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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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0화
객잔을 나온 일행은 천천히 저잣거리를 거닐다가 운호의 입을 바라봤다.
미리 운호가 행동 지침을 주겠다는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설명을 기다리는 모두의 시선을 운호는 손을 들어 단박에 차단하고 한마디만 한 후 급히 몸을 날렸다.
“따라와!”
거리에서 건물 쪽으로 빠져나간 운호의 신형이 담장을 향해 솟구친 후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건물들은 빽빽하게 이어져 지어졌기 때문에 운호 일행이 신법을 펼쳐 날아가자 평지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과 같았고 새처럼 움직였다.
얼마나 빠르고 기민했던지 사방에서 감시하던 자들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 빠르기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막의 고수들은 운호 일행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전속력으로 신법을 펼쳐 이동하자 포위한 채 따르던 자들이 뒤로 처졌다.
그렇다고 살막의 추적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살막의 구성원은 하나같이 초절정고수들이었고 운호 일행을 잡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상태였기 때문에 중첩의 포위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하나가 뚫리자 또 다른 자들이 운호 일행을 따랐다.
처음에는 쉽게 뚫렸으나 시간이 지나자 살막의 고수들은 교묘하고 끈질기게 그림자처럼 운호 일행을 따라왔다.
도주를 하기 위해 신법을 펼쳐 이동한 것이 아니라는 건 금방 확인되었다.
운호는 눈앞에 커다란 규모의 객잔이 나타나자 즉각 지붕에서 내려와 객잔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후 점소이가 나르던 음식을 가로채서 빈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점소이는 요리가 잔뜩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쟁반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계속 걷다가 뒤늦게 알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행이 따라 앉자 운호의 시선이 소하령을 향했다.
“하령아, 음식 값하고 이놈 수고비 좀 챙겨줘라.”
“당연히 줘야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냔 표정으로 황당하게 서 있는 점소이를 가리키며 운호가 지시를 하자 단박에 알아챈 소하령이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운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점소이가 얼떨결에 은자를 받은 후 뭐라 중얼거리며 산대로 걸어갈 때였다.
“너희들은 먹고 있어. 그동안 덤비는 놈들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쐐액!
운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우뚱거리며 옆을 지나치던 임산부의 배에서 일행을 향해 강침이 쏟아져 나왔다.
임산부는 만삭으로 보였고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일 정도였는데 막상 공격을 시작하자 그 몸놀림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빠른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강침이 쏟아져 나오자 어느샌가 빠져나온 운호의 검이 원을 그렸다.
원은 단 하나에 불과했지만 배 속에 숨겨 있던 무지막지한 위력의 강침들을 순식간에 회전 속으로 가둬 버렸다.
이화접목.
강을 유로 가두어 버리는 천고의 기예가 틀림없었다.
만삭의 여인은 공격이 실패하자 뒤로 훌쩍 물러섰다가 미련 없이 객잔을 빠져나갔다.
대신 곧이어 공격을 시작한 것은 두 명의 꼽추 노인이었다.
그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운호의 싸움이 끝나는 걸 확인하고 운상과 운여가 젓가락을 들 때였다.
밥을 먹지 못하게 만들려는 듯 그들의 공격은 음식에 집중되어 있었다.
살귀들의 목표가 겨우 음식이라니 한심한 일이었지만 운상은 즉각 음식을 보호하며 옆으로 신형을 이동시켰고 대신 운여가 그들의 검을 가로막았다.
“내 밥그릇에 손대면 죽인다.”
음식을 노린 공격이었기 때문에 검에 살기를 담지 않았다.
그럼에도 꼽추 노인들은 운여의 공격에 일 장이나 튕겨 나가 뻗어버렸다.
살기를 품었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시선이다.
객잔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건 아무리 전검을 익혔다고는 하나 점창의 도사들로서는 부담 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슬쩍 눈을 돌려 보니 운상과 운호가 열심히 젓가락질하는 것이 보였다.
운호, 이놈은 지가 책임진다고 큰소릴 치더니 잠시 틈이 나자마자 퍼질러 앉아서 맛있는 오향장육을 정신없이 먹어대는 중이었다.
왼팔이 없는 삼십 대 장한과 꽃 파는 여인의 협공이 시작된 것은 운여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새파란 검기의 물결.
이건 처음 공격해 왔던 꼽추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력이다.
살막의 살귀들은 그 등급에 따라 무력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고 했는데 여인의 협봉검에서는 새하얀 검기가 물밀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외팔이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절묘한 협공.
태어날 때부터 손을 맞춰왔던지 그들의 협공은 한 사람이 공격하는 것처럼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운여가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선 것은 그들의 공격이 그만큼 대단한 위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험에 처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이었다면 벌써 피를 흘렸을 만큼 막강한 공격이었으나 운여의 검은 진화를 거듭해서 이미 절대의 영역으로 들어서 있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았다.
운여의 검에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람이되 바람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 바로 검풍이다.
처음 공격해 온 꼽추 노인들은 튕겨만 냈지만 지금 공격해 온 자들은 추호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전검을 얻은 후 지금까지 목숨을 노린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자비란 어떤 때는 죽음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멈추었던 검풍에 기세가 담겼다.
이렇게까지 죽이려고 덤빈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사정을 봐주는 건 한계를 넘어섰다.
콰앙!
운여의 검풍에 시린 검기를 뿜어내던 자들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단 일격.
정확하게 심장을 깊이 찔렸으니 살아나기는 힘들 것이다.
갑작스러운 싸움에 밥을 먹던 사람들이 도망조차 치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다가 살귀들이 쓰러지자 괴성을 지르며 객잔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평온한 객잔에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혈풍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객잔에 남은 것은 운호 일행뿐이었다.
살막의 공격은 외팔이와 여인의 공격을 끝으로 멈추었기 때문에 운여는 뒤늦게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운호가 낚아챈 요리의 양은 넷이 먹기 충분할 정도로 많았다.
“이제 공격 안 할 모양이네.”
“정면으로 부딪치면 안 된다는 거 알겠지. 아마 다른 수단을 강구할 모양이다.”
운상이 우물거리며 입을 열자 정신없이 먹는 운여를 바라보며 운호가 대답했다.
운호는 운여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슬며시 젓가락을 내려놨는데 충분히 배를 채운 것 같았다.
그러나 운상은 여전히 젓가락을 놀리며 운호의 대답에 연이은 질문을 던졌다.
“어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잠잘 때 암습하는 거야. 아무리 고수라도 잠잘 때는 허점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편하게 자기는 글렀단 말이구나.”
“그 외에도 암습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
어차피 들어온 객잔이었으니 운호 일행은 식사를 마친 후 방까지 잡고 짐을 풀었다.
육 일이나 노숙을 했기 때문에 편안한 곳에서 잠자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싶었다.
물론 먼저 여기서 머물자고 의견을 제시한 것은 소하령이었다.
깔끔함의 상징인 그녀는 오랫동안 몸단장을 하지 못한 것이 너무 힘들었던 모양이었던지 출발하자는 운호의 말을 들은 후 침을 튀기며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살막은 어딜 가든 따라올 테니 이대로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정정당당한 싸움이라면 살막이 아니라 살막 할애비가 온다 해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혈염공이 십오천강에 속하는 강자라고 하나 운호는 공청석유란 천고의 기연을 얻기 전에 이미 마창을 잡은 전력이 있었다.
그 말은 기연을 얻은 지금의 운호라면 혈염공 정도는 언제든지 격퇴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살막 정도 되는 문파와 정면 승부를 펼친다면 분명 생명을 담보로 하는 승부를 벌여야 할 것이다.
천고의 기연을 얻어 절대의 경지로 들어섰지만 삼십팔세에 속하는 문파를 상대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나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객잔에 머물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그만큼 살막의 암습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머물며 살귀가 되어버린 자객들의 검은 정면 승부를 할 때보다 몇 배나 무서운 법이다.
소하령이 목욕을 하겠다는 말을 하자 운호와 친구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평상시 같았다면 하지 않아야 할 말이었다.
처녀가 자신이 목욕하겠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처럼 살막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니라 협박으로 변하고 만다.
그녀는 말은 목욕을 할 테니 철저하게 경호해 달라는 부탁이었기 때문이었다.
운상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고 운호와 운여가 늑대 울음소리 비슷한 신음을 쏟아냈다.
말린다고 말려지는 게 아니란 걸 안다.
객잔에 머물겠다고 우긴 이유가 목욕을 하고 싶어서였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 그녀의 요구를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랬기에 운호는 신음을 내지른 후 운상을 쳐다봤다.
“할 수 없지. 너는 문을 지켜. 운여는 반대쪽 창가를 지키고. 나는 지붕을 지킬 테니까.”
“왜 나보고 문을 지키라는 거냐?”
“그럼 내가 지킬까? 놈들 공격으로 하령이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설마… 그런!”
“빨리 결정해. 하령이 물 받는다.”
“으… 알았다.”
운호의 협박에 할 수 없이 운상이 항복을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으니 운호가 말한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소하령이 방문을 열고 튀어나오는 경우는 목숨을 위협받는 경우밖에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방문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좋아하는 여인의 나체를 친구 놈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참으로 세상일이 묘하다.
우려가 현실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소하령이 목욕을 시작한 지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규모에 그쳤던 일차 공격 때와는 다르게 살막의 이차 공격은 삼 방향의 집단 공격이었다.
문제는 살막이 운호 일행의 행동을 추측이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다수로 조를 이루어 공격해 온 살귀들은 정면 승부를 피하고 지붕과 창문을 파고드는 움직임을 보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자를 향해 검기를 튕겨낸 후 즉각 방향을 돌려 다른 자를 공격했다.
살귀들은 운호를 공격하는 대신 두더지처럼 지붕을 뚫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싸움의 방향은 이상하게 흐를 수밖에 없었다.
뚫으려는 자와 막는 자의 싸움.
목숨을 취할 틈도 없이 방어해야만 하는 이상한 싸움은 지붕과 창문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운상은 친구들이 지붕과 창 쪽으로 이동한 후 방문을 지키며 물이 흐르는 소리에 눈을 꽉 감고 말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머릿속에서는 소하령의 아름다운 나신이 물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도사가 수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상상을 하지 않는 놈은 부처나 원시천존과 동격의 수련을 쌓은 자일 것이다.
또르륵… 또륵… 찰랑, 찰랑…
아마 운호 이놈은 이런 장면을 미리 연상하고 자신에게 방문을 맡긴 건지도 모르겠다.
살귀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신체의 일부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였다.
너무 반가웠다. 놈들이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도사로서의 품격과 자존심이 단박에 날아갔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