들렸다.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춘 것은 슬쩍 인상을 긁은 운호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전면을 향해 칠 검을 터뜨린 후였다.
콰앙!
고막을 찢어버릴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오 장에 가까운 갈대숲이 운호의 단 일격에 초토화되었다.
그냥 벤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토록 신경을 거슬리던 소음이 멈추고 송두리째 날아간 갈대밭 맞은편에서 혈염공이 나타나 천천히 걸어온 것은 뿌리째 날아간 갈대의 잔해들이 안개가 되어 떨어질 때였다.
그의 얼굴은 침중함으로 굳어져 있었는데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경이, 충격, 공포.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확인해서 받는 충격은 그 강도가 훨씬 더 하다.
가면처럼 굳어진 혈염공의 굳은 얼굴은 운호가 보여준 일검의 위력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전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점창의 검이 맞느냐?”
“점창 사람이 쓰는 것은 오직 점창의 검뿐이오.”
“예전 칠절문이 패한 것은 점창에 밀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마 그것이 밀검인 모양이로구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점창이 어찌 갑작스럽게 밀검을 만들어낼 수 있겠소. 이 검은 사일검이오.”
“사일검이라… 정말이냐?”
“그렇소.”
“나는 사일검에 그런 위력이 담겼다는 걸 처음 듣는다.”
“믿지 않아도 할 수 없지. 그나저나 점창의 무원을 알아내기 위해 나타난 것은 아닐 테고. 이제 어쩔 생각이오?”
“뭘 말인가?”
“당신 눈으로 봤듯이 우리는 쉽게 당할 사람들이 아니오. 그래도 계속하시겠소?”
“크크크… 재밌군. 역시 재밌어.”
눈을 들어 똑바로 시선을 부딪쳐 오는 운호를 바라보며 혈염공이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감정과 갈등의 흔적들이 수없이 담겨져 있었다.
“세상이 점창을 잘못 알고 있으니 앞으로의 무림은 정말 재밌을 것 같구나. 너희 같은 자들을 키워낸 점창의 힘이 진정 무섭다. 하지만 나는 그냥 돌아갈 수 없구나.”
“왜 그렇소?”
“살막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가 파는 것은 신의이기 때문이다.”
“누구한테?”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으나 짐작은 할 수 있었지. 국면을 조정하는 자. 판을 깔고 바둑을 두는 자들은 언제나 은밀한 것을 좋아하지만 냄새마저 숨기지는 못한다. 놈들에게 흐르는 냄새는 우리 것보다 훨씬 지독했고 잔인한 것이었다.”
“청부에 대한 신의 때문이란 말이군.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다니 웃긴 일이오. 사람의 대부분이 돈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하나 돈은 죽으면 아무짝에도 쓰지 못한다는 걸 사람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알더구려.”
“그것도 있지만 이제는 그에 못지않은 이유가 생겼다.”
“그건 또 뭐요?”
“죽어간 놈들에 대한 복수. 이대로 물러난다면 그놈들이 슬퍼할 테니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나.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도 생각했다. 비록 마검의 무력이 백대고수들을 박살 낼 정도로 대단하다고 해도 마검 하나에 불과하다면 살막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런 고수들이 둘이나 더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정보도 엉망이었고 작전도 엉성해서 생때같은 목숨이 서른이나 죽어갔다. 모두 자식같이 기른 놈들이었지. 그 모든 것이 내 잘못에서 기인된 일이었으니… 어떤가? 너 같으면 그냥 돌아갈 수 있겠느냐?”
“그런 이유라면 안 되겠구려. 그래, 얼마나 왔소?”
“나를 포함해서 여덟.”
“진무칠절진을 쓰고 싶었던 모양이구려.”
“쉽지 않은 승부겠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도 없다. 비록 살귀로 살아왔지만 무림에 빛나는 수많은 별 중 하나로 올라섰으니 미련도 많지 않다. 귀신으로 살아왔어도 내 검은 강하다. 그러니 너는 추호도 자신하지 말라.”
혈염공의 옆구리에서 두 자루 반검이 떠오른 것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병이 특이하게 생긴 반검은 검신이 보통 검의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끝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혈염공의 독문무기 문혈이 떠오르자 그의 뒤쪽 일 장 너머에 일곱 명의 중년인이 귀신처럼 솟아올랐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는 허공으로의 부유.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도 사람인 이상 공중에 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진대 어쩐 일인지 그들은 허공에 뜬 채 혈염공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혈이 서서히 가라앉아 혈염공의 양손으로 들어오자 그동안 잠자코 있던 운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혈염공, 내 말을 마저 들은 후 그 검을 뽑으시오.”
“뭐냐.”
“살막 백 명의 살귀 중 우리가 죽인 것은 삼십이었으니 칠십이 남았구려.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을 포함해서 여덟. 아직도 살막에는 육십이 명이 남았단 얘기지.”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냐?”
“나는… 점창을 말하는 것이오. 당신은 살막의 신의와 부하들에 대한 애정을 말했지만 나는 이제 점창을 말하려 하오. 점창은 건드린 자에 대한 복수는 확실히 하는 검귀들의 집단이오. 살막은 돈을 받고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세상에 해악을 끼친 것들이 제대로 노출되지 않아 탕마록에는 올라 있지 않았지만 결코 좋지 않은 집단이란 건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소.”
“그래서?”
“알고서나 가시오. 당신이 죽더라도 살막은 세상에 살아남지 못하오. 점창이 반드시 없앨 테니까 말이오.”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살막은 이제 세상에 없다.”
“정말이오?”
“머리가 잘린 생명은 살지 못하는 법 아니겠느냐.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면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잘하셨구려.”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남은 자들에 대한 처리를 물었더니 혈염공은 지체 없이 살막을 세상에서 지웠다는 대답을 해왔다.
살막을 지웠다면 어찌 되었든 원과 한은 여기서 접을 수 있다.
운호가 흑룡검을 꺼낸 것은 혈염공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듯 문혈을 허리춤으로 끌어내렸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